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선禪의 철학화는 功 군국주의 옹호는 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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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1 년 9 월 [통권 제101호] / / 작성일21-09-06 11:41 / 조회4,887회 / 댓글0건본문
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9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 1870-1945
철학이란 인간과 우주의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된 필라서피philosophy라는 말을 철학哲學으로 번역한 것은 근대 일본이다. 그리고 비로소 일본 최초의 철학서라고 평가하는 『선善의 연구』를 낸 사람이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1870-1945, 사진 1-1·1-2)다. 그렇다고 동양에는 철학이라는 것이 없었던가. 넓은 의미에서 동양의 현성賢聖들은 다 철학자에 속한다. 서양의 이성적 사유체계라는 국한된 세계만이 아니라, 이를 초월한 각覺의 세계까지 확보함으로써 서양적 의미의 철학을 넘어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파악했기에 니시다의 철학세계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지 모른다.
일본열도에서 동해안쪽으로 혹처럼 나와 있는 이시카와현 출신인 니시다는 어릴 때 누나, 형, 동생들의 죽음을 통해 무상한 삶을 보았다. 그 위에 부호였던 부친의 사업실패로 인한 파산, 첫 결혼한 부인과의 절연으로 인생의 고통을 맛보았다. 그가 철학을 하게 된 것은 이러한 실존적 삶의 극한을 경험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철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이시카와현 전문학교에서 수학할 때였다. 눈이 상할 정도로 동서고금의 서적을 읽고 여러 외국어를 습득했다. 1891년에 동경제국대학 철학과에 들어갔다. 그때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에 있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수행하던 동향의 스즈키 다이세츠를 찾아갔다. 주지인 이마기카 코센으로부터 공안을 받았다.
1894년 24세에 흄에 대한 논문을 쓰고 졸업했다.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교사가 되었다. 여러 사찰에서 선사들을 만나다가 1897년부터 교토의 묘심사妙心寺에서 본격적인 참선에 돌입했다. 1901년에는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 있는 세심암洗心庵의 세츠몬 겐쇼雪門玄松 선사로부터 슨신寸心이라는 거사호를 받았다. 이후 평생 수행 체험을 기반으로 한 선의 철학화를 구축했다. 1910년 40세에 교토제국대학 철학과의 조교수가 되었다. 이후 58세 정년퇴직 때까지 심리학, 철학 및 철학사 등을 강의했다. 이후에도 여러 대학에서 왕성한 강의와 집필을 이어나갔다.
그의 저술은 전 24권과 별권으로 출판되어 있다. 주요 저서로는 41세 때 출판한 『선의 연구』(사진 2-1·2-2), 『자각에 관한 직관과 반성』, 『의식의 문제』, 『예술과 도덕』 등과 60세가 넘어 펴낸 『일반인의 자각적 체계』, 『무無의 자각적 한정』, 『철학의 근본문제』, 『일본문화의 문제』 등이 있다. 세상을 떠난 75세 때 「장소적 논리와 종교적 세계관」을 마지막으로 탈고했다. 논문, 강연, 일기 등이 그의 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평생 스즈키 다이세츠와 교류했으며, 선불교 및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의 융합을 꾀한 교토학파를 이끌었다(사진 3).
니시다는 대학을 은퇴하면서 “나의 생애는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그 전반은 칠판을 앞에 두고 앉았다. 그 후반은 칠판을 뒤로 하고 섰다. 칠판을 향해 일회전을 했다고 한다면 그것으로 나의 전기傳記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 말은 칠판이라는 절대성을 추구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칠판의 대해大海에 자신의 사유를 맘껏 기록하며, 하나이면서 둘인 동시에 둘이면서 하나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사진 1-2. 만년의 니시다 기타로, 이시카와현 니시다 기타로 기념철학관 제공
니시다 철학은 먼저 『선의 연구』로부터 출발한다. 처음 제목 구상은 ‘순수경험과 실재’였으나 출판사의 반대로 제목을 바꿨다. 주객일치를 통한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순수경험을 통해 도덕, 종교, 지식의 기초를 놓는 것이 핵심이다. 순수경험, 실재, 선善, 종교의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순수경험은 주관과 객관, 즉 나와 대상과의 미분화를 의미한다. 나와 사물이 분별되기 전인 부모미생전의 세계를 말한다.
