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건축 이야기]
사굴산파의 개조 범일스님 “불전 말고 법당만 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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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화 / 2021 년 11 월 [통권 제103호] / / 작성일21-11-03 10:58 / 조회5,126회 / 댓글0건본문
불교건축 이야기 11 / 유수법당唯樹法堂의 사찰, 굴산사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불교
선禪이란 기존의 불교가 학문적 성격으로 치우쳐 정교한 논리적 유희에만 빠져들어 대중들과 멀어진 순간 그 반작용으로 세력을 확장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선종의 개조開祖로 알려진 보리달마(?-528?)로 시작하여 6조 혜능(638-713)에 이르러 선은 교학불교와 비견할 만큼 성장하여 불교의 한 흐름을 형성할 수 있었다.
혜능 이전의 선은 기존의 주류를 형성하던 교학불교에 대한 반발이었다면, 혜능에 이르러서는 가능성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백장회해(720-814)에 와서는 대안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기존 사원에서 선을 전문으로 하는 사원으로 독립하고 사원의 운영과 수행에 관한 규칙을 만들었다.
당시 백장회해가 중심이 되어 선종사원으로 독립한 사건은 불교사적으로 아주 큰 의미가 있는데, 선불교의 시작과 함께 서서히 축적해 가던 민중불교의 역량이 결국에는 분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독립의 의미를 불교사 연구 성과를 빌려 설명하자면, 황실에 기대어 축리祝釐[복을 빎]로만 운영되다시피 하던 기존 사원에 경종이 된 사건이다.
그 결과 선종사원은 ‘불립불전 유수법당不立佛殿 唯樹法堂[불전 말고 법당만 세워라]’이라고 하여 외부에 기대는 불전은 세우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법당만을 세우는 것을 원칙으로 삼게 된다. 이러한 조치로 농선일치農禪一致를 통해 노동과 수행을 하나로 보고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며 독립적인 수행공동체를 만드는 전통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중국에서의 선풍은 우리나라에도 들어오는데, 9세기 초반 유학승들에 의해 소개된 선에 대해 신라의 중앙세력은 거부하였으나 지방 호족세력은 수용하게 된다. 이때 개창한 선찰禪刹을 살펴보면 현재까지 모두 불전이 건립되어 있다. 당시 선찰이 생기는 과정은 새롭게 사찰을 짓는 경우보다는 기존 사찰이 선을 수용하는 사례가 더 많았기 때문에 불전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지방 호족세력의 후원 때문에라도 그들을 위한 축리祝釐 또한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굴산개조 범일의 위상
사굴산闍崛山이란 기사굴산耆闍崛山을 줄여서 말하는 것으로 더 줄여 ‘굴산崛山’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굴산은 영축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범일스님은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개산조開山祖이다. 범일스님은 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인데, 구산선문의 개산조 중에 후세까지 신으로 추앙을 받는 사례는 사굴산문의 범일스님뿐이다.
신라 왕실은 중국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한 범일스님을 국사로 초빙하겠다는 제의도 했지만 스님께서는 단호히 거절하고 강릉에 머물렀으며, 이때 강릉 정착을 후원한 사람은 명주溟州[現 강릉 일대] 도독 김공金公이다. 이 김공이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도독인 것으로 보아 그 지역의 최고 권력자인 것은 알 수 있다. 이후 범일스님은 굴산사를 기반으로 경북 일부와 영서 지방까지 영향력이 미쳤으며, 성주산문과 동리산문과도 교류를 하였다. 제자도 개청開淸(834-930)과 행적行寂(832-916)을 포함하여 많이 길러내게 된다.
