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이사理事의 원융한 삶을 산 한국 근대 불교계의 대표 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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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1 년 11 월 [통권 제103호] / / 작성일21-11-03 21:49 / 조회4,713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11 / 박한영朴漢永 1870-1948
박한영朴漢永(187-1948)은 근대 한국불교의 저명한 학승으로 법호는 석전, 영호, 법명은 정호이다. 19세기에 선禪 논쟁을 촉발한 백파긍선白坡亘璇의 법맥을 이어받았고 교학에도 정통했다. 만해 한용운 등과 함께 자주적 성격이 강한 임제종 운동에 동참했고, 잡지 《해동불보海東佛報》를 창간하는 등 불교 근대화와 대중화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장을 지냈고, 해방 직후 조선불교중앙총무원의 초대 교정敎正으로 선출되는 등 이사理事를 원융하는 삶을 살았다. 이처럼 그는 교육과 교단 운영에서 근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위상을 가진 종장이었다.
1870년 전라도 완주 초포면 조사리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유교의 사서삼경을 읽었다. 19세가 되어 완주 위봉사의 산내 암자인 태조암에서 금산화상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백양사 운문암의 환응탄영幻應坦渶에게 『금강경』, 『능엄경』, 『원각경』, 『대승기신론』의 사교과를 배웠고, 당대 최고의 강백으로 이름난 조계산 선암사의 경운원기擎雲元奇에게 『화엄경』, 『전등록』, 『선문염송』의 대교과를 수학하여 이력 과정을 모두 마쳤다. 한편 1892년 함경도의 석왕사를 시작으로 1906년까지 15년에 걸쳐 금강산 신계사, 건봉사 등 각지의 사찰에서 여름철마다 안거에 들어가 선을 수행했다.
1895년에는 순창 구암사의 설유처명雪乳處明 문하에 들어가 백파긍선에서 설두봉기雪竇奉琪를 거쳐 이어져 온 법을 전수했고 다음 해에 개강했다. 이때 당호를 영호映湖라고 했고, 일찍이 추사 김정희가 긍선에게 나중에 도를 깨친 이가 있으면 주라고 했던 석전石顚이라는 호도 얻게 되었다. 이후 대원사, 백양사, 대흥사, 해인사, 법주사, 화엄사, 범어사 등 호남과 영남, 호서의 주요 거찰에서 강론을 펼쳤다. 그러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39세가 되던 1908년에 서울로 올라와 중앙 무대에서 활동하게 된다.
1911년 1월에는 한용운, 진진응, 오성월, 송종헌 등과 함께 송광사에서 열린 임제종 설립 임시총회에 참여했다. 이는 이회광이 주도하여 한국의 원종과 일본 조동종 사이의 연합조약을 비밀리에 체결한 데 반대하며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임제종에서 찾아 독자적인 종단을 건립하려는 운동이었다. 1913년에는 《조선불교월보》를 이은 《해동불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편집인과 발행인을 맡았다. 박한영은 논설과 학술, 전기와 수필 등으로 구성된 이 잡지 발간의 취지를 대승불교의 선양이라고 밝혔고 직접 글도 실었다.
1914년에는 불교고등강숙에서 교편을 잡았고, 1916년 불교중앙학림의 운영과 강의를 맡았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민족의식에 눈을 떠서 임시정부와 관련된 활동을 했다고 한다. 1924년에는 백용성과 함께 잡지 《불일》을 창간하여 편집인을 했고, 다음 해에는 한국의 불서를 집성한 『조선불교총서』의 간행을 추진했다. 1926년에는 서울 안암동의 개운사에 불교전문강원을 설립하였고, 1929년 개운사 대원암의 불교연구원 강주를 맡기도 했다.
1929년에는 조선불교승려대회가 열렸는데, 7인의 교정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대되어 교단 전체를 대표하는 높은 위상을 갖게 되었다. 63세가 되던 1932년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장에 취임했다. 근대 시기 중앙의 불교 교육기관은 1906년 명진학교를 시작으로 1910년 불교사범학교, 1914년 불교고등강숙, 1915년 중앙학림으로 학제와 명칭이 계속 변경되었다. 또 3·1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중앙학림이 강제 폐교된 이후 1928년 불교전수학교로 다시 문을 열었고, 1930년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 1940년 혜화전문학교로 교명이 계속 바뀌었다.
1945년 76세 때에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았고 조선불교중앙총무원의 초대 교정이 되어 1946년까지 활동했다. 말년에는 전라북도 정읍 내장사에 주석하다가 1948년 4월 8일 세수 79세, 법랍 61세로 입적했다. 저술로는 『석전시초』와 『석전문초』가 있고, 그 외에도 『계학약전』, 『인명입정리론회석』, 『불교사람요』, 『정선 치문집설』, 『정선 염송급설화』, 『정선 사산비명』 등의 편저서가 전하며, 나중에 『영호대종사어록』이 만들어졌다. 또한 신문과 잡지 등에 실은 100편이 넘는 논설과 수필도 남아 있다.
박한영은 1910년대 초부터 불교의 혁신을 주장하거나 학술적 내용을 담은 글을 잡지에 발표했다. 그는 종교와 철학이 어우러진 불교의 근대성에 주목하였고 포교를 통한 중생구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삼국시대는 태동기, 통일신라와 고려는 장성 시대, 조선은 노후 시대, 지금은 부활 시대’라고 평가했고, ‘이후는 이사원융을 실현하여 모든 일이 밝게 드러나는 중차대한 시대’라고 전망했다.