그는 “호리毫釐도 사려 분별을 더하지 않는, 참으로 경험 기반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색을 보거나 소리를 듣는 순간, 이때까지 그것이 외부 사물의 작용이라든가 내가 그것을 느끼고 있다든가 라는 사고가 없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 색, 이 소리는 무엇이다’는 판단조차 더해지지 않는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순수경험은 직접경험과 동일하다. 자신의 의식 상태를 직하直下에 경험할 때, 아직 주도 없고 객도 없는 지식과 그 대상이 완전히 합일하고 있다. 그 상태가 경험이 가장 순수한 것이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상태를 등산가가 한 눈 팔지 않고 절벽을 올라갈 때, 음악가가 숙달한 곡을 연주할 때를 든다. 실제 일상 속에서 누구든 경험하는 것이다. 니시다는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순수의식을 통일하는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진 2-1. 서석연 옮김, 『선의 연구』(한국어판), 서울: 범우사, 1990.
원래 현상은 내외의 구별이 없다.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실재계는 동일한 현상을 다른 방면에서 본 것이며, 오직 하나의 사실이 있을 뿐이다. 불교의 근본 사상과 같이 자신과 우주는 동일한 근본이다. 아니 일물一物일 뿐이다. 니시다는 이에 “우리는 자신의 내심에 지식으로는 무한의 진리로, 감정으로는 무한의 미美로, 의지로는 무한의 선善으로 실재 무한의 의의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결국 “우리 안의 자신을 단련하여 진체眞體에 달하는 것과 함께 밖으로 인류 일미一味의 사랑을 발휘하여 최상의 선의 목적에 합하는 것, 그것이 완전한 선행”이라고 한다. 결국 대승불교의 정신에 도달하고 있다. 결국 종교는 유한한 존재를 자각하여 무한에 합일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마음을 열어 불생불멸의 세계로 진입하는 무아無我와 대아大我의 확립에 다름이 아니다.
그가 만년에 도달한 곳은 ‘절대모순적 자기동일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최후의 논문에서 “절대 모순적 자기 동일로서 참으로 자신에 의해 존재하며 자신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는 어디까지나 자기 부정적이다. 자기 표현적이다. 동시 존재적이다. 공간적이면서도 부정의 부정으로 자기 긍정적이다. 한정되는 것으로부터 한정하는 것이다.”고 했다. 즉, 자신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에 의해 참 자기라는 장소의 논리가 나온다. 이는 스즈키가 『금강경』의 논리를 설명할 때, “A는 A가 아니며, 그것에 의해 참으로 A이다.”라는 논리를 차용한 것이다. 니시다는 일본 중세 임제종의 슈호 묘초宗峰妙超 선사가 “억겁을 떨어져 있어도 우리들은 한 순간도 헤어져 본 적도 없고, 하루 종일 마주보고 있어도 우리들은 한 순간도 마주한 적이 없다.”는 법설을 제시한다.
사진 2-2. 하천何. 역譯, 『선의연구善的硏究』(중국어판), 북경: 商務印書館, 1965.