모습을 드러낸 굴산사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한 유적지 피해를 수습하는 차원에서 시작한 발굴조사는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2016년까지 이어져 굴산사지 전역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사진 2>처럼 크게 1부터 6영역까지 발굴되었으며, 문화층 기준으로 굴산사의 운영 시기를 나누면 크게 5단계로 구분된다. 이 중 <사진 3>처럼 1단계는 창건기(9-10세기)로 구분할 수 있고, 2-4단계는 전성기(11-13세기)로 구분할 수 있으며, 5단계는 퇴조기(14-16세기)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을 바탕으로 굴산사의 사역을 시기별로 관찰해 보면, <사진 3>에서와 같이 창건기의 영역은 현재 승탑과 탑비가 있는 3영역과 그 밖의 극히 일부 정도가 포함되고, 전성기에는 사역이 현재 굴산사지 전체로 확장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성기는 범일스님의 입적 이후로도 2~300년 정도 지난 다음인 것을 보면, 굴산문은 오히려 범일스님 당시보다 고려 중기에 더 왕성하게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중심 사역이라 할 수 있는 1영역은 12세기를 중심으로 하는 시기에 구성되었는데, 이 시기가 굴산사의 사세가 가장 컸던 시기이다. 이후 13세기에 전체적으로 굴산사의 영역이 크게 위축되면서 퇴조기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굴산사가 들어선 지형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유구가 확인된 곳을 보면, 중앙부 1영역이 가장 정연한 배치와 높은 건물의 밀집도, 월등한 건물지의 규모 등으로 굴산사의 중심 사역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다른 사찰의 경우도 선사先師의 승탑이 위치하는 곳이 사찰의 안쪽이기 때문에 범일국사의 탑이 있는 곳도 굴산사의 안쪽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 4>처럼 확대된 1영역을 자세히 보면, 남북측에 큰 규모의 건물이 있고 동서측에 회랑의 성격이라 할 수 있는 건물이 있는데, 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북측 건물(6×4)이다. 이 건물은 출입동선 상 위쪽에 위치해 아래쪽의 건물보다 중요한 곳에 있으며, 평면상으로도 측면이 4칸이라 1영역은 물론 굴산사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이와 대칭되는 남측에 위치한 건물의 경우는 5×2규모(빨강)의 건물로, 기단도 높은 편이고 초석도 크고 잘 다듬었지만 위치와 규모에 있어서 북측의 6×4규모(노랑)의 건물에 비해 중요도가 높다고 할 수는 없다.
<사진 5>에서 북측 건물의 경우 평면상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이 발견되는데, 서측 3칸은 고래를 사용한 바닥 난방을 했지만, 동측 3칸은 서측과는 달리 바닥 난방의 흔적이 없다. 이렇게 같은 평면에서 좌우로 칸을 구분하여 사용하면서 한쪽에만 난방을 한 흔적이 보인 사례와 비슷한 건물은 현재까지는 일부 백제의 강당에서만 확인된다. 바로 익산 미륵사의 강당과 부여 능사의 강당이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런 형태의 강당을 ‘동서양실형’이라고 하는데, 1504년 일본의 사천왕사에 소장되어 있는 「사천왕사어수인연기四天王寺御手印緣起」를 보면 ‘강법당講法堂’이 8칸으로, 4칸은 하당夏堂(東), 4칸은 동당冬堂(西)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현재 사천왕사의 강당은 동당과 하당의 구분은 있지만 실室은 하나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절반씩 하당과 동당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겨울철에 사용하는 실과 여름철에 사용하는 실로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비교해 볼 때 굴산사지의 중심 사역이라고 볼 수 있는 1영역의 중심 건물이 사천왕사의 강법당처럼 계절에 따라 실室을 구분해 사용하던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禪의 정신이 살아 있는 굴산사
범일스님은 지금도 강원도 영동지역의 수호신으로 향사享祀되는 인물로 선종도입기 다른 지역의 선사禪師들과는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선사들이 중국을 다녀와 선풍을 떨치며 법맥을 이었지만 범일스님은 그중에서도 특출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 5. 1구역 북측 건물지와 일본의 좌선당 참선 모습.
당唐에서는 선수행자들이 기존 사원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불전을 세우지 않고 오직 법당만을 세워 자신의 스승을 부처로 삼고 법을 이었다고 하지만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불전 없는 선종사원은 없다.
아마도 불교계를 둘러싼 현실이 후원자 없이 사찰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후원을 거부할 수 없었으며, 더불어 후원자를 위한 축리祝釐가 불가피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다 해도 선의 정신이 살아 있는 사찰이 그렇게 많은 선찰 중에 단 하나도 없다는 것에 씁쓸한 서운함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지금의 한국불교가 선을 중심으로 하는 교단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최근 완료된 굴산문의 발굴조사를 통해 굴산사에는 사역 어디를 찾아봐도 불전으로 볼 수 있는 유구를 확인할 수 없으며,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지가 ‘동서양실형’으로 분류되는 강법당講法堂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굴산사가 초기 선불교의 정신을 잇는 고려 중기의 사찰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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