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불교佛敎』② -편집인 한용운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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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 2021 년 12 월 [통권 제104호] / / 작성일21-12-03 10:22 / 조회4,892회 / 댓글0건본문
근대불교잡지 산책 12 |『불교佛敎』(통권 108호, 1924.7-1933.7) ②
불교사 사장으로 부임하다
근대 불교잡지 가운데 최장수 잡지는 9년간에 걸쳐 총 108호를 간행한 『불교』지다. 잡지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아 2020년도에는 국가등록문화재 제782호로 지정된 바 있다. 『불교』는 지난 호에 소개한 것처럼 창간호~83호(1931.5)는 권상로가 편집과 발행을 담당했으며, 84·85호(1931.7) 이후 종간호(1933.7)까지는 한용운이 담당하였다.
사진 1. 만해의 『님의 침묵』과 『십현담주해』(1926).
만해는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3년 동안 투옥되었다. 불교계의 민족대표 백용성과 한용운은 3년의 옥고를 치르며 어떤 고뇌와 수행을 하였던가. 백용성은 타 종교인들이 감옥에서 한글로 된 경전을 읽는 모습에 자극 받아 한문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원력을 세웠다. 그는 1925년에 대각교를 창립하여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였고, 1926년 4월부터 1927년 10월까지 『화엄경』 80권을 우리말로 번역(『조선글화엄경』)하여 새로운 불교 포교의 시대를 열었다. 만해는 1925년 설악산 오세암에서 수행하면서 『십현담주해』(1926년)와 근대문학의 기념비적인 시집 『님의 침묵』(1926년)을 집필하였다.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한 3년의 구금 생활이 용성과 만해에게는 가장 쓰라린 고통의 시기였을지라도, 근대불교와 민족문화를 위해서는 창조적인 산고의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사진 1, 사진 2).
만해의 사상적 깊이와 문학적 깊이를 느껴볼 수 있는 이들 저작은 만해사상과 문학의 최정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후의 행보로, 만해가 1931년 7월에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불교』지를 간행하게 된 것은 불법의 사회적 구현과 실천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리고 본 연재물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문화 분야의 성과도 만만치 않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편집 방침의 변화
기존의 『불교』 창간호에서는 ‘조선불교로 하여금 불교다운 불교’가 되기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자는 의지를 표명하였고, 그 방안으로 참선, 교육, 법식(의례)의 정비라는 목표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48호부터는 문예, 학술 등을 포괄하는 고급 학술잡지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방침에 따라 지면을 구성하였다.
만해가 제작에 참여한 첫 호인 84·85호에는 『불교』지의 새로운 편집 방향이 명시되지 않았다. 다만 “불교를 읽는 것은 수양과 지식을 아울러 얻는 것이오.”(84·85호)(사진 3)라는 문구는 수양과 지식을 전하는 매체로서 『불교』지를 규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만해는 이후 국내외 종교 소식을 다양하게 전달하는 지면을 마련하였다. 84·85호~87호(1931.9)에는 만해 이름으로 「만화漫話」란을, 88호(1931.10)부터 99호(1932.9)까지는 ‘만인萬人’이란 호로 「한갈등閑葛藤」란을 마련하여 러시아, 중국, 아메리카, 멕시코, 일본, 이탈리아,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태리 등의 다양한 해외 불교 소식을 소개하였다(사진4). 만해는 특히 서구의 반종교운동을 자세하게 소개하였는데, 이는 시대 상황과 해외 불교계에 대한 그의 관심이 직접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기획과 함께 「불교시단」과 「독자문단」을 신설하여 다수의 시 작품을 게재하였고, 그 결과 다수의 불교청년, 문학청년이 배출되었다.
