[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암울한 일제강점기 『포교법개설』을 펴낸 불교 청년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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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1 년 12 월 [통권 제104호] / / 작성일21-12-03 14:11 / 조회4,644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12 | 강유문姜裕文 1898-1941
강유문姜裕文(1898-1941)은 학승이자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불교 잡지를 발간하고 대중교화를 위한 『포교법 개설』을 저술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와 사회화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19세기부터 100년간 불교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현실적 대안을 고민하는 등 한국불교의 역사와 당면한 과제에 깊이 천착했다. 다만 식민지라는 현실적 제약 속에서 고군분투하였지만 40대 전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뚜렷한 학문적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강유문의 호는 묵당墨堂이고, 경상북도 의성 고운사孤雲寺에서 출가하였으며, 1930년에 불교전수학교에서 개명한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불교전수학교 시절인 1928년 12월에 나온 교지 《일광一光》의 창간호에서 〈학생작품〉 투고자로 강유문의 이름이 확인된다. 이 창간호의 권두에는 만해 한용운이 쓴 시조 한 수가 있고, 권상로, 김영수, 백용성, 에다 도시오 등의 글이 실렸다. 《일광》의 편집과 발행은 처음에 찬불가의 작가로 유명한 조학유가 담당하였고, 이후 송종헌, 박한영, 김경주 등이 잡지를 펴냈다.
1930년 5월에는 김상호, 김법린, 이용조, 조학유 등이 사찰령 체제의 극복과 불교 자주화를 위해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결성했다. 이어 몇몇 동지들을 더 규합하고 중앙불전의 학생들도 영입하였는데 강유문도 여기에 참여했으며, 만당의 당수로는 한용운이 추대되었다. 이처럼 강유문은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는데, 총독부의 사찰령 자체를 비판하고 불교계의 혁신과 자율적 종권의 달성을 부르짖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준비위원에도 이름을 올렸다.
1931년에는 일본으로 유학 가서 다이쇼(大正) 대학 사학과에 입학했고, 청년총동맹 도쿄 동맹의 문교부장 및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 시기에 중앙불전의 1회 졸업생들이 주축이 된 재일 유학생 잡지 《금강저金剛杵》 19호와 21호의 편집 및 발행인도 겸했다. 《금강저》는 재일불교청년회의 기관지로 1924년 5월에 창간되었는데, 건전한 학풍의 진작을 통해 이상적인 새 조선불교를 건설하는 것을 발간 목적으로 하였고, 학술논단, 교계 단편, 시, 수필 등이 실렸다.
귀국 후 그는 1936년 7월에 창간된 월간 《경북불교》의 편집인과 발행인으로도 활동했다. 《경북불교》는 1941년 7월의 48호까지 나왔는데, 고운사, 기림사, 김룡사, 동화사, 은해사의 5개 본사가 중심이 된 경북불교협회에서 펴냈다. 여기에는 경북 불교계의 동향과 사찰별 활동은 물론 대처식육론, 심전개발운동 등 눈여겨볼 만한 주제의 글들이 실려 있다. 강유문은 1937년 중반부터 모교인 중앙불전의 강사를 맡으면서 1937년 10월 제13호부터는 김해윤이 발행 책임을 이어받았다.
이 무렵 강유문은 자신의 출가 사찰인 고운사가 포함된 『경북오본산고금기요慶北五本山古今紀要』(1937년)를 펴내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고운사는 681년 의상이 ‘고운사高雲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가 이곳과 인연이 있는 최치원의 자字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개칭했다고 한다. 강유문은 1930년대에 「최근 백년간 조선불교 개관」, 「조선불교는 어디로」, 「신돈고辛旽考」 등 한국불교의 역사, 현재와 미래 등을 고민하는 글들을 불교계 잡지에 게재했다. 또 「조선불교연표」도 작성했고 일본 유학승답게 「메이지 초기의 일본불교-폐불훼석廢佛毁釋과 승려의 각성」이라는 글도 기고하였다. 1938년에는 그의 대표 저작이자 불교 대중화와 사회화를 위한 포석으로 『포교법 개설』이 출판되었다.
『불교』 잡지 제100호에 실린 강유문의 「최근 백년간 조선불교 개관」은 1830년대부터 1930년대 초까지 약 100년간의 최근세 불교사의 흐름을 되짚어 본 것이다. 그는 불교 정책의 변화, 기관 설립 등을 기준으로 하여 6시대로 시기를 구분하였다. 우선 1830년부터 70년간은 조선의 배불정책의 연장선에서 놓인 ‘타성적 수난 시대’라고 규정하였다. 그가 근거로 든 것은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조치, 승려 인권의 문제 및 잡역과 공납의 폐해 등이었고, 혼란한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사찰은 산간에서 겨우 명맥만 유지했다고 보았다. 이처럼 근대기에 들어 전통의 상을 그려낼 때 과거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그중 하나는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인 19세기 불교에 대한 암울한 기억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다만 강유문도 일부 승려들의 노력에 의해 수행 전통이 이어진 점과 백파긍선, 초의의순 등에 의해 오랜 기간 선 논쟁이 활발히 펼쳐진 사실에 주목하며 일정한 평가를 내렸다.
이어서 그는 관리서 시대, 원종圓宗 종무원 시대, 연합사무소 시대, 교무원 시대, 종회 시대로 나누어 20세기 초기의 굵직한 사건과 현황을 정리했다, 일본불교의 조선 진출 양상, 1899년에 서울 동대문 밖에 세워진 원흥사元興寺, 불교 관리기구인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 근대기 최초의 종단인 원종 등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였다. 대한제국이 불교를 관할하기 위해 만든 사사관리서는 1902년에 원흥사에 두었고, 이때 원흥사를 대법산으로 하여 전국 16개 중법산 체제를 가동했으며, 대한제국 사찰령이 시행되었다. 1908년부터는 원종 종무원 시대로서 1910년 원종의 종정 이회광李晦光과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비밀맹약 체결, 그에 따른 국내의 반발 움직임과 임제종臨濟宗 건립 운동을 다루었다. 이어 1911년부터는 30본산 연합사무소 시대로서 총독부의 사찰령 시행과 30본산 본말사 체제의 성립, 본산 주지 들의 전횡 문제 등을 언급했다.
