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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일평생 동양의 사상, 정신적 전통을 탐구한 인도철학 연구의 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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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1 년 10 월 [통권 제102호]  /     /  작성일21-10-05 12:01  /   조회4,60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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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10 /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1912-1999

  

1999년 10월 11일, 일본의 거의 모든 신문은 일제히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1912-1999)의 부고를 알렸다. 특히 주요 일간지들은 정치면에 해당하는 1면 중앙에 이 인문학자의 초상을 싣고 그의 업적을 상세히 보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동경대 마에다 센가쿠의 추모의 변을 실었다. “장대한 체계를 구축하고, 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의 대천재였다고 생각한다. 고도의 저작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을 향한 평이平易한 책도 저술했다. 겸허한 인품으로 대학자의 편린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이었다.” 인문학자를 대하는 일본의 품격도 품격이지만, 도대체 나카무라가 얼마나 위대했으면 유명 배우의 사후처럼 그를 거국적으로 애도한 것일까. 

 

나카무라가 평생 쌓아온 학문적 성과는 32권의 저술과 8권의 별권, 3권의 사전류, 수많은 번역서, 그 외에 여러 영상물로 지금도 유통되고 있다. 방대한 저술의 사상적 의미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특정 종파의 출가자나 신도도 아니며, 어느 학파에 속하지도 않은 사유의 자유를 학문을 통해 마음껏 발휘했다.

 

 사진1. 강단의 나마쿠라 하지메, 동방연구소 제공

 

나카무라는 어릴 때부터 세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태어난 다음 해에 부모의 직업 때문에 시마네현 마츠에시에서 동경으로 이사한 뒤 줄곧 수도에서 공부했다.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위장병으로 일 년 동안 집에서 요양했다. 아픈 몸으로 쇼펜하우어, 에머슨, 신란, 도겐 등 뛰어난 사상가, 종교가들의 서적을 읽었다. 그중에서도 석존의 행적이 자신의 마음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동경제국대학의 인도철학범문학과에 입학하여 우이 하쿠주宇井伯寿(1882-1963)의 지도를 받았다. 학문의 기본을 위해 어학을 철저히 배우도록 했다.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베트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우이는 나카무라에게 불교의 원류인 인도사상을 배울 것을 주문했다. 대학원에서는 베단타 철학을 연구했다. 

 

박사 논문은 「초기 베단타철학사」였다. 원고용지 6천 매에 이르렀다. 리어카에 싣고 가져갔다. 지도교수 우이는 “읽는 것만도 큰일이다.”라며 비명을 질렀다. 30세에 학위를 받고 다음 해인 1943년에 조교수로 취임했다. 박사 논문은 『초기의 베단타철학』, 『브라흐마 수트라의 철학』, 『베단타철학의 발전』, 『말의 형이상학』의 4권으로 출판되었다. 후에 『상카라철학』을 더해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인도철학사를 구성했다. 이후 원숙한 시기에 쓴 『인도사상사』는 인도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하나의 텍스트가 되었다. 엄청난 양의 자료가 동원되어 대해장강처럼 엮어져 있다. 내용은 우파니샤드의 철학사상, 초기불교의 가르침, 바가바드기타의 주제, 육파철학과 대승불교철학, 현대의 인도사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2. 나카무라 하지메, 동방연구소 제공 

 

 

무엇보다도 그의 불멸의 업적은 『불교어대사전』이다. 여기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년 동안 원고용지 3만 매에 수록한 내용을 출판사가 부주의로 분실했다. 사과 상자에 넣어둔 것을 직원의 실수로 버린 것이다. 한 달 정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에게 부인이 “멍하니 있어 봐야 어쩔 도리가 있나요. 다시 시작하면 어떻겠어요.”라고 말했다. 또한 독지가가 다시 비용을 대겠다고 했다. 다시 일어선 나카무라는 다음 해인 1968년 사전 작업을 시작했다. 8년 후인 1975년 드디어 사전이 간행되었다. 어휘는 4만 5천으로 이전의 두 배였다. 나카무라는 이전 내용보다 더 좋게 되었다고 했다. 이후 개정을 했지만 끝내지 못하고, 사후에 제자들에 의해 2001년 『광설불교어대사전』으로 완성을 보았다. 도구서적인 사전 편찬은 인간 정열의 무한성을 보게 된다. 나카무라 또한 그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그가 편집위원으로 참가한 『이와나미 불교사전』은 필자도 늘 책상 위에 놓고 보는 필수사전이다. 

 

나카무라는 원시불교와 대승불교에 대한 연구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원시불교의 성립, 사상, 생활윤리, 사회사상, 대승불교로의 발전 과정, 대승불교의 사상, 공의 윤리, 불교미술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스승 우이의 연구를 더욱 깊고 넓게 확장했다. 나카무라는 인도불교가 베단타 철학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점은 인도철학 연구자들 간에 시각의 차이가 있다. 범아일여를 기반으로 하는 힌두체계와 이를 철저히 부정하고 단절시킨 무상 및 무아에 기반한 불교가 대립되는 구조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비판자들은 나카무라가 인간의 윤리적 행위의 의지처로써 아트만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에 있어 불성의 실체론적 구조를 인정하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첨예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3. 나카무라 하지메 전집

 

 

아무튼 인도 및 불교사상을 통해 동양의 사유체계 연구에까지 연동시켰다. 인도인, 중국인, 일본인, 티베트인, 나아가 한국인의 사유방법을 저술했다. 불교가 동양에 전파되면서 어떤 형태로 종교화되었는가를 통해 민족의 다양성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비교사상을 통해 전 세계의 사상을 소통시키고자 했다. 그는 『비교사상론』에서 유럽, 아시아, 미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그 전개를 검토하고, 동서양 사상을 개관하며, 사상사로서 비교사상사 구성, 보통의 사상사, 세계사상사로의 발전단계를 논한다. 세계사상사 시리즈로 내놓은 고대사상, 보통사상, 중세사상, 근대사상이 바로 그 성과다.