여기에서 역대응逆對應이라는 말이 나온다. 즉, “절대의 자기 부정을 포함해서 절대무絶對無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한정하는 절대자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모순적 자기 동일적으로 자기 안에 자기를 표현한다. 곧 자기에게 있어서 자기에 대립하는 것을 포함하는 절대 현재의 세계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를 『금강경』의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主而生其心]”는 구절을 활용한다. 참으로 절대적인 것은 상대적인 것을 끊는 것이 아니므로 절대자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모순적 자기 동일적으로 다多와 일一의 역한정적으로 일체의 것이 역대응의 세계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말하자면 역대응은 개인의 활동에 대해 신이나 부처의 활동이 역으로 대응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일본 최대 종파인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조사 신란親鸞이 말법시대 죄악심중罪惡深重 번뇌치성한 중생의 악인정기惡人正機(‘악인이라는 자각을 먼저 한 사람이야말로 아미타불의 서원에 의한 구제의 대상이다’는 뜻)가 구현되는 것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나아가 평상저平常底는 견성의 경지에서 보듯 절대적 자각에 가까이 한 것으로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근원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선불교가 기반이 된 니시다의 철학은 근대 일본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동시에 서양에 대한 동양의 대응이라고 하는 의의도 있다. 불교학자 스에키 후미히코는 “니시다의 초기 순수경험이론이 개체와 개체를 초월한 존재의 애매화에 의해 자기의식의 비대화의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에 비해 후기 니시다에서는 개체와 개체를 초월한 존재(즉, 場)로 양자兩者 존재의 모순 관계를 논리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근대 일본과 불교』, 이태승·권서용 옮김)고 했다. 칸트의 실천이성과 헤겔의 절대성을 극복하기 위해 개체를 초월한 모순된 성격을 무無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이러한 투철한 논리성을 전개한 니시다가 최종적으로 그 성립의 근저에 종교적이라는 것이 곧 국가적이라고 제시한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이는 절대자유를 제시한 헤겔이 그것의 기반은 국가라는 점을 내세운 것과 상통한다. 이는 근대적 사유체계의 한계라고 보아야 한다.
사진 3. 니시다 기타로 기념 우표.
니시다는 『세계 신질서의 원리』에서 “우리 국체國體는 단적으로 소위 전체주의는 아니다. 황실은 과거 미래를 포함하는 절대 현재로서 황실이 우리들 세계의 시작이며 끝이다. 황실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세계적 질서를 형성해온 것은 만세일계의 우리 국체의 정화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황실은 단적으로 하나의 민족적 국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황도에는 팔굉일우의 세계 형성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당시 군국주의와 파시즘을 옹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국가의 근저에는 국가성립의 신화가 있으며, 초월적 존재, 내재 즉 초월적으로, 절대 현재의 자기 한정으로서 역사적 생성적인 일본의 역사에 있어 처음부터 국가 즉 도덕의 국체라는 것이 자각되었다고 한다. 결국 천황은 물론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인 국체가 순수절대의 세계라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천황은 신성불가침인 것이다.
최근 여러 연구에서 스즈키나 니시다는 일본의 대외전쟁에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민중을 고통으로 내몬 국가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것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지식인이 책무는 당대의 파사현정이 우선이다. 더욱이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져 구원의 손길이 필요할 때, 학자든 종교가든 사회의 파수꾼들은 그 원인을 제거하여 만인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원효元曉는 화쟁을 말하기에 앞서 이 파사현정을 제시했다. 선불교인들의 맹점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선악을 구분하는 정견이 수반되지 않고, 이를 관념의 피안으로 이월移越시켜 자신만이 아니라 대중들로 하여금 오도된 이념의 맹목성을 갖게 하는 것 또한 죄악이 된다.
권력의 절대화에 의해 민중이 희생되는 역사는 단절되어야 한다. 도겐道元이 수행을 계율과 함께 도모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니 모든 선의 조사들은 계율을 수행의 가장 근본에 놓았다. 비록 선의 철학화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생명력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철학은 종교를 담을 수 있는가’라는 화두가 발생될 수밖에 없다. 종교와 철학의 만남, 양자의 회합이 궁극적으로 민중의 총체적 삶을 온전히 관통할 수 있을 때, 참된 조화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니시다 철학은 반면교사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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