1922년 이후 교무원 시대는 청년 승려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총무원과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본산 주지 중심의 교무원이 대립하다가 결국 교무원으로 통합된 시기를 다루었다. 1929년 이후 이 글을 쓴 1932년까지는 종회 시대로서 1929년의 전국 승려대회에서 종헌을 제정하고 중앙의 통일 기구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펼쳐진 때였다. 강유문은 글의 결론을 맺으면서 불교계가 타성적 수난 시대를 지나 청년 승려를 중심으로 대중적 정의를 짊어지고 종정宗政의 실권을 갖게 되어 발전의 수레바퀴를 돌릴 수 있겠다는 희망 섞인 기대를 토로했다. 하지만 한국불교의 자주성과 종권을 되찾으려는 종헌 제정 노력은 총독부의 공인을 받지 못하고 끝내 물거품이 되었다.
다음으로는 그의 주저인 『포교법 개설』에 대해 소개한다. 이 책은 1938년 2월 1일 서울의 해동역경원에서 신연활자본으로 간행되었는데, 해동역경원은 선학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표지의 제명은 한용운이 썼으며, 강유문의 서문은 1938년 1월 7일 백악산 밑 구홀방장에서 집필되었다. 그는 최근에 들어 포교법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하면서, 1937년 여름부터 다음 해 1월까지 일본 책인 『일반교화법』을 중심으로 10여 종의 관련 서적을 참고해 원고를 작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부록을 포함해 책의 분량은 99쪽이며 국한문 혼용체로 서술되었다. 목차를 보면 앞에 서언이 있고 제1편 능화能化는 의의, 수양(소질, 고전, 수양), 기관, 교의, 제2편 소화所化는 의의, 농촌(농본, 계발), 도시, 개인(개성, 특징, 신념, 포교), 군중(분류, 심리, 특징, 배경, 지도, 포교), 제3편 방법은 분류, 변론(종류, 교재, 조직, 언어, 태도, 결언), 문서(의의, 종류), 의식, 예술, 사업으로 되어 있다. 부록에서는 강연회의 의의, 종류, 준비, 개회, 폐회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였고, 포교 규칙과 포교 원서가 끝에 부기되었다.
앞의 서언에서는 포교를 ‘가르침[敎]을 베푸는[宣布] 것’으로 정의하고 기독교의 전도傳道에 비유하였다. 그는 부처님이 정각을 얻은 후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들에게 사성제四聖諦를 설한 것을 포교의 시초라고 보았고, 이때 부처님은 포교의 주체, 비구는 포교의 대상, 사성제는 포교의 내용인 교의, 그리고 교의를 전달하는 것을 포교의 방법이라고 규정했다. 나아가 포교 는 “대중의 도덕적 향상을 목적으로 하고 사상을 선도하며 사회를 개선하는 일반 교화이면서 또한 불교의 독자적 교화”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제1편에서는 포교사와 일반 승려, 신도를 구분하고 자비와 열성, 설법 능력, 신앙, 학식, 건강 등 포교사의 자질과 필요한 소양에 대해 언급했다. 또 포교 장소, 운영기관 및 보조기관과 재정 등에 대해 기술하고, 배워야 할 과목으로 문학과 한문, 역사와 종교, 철학과 윤리, 정치와 사회, 경제와 수학 등 여러 분야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또한 포교사는 근본불교, 통불교를 교 의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편 소화에서는 포교 대상의 근기와 환경, 시대성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보고, 농촌과 도시, 개인과 군중 등으로 유형을 나누어 각각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농촌의 경우 불교 포교와 계발, 자부심 고취와 정신 양성, 경제와 위생 등 생활 개선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도시 포교는 설교 및 강연회, 경전독송회, 신앙좌담회, 신문과 잡지 포교, 불서 출판, 각종 기념식과 장례식, 유치원과 일요학교, 청년회와 부인회, 교육 포교(학교 경영), 각종 사회사업과 단체 포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3편에서는 사업의 대상으로 빈민 구제, 가난 예방, 아동 보호, 사회 교화 등을 열거했고 더 구체적으로는 직업 소개, 실업 보호, 보건과 위생, 저리 금융, 부업 장려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 또 청소년 교화, 부인 교화의 다양한 방식도 소개하고 있다. 부록에서는 강의의 목적, 강사와 사회자, 청중의 유형, 시간과 공간, 선전과 회의 진행 등 강연회와 관련해 실제 현실에서 요구되는 세부적 사항과 지침, 그리고 당시 시행되던 포교규칙 19조를 수록하고 행정 서식도 실었다.
강유문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과 불교 근대화 및 대중화라는 지상 명제 사이에서 고뇌하며 현실의 당면 과제와 불교의 나아갈 길을 스스로 찾고 헤쳐 나아가고자 한 선각적 지식인이었다. 일본 대학에 유학을 가서 사학을 전공한 그였기에 한국불교의 역사에 큰 관심을 가졌고 관련된 글을 쓰기도 했다. 또한 불교 잡지를 직접 발행하고 사지 편찬을 주도했다. 무엇보다 『포교법 개설』을 저술하여 불교가 사회와 민중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다만 민족 해방을 몇 년 앞두고 한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여 불교계에 더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한 점이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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