 

동양의 사상은 결코 서양에 열등하지 않다. 동서양의 사상이 서로 협조하고 이해하여 보다 높은 의식을 형성해야 한다. 서양은 지배를 위해 동양문화를 알려고 했던 행위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제는 하나의 세계를 향해 관용의 정신으로 다른 문화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그는 비교사상은 휴머니즘에 입각, 평화를 희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한다. 그의 학문적 여정의 목표가 불타의 정신에 기반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는 “세계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이해와 관용이 절대 필요하다.”라고 한다. 불교야말로 이 세계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를 위해 불교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라도 접근 가능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아함경』, 『법구경』, 『숫타니파타』, 니카야를 비롯하여 반야경전, 정토경전, 밀교경전 등의 대승경전들을 쉬운 말로 번역했다. 사전류 또한 마찬가지로 이해하기 쉽도록 편찬했다. 예를 들면, 산스크리트어의 니르바나(Nirvāṇa)를 ‘번뇌의 불이 불어서 꺼진 상태의 평온함,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라고 풀었다. 번뇌로 요란한 마음이 평정되어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한다고 본다. 그는 1947년판 『불교어 방역邦譯 사전』의 머리말에서 “불교의 사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쉬운 방역(나랏말)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후의 불교도에게는 가장 필요한 일이다. 가령 불교를 신봉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처럼 불교를 재현하되 시대에 맞게 현재화하고자 하는 노력은 석존의 가르침을 구현하고자 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한 석존의 진실을 찾기 위해 먼저 신화의 저변에 깔린 그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원시불교를 철저히 규명하고자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고타마 붓다』에서 “석존의 생애를 기술한 책으로는 옛날부터 불전佛傳이 다수 전래되고 있지만, 그것들은 석존을 너무 찬양하는 바람에 여러 신화, 전설에 둘러싸여 있어 마치 요괴담을 읽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떠한 신화, 전설의 바탕에도 그것이 의거하는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라고 한다. 막상 우리 불교도들이 생각했던 석존의 모습이 파괴되거나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소설이 아니다. 우리들은 역사적 진실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충분한 비판 검토를 거쳐 나타난 고타마 붓다의 모습은 우리들을 향해 직접적으로 반드시 무언가 깊은 의의意義를 가르쳐 줄 것이다.”라며 강한 믿음을 보여준다. 불멸佛滅에 대한 연구도 불타의 본 모습을 찾기 위한 것이다. 아쇼카왕의 즉위년을 검토하여 기원전 383년으로 본 연구 성과는 현재까지도 주류가 되어 있다. 

그는 불타의 자애야말로 동양사상의 핵심임을 확신했다. 『따뜻한 마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진4. 나마쿠라 하지메의 『불교입문』

 

 

“나는 오랫동안 동양의 사상, 정신적 전통의 탐구를 해왔습니다. 이를 관통하는 ‘동양의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 밑바탕에 흐르는 것을 규명하고자 평생 연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언가’라는 것은 단지 동양만이 아니라 골고루, 넓게, 세계 사람들에게 퍼져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무언가야말로 ‘따뜻한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가 학문을 통해 도착한 곳은 세계보편성을 지닌 석존의 자비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가 1973년에 동방학원을 세운 것도 이러한 뜻의 일부였다. 대학 은퇴 후에는 사립대학에 재취업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사재를 털어 불교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물론 자리가 없는 연구자들이 마음껏 연구 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는 “철학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수단을 생각해 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철학박사가 마구 불어나서 갈 곳이 없지만, 돈이 없을 때에는 택시 운전수 등을 해서 돈이 모이면 일을 그만두고 시를 짓거나 칸트 등을 읽거나 합니다.”라며,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미국인들의 삶을 예로 든다. 그리고 “학문은 일생의 일이지만 순수한 형태로 나아가면 경제적으로는 수지가 맞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누구로부터도 강제되지 않고 자신이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나가는 곳에서 학문의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곳까지 도달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사진5. 나카무라 하지메 기념관, 시네마현 마츠에시  

 

 

그는 동방학원을 데라고야(寺子屋, 사원에 부속된 서당)라고 불렀다. 전문화된 대학의 폐쇄성을 비판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지침과 인도가 될 수 있는 학문이기를 바랐다. 삶의 의미를 찾아 나아가는 학문인 것이다. 실제로 나카무라는 그러한 삶을 살았다. 학문의 자유를 만끽한 그는 자신을 무한대로 확장했다. 인문학의 무한한 가능성은 물론 불교의 정신이 세계 보편정신의 지평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러한 성취를 대중들에게 회향한 그의 삶이야말로 석존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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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무, 법명 익선. 일본 교토 불교대학 석사, 문학박사. 한국불교학회 전부회장, 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 원광대학교 일본어교육과 조교수. 저서로 『아시아불교 전통의 계승과 전환』(공저), 『佛教大学国際学術研究叢書: 仏教と社会』(공저)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일본불교의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그 교훈」 등이 있다. 현재 일본불교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wonyos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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