그가 불교계의 자각과 각성을 촉구한 글들은 《조선불교월보》, 《해동불보》, 《불일》, 《금강저》 등에 주로 수록되었다. 여기서 박한영은 당시 불교계의 실태와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개혁과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는 불교의 현대적 의의와 가능성, 후속 세대의 양성을 위한 교육, 포교의 중요성 등을 역설했다. 한편 『계학약전』(1926)에서는 구족계를 어겼을 때 가장 무거운 죄에 해당하는 네 바라이의 순서를 살·도·음·망에서 음·살·도·망으로 바꾸어 당시 교단의 풍조가 된 대처帶妻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웠다.
박한영은 한국불교의 역사에 큰 관심을 가졌고 자료 발굴과 정리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불법이 전래된 연원, 고승과 전등의 연기, 사찰과 탑 및 불상의 연혁, 대장경 및 목판과 금석문, 건축과 미술, 범음 등의 연구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렇기에 중국 선종을 전공한 일본인 학자 누카리야 가이텐忽滑谷快天이 『조선선교사』(1930)를 쓸 때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1918), 다카하시 도루高橋亨의 『이조불교』(1930)와 같은 선행 연구와 자료를 참고하는 한편 박한영 등의 자문과 도움으로 책을 낼 수 있었다고 밝힌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는 박한영이 쓴 『불교사람요』가 남아 있다. 이는 1930년대에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재로 쓰인 책으로 추정된다. 제목과 체제를 보면 불교사 전체를 망라한 것으로 보이지만, 어쩐 일인지 현존본은 본문 앞부분의 「석가본행기」만 수록되어 있다. 다만 서론에 해당하는 「통론」에서 인도와 중국, 한국과 일본 불교사를 간략히 소개하고 있어 책의 대략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즉 석가의 행적부터 아소카왕 때의 불교 확산, 대승불교의 성립과 중관 및 유식 학파, 불교의 중국 전래와 불전의 한역, 당과 송대 이후 불교사, 고려본을 비롯한 불서의 동아시아 유통, 선학 및 이학의 병행 등을 다루었다.
이어 한국의 불교 수용과 선종의 9산선문 성립, 구법승의 활동 등을 개관하였고, 일본불교는 고대의 남도 6종과 가마쿠라 이후의 종파불교 문제 등을 서술했다. 나아가 중국과 한국불교 외에 남부의 소승불교, 티베트와 몽고 등 북부의 라마 불교와 밀교, 대·소승과 현·밀교를 갖춘 일본의 동부불교로 나누었다. 이는 일본학계의 불교 연구 성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 일본 우위의 시각까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한편 『인명입정리론회석』은 송광사 지방학림의 등사본(1920) 등이 전하는데, 등사본의 앞에는 <고인명·신인명·형식논리를 비교한 표>를 비롯해 도표로 인명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고 인명과 서양 논리학을 비교해 놓았다. 본문은 주로 상갈라주商羯羅主의 『인명입정리론』, 그리고 중국 명대 명욱明昱의 『인명입정리론직소』에 근거하여 주석했다. 박한영의 해설은 보충 해석, 추가 주석의 형식으로 붙여 놓았다. 이 밖에도 명대 지욱智旭의 『인명입정리론직해』와 진계眞界의 『인명입정리론해』를 인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여러 주석을 모아 해석한다는 뜻의 회석을 책의 제목으로 한 것이다. 여기서 유식 및 인명까지 섭렵한 그의 수준 높은 불교 이해를 볼 수 있다.
또 중국 청말의 사상가 탄쓰퉁譚嗣同의 『인학仁學』을 옮긴 「인학절본」도 눈길을 끈다. 《조선불교월보》에 8회에 걸쳐 번역하여 실은 이 글은 소통과 평등에서 근대적 가치를 찾았고 유가의 인仁이 이와 통한다고 보았다. 『인학』에서는 인을 도덕의 기준이 되는 형이상학적 원리로 보고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자유와 자주에 의한 친구임을 내세우면서 이것이 수직적 질서를 해체하고 사회를 결합하는 원리이며 사해 동포주의의 기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탄쓰퉁의 사상에는 유교와 함께 불교의 화엄사상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화엄학을 중시한 박한영 또한 그의 논리에 동조하였기에 이를 번역해서 소개한 것이다.
『조선불교사고』(1937)를 쓴 불교사학자 김영수는 선암사의 경봉, 화엄사의 진응과 함께 그를 근대의 3대 강백으로 꼽으면서, “불전은 물론 경사자집과 노장을 섭렵하였고 시문과 서법까지 능통한 뛰어난 대종장”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박한영은 선과 교를 겸수했고 평생 계행을 지키면서 계율의 수지를 중시했다. 이처럼 계·정·혜 삼학의 불교 전통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불교계의 각성을 촉구하고 개혁을 주창하는 등 불교 근대화에도 앞장섰다. 또 전통 강원은 물론 근대식 불교 교육기관에서 후학을 키우는 데 힘을 썼고, 교단 전체를 이끄는 교정의 역할도 맡았다. 그는 불교사와 교학에 정통했고, 동양사상과 서양철학을 결부한 근대적 학술 담론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처럼 박한영은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올곧게 지켜낸 교계의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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