국보급 한글 경판을 발굴, 인출印出하다
1920, 30년대에 불교계는 『불교』지를 통해 한글 경판(언해 불서)을 발굴, 소개하는 기사를 수록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먼저 권상로 편집 시기에는 권상로(「오대산에 유진留鎭한 어첩御牒에 대하야」, 59호), 최남선(「영인 대산어첩서臺山御牒敍」, 59호), 김태흡(「세종대왕의 신불과 월인천강곡」, 69호) 등이 투고하였는데, 이들 자료는 당시 대학이나 전문 학술잡지가 없는 현실에서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 자료를 발굴, 소개하는 의의가 있다. 만해 역시 발행인으로서 『불교』지에 새로 발굴한 보물급 언해(한글) 불서를 적극적으로 소개하여 학계와 문화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는 「국보적 한글 경판의 발견 경로」(87호, 1931.9)(사진 5)에서 발굴의 과정을 소개하였고, 이후 국보급 자료를 영인하여 학계에 제공하였으며, 최종 보고서로 「한글경 인출을 마치고」(103호, 1933.1)를 수록하였다.
다음 글은 만해가 1931년에 전주 안심사에 한글 경판이 소장되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650여 판의 서지 정보를 확인한 후 받은 놀라움을 기사화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 존재를 인식하던 것이 산질된 월인천강곡 4권의 판이 있을 뿐이오, 그 밖에는 실로 요요무문寥廖無聞 그 형영形影을 볼 수 없었다. 나는 약 십여 일 전에 김종래 씨와 한상운 씨로부터 전주 안심사에 한글 경판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중략) 나는 그 말을 들은 뒤에 나의 일생에 많이 받아본 기억이었는 정도의 충동을 받았다. 그리하여 듣던 그 이튿날 (중략) 한글 경판의 정리를 시작하였는데 모든 경판 약 이천 판이 뒤섞여 있는 중에서 종류와 순서를 찾아서 정리하기에는 여간 곤란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손이 경판에 접촉될 때마다 강반의 감개를 석긴 기쁜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으며, 동시에 일판 이판 순서를 찾아 정리할 때에 만일 낙질이 되었으면 어찌하나 하는 염려로 마음은 긴장에 긴장을 거듭하였다. (「국보적 한글 경판의 발견 경로」, 불교 87호, 1931.9. 표기 일부 수정)
한글 경판으로 『월인천강지곡』 4권의 판목만 전해지던 당시에, 다량의 경판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안심사로 달려가 확인하고 감격하는 만해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이후 직접 내려가 판목을 정리하여, 『원각경』, 『금강경』, 『은중경』, 『천자千字』, 『유합類合』 등 경판 662판 중 7판이 누락된 658판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이를 불교계와 조선학계의 경사이며 “한글 경판은 모든 의의에 있어서 조선의 국보적 가치를 가진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를 수호할 방안으로 세 가지 방안을 모색한 결과 경성에 이안하여 일반 대중에게 편의를 주는 방안을 실행하고자 한다고 소개하였다.
93호(1932.2)~95호(1932.5)에는 한글 경판 인출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광고문 가운데는 “조선 문화의 경이적 백미白眉”, “국보적 한글 경판의 인출”, “학계 각 방면의 충동여하衝動如何”라는 강렬한 문구가 사용되었다(사진 6). 「한글경 인출을 마치고」(103호, (1933.1)에서는 『원각경』,『은중경』,『금강경』 판목 가운데 훼손된 판본을 직접 수리하여 보완하느라 인출 기간이 늦어졌다는 사정과 함께 「한글 경판 신각급보수일람표新刻及修補一覽表」 를 제시하였다.
값없는 보배란
티끌에서 찾느니라.
티끌에서 찾았거니
티끌에 묻을쏘냐.
두만강豆滿江에 고히 씻어
백두산白頭山에 걸어놓고
청천백일靑天白日 엄숙嚴肅한 빛에
쪼이고 다시 쪼여
반만년半萬年 살아오는
사랑하는 우리 겨레
보고 읽고 다시 써서
온 누리의 빛 지으리라.
인용한 시는 만해가 한글 경판 발굴과 영인 제작 과정에서 받은 마음 깊이 우러난 감흥을 시로 읊은 것이다(표기 일부 수정).
『님의 침묵』이라는 절창을 남긴 시인이자 조국 독립을 위해 기여했던 지사적 풍모가 가득했던 인상이 만해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우리글로 시를 써서 우리말의 안팎을 풍부하게 또 심오하게 함으로써 한글의 창달에 기여하였고, 조선 초의 한글 경판을 발굴하고 국보적 가치를 잡지를 통해 강조함으로써 한글문화의 창달에 기여하였다. 현재 우리 학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세한글 연구가 자료적으로 만해의 발굴 성과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크게 상찬받아 마땅하다.
불교 문학청년을 배출하다
문학란은 연도별로 변화가 수반되었다. 먼저 1931년의 가장 큰 변화는 권두언 시를 수록한 것과 「불교시단佛敎詩壇」을 신설한 것이다. 만해가 편집을 맡은 84·85호부터 『불교』지에는 약간의 체제 변화가 따랐는데, 먼저 권두언에 편집인의 시를 수록하는 체제가 다시 갖추어졌다. 그리고 87호(1931.9)에 「불교시단」을 신설하고 호마다 다수의 불교 청년의 시를 게재하였다. 만해 등장 이후 90호(1931.12)까지 등장하는 시 투고 작가는 이광수, 이병기, 리범신, 류엽, 영매학인, 조종현(탄향), 강유문(유문), 홍해은, 최설천, 김어수 등인데, 조종현의 작품이 가장 많이 수록되었다. 이 시기는 조종현, 김어수 등의 강원 소속 작가, 강유문(중앙불전) 등의 전문학교 학생 작가가 등장하는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
1932년 이후 종간호까지의 변화는 「독자시조단讀者時調壇」과 「독자문단讀者文壇」을 신설한 것이다.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불교사는 94호(1932.4)부터 다시 조선불교선교양종중앙교무원 직영으로 전환되어, 지사를 폐지하고 각 본산 종무소에서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기존에 지사제를 홍보하면서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 독자와의 소통이었는데, 교무원으로 전환하게 되면서 전과 다른 방식으로 독자의 참여를 유도해야만 하였다. 이는 「불교시단」 「독자시논단」 「독자문단」란을 신설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96호(1932.6) 「사고社告」에서 “본지로 하여금 독자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제1보”로서 「독자시조단」을 신설할 것을 예고하였고, 97호(1932.7)~99호(1932.9)에 걸쳐 「독자시조단」을 신설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수록된 작가가 기존에 「불교시단」에 투고한 작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양자는 100호부터는 구분 없이 「불교 시단」으로 흡수되었다.
독자들과 소통하여 참여를 유도하려는 노력은 「독자시조단」에 이어 「독자논단」의 신설로 이어졌고, 106호(1933.4)부터 종간호까지 「독자문단」이 배치되었다. 105호(1933.3)의 「사고」에는 「독자문단」을 창설하면서 ‘논문, 기행문, 문예, 기타’의 글을 공모하였다(사진 7).
이후의 양상을 보면 87호(1931.9)부터 편제된 「불교시단」이 종간호까지 명맥을 유지한 가운데 특히 100호(1932.10) 기념호에 폭발적으로 시의 분량이 많아졌고 그 이후에도 100호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수록되는 경향이 있다.
87호 이후 종간호까지 「불교시단」에 1회 이상 투고한 시인은 47명이다. 빈도순으로는 조종현(조탄향 포함, 19회 32수), 김태흡(8회 8수), 김일엽(7회 14수), 나방우(7회 8수), 윤한성(7회 7수), 김어수(6회 11수) 등이다.
만해는 『불교』지를 통해 강원 및 중앙불전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많은 문학청년에게 지면을 제공함으로써 근대 불교 문학장의 확장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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