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 이야기]
무억 무념 무망無妄 삼구어三句語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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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1 년 8 월 [통권 제100호] / / 작성일21-08-04 15:59 / 조회10,395회 / 댓글0건본문
중국선 이야기 8. 무상無相의 정중종淨衆宗
동산법문의 출현 이후 중국에서는 본격적으로 선사상이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신수의 북종, 혜능의 남종과 지선智詵 계열인 무상의 정중종이 동산법문을 사상적으로 계승한 대표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법계로부터 보자면 신수의 북종 다음에 홍인의 직제자인 혜능의 남종을 논해야 할 것이지만, 선사상적인 맥락을 논하기 위하여 먼저 무상의 정중종을 논하기로 하겠다. 그것은 신수의 북종과 무상의 정중종은 사상적으로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며, 또한 종밀宗密의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도 이들을 ‘식망수심종息妄修心宗’이라 하여 같은 계열의 선사상으로 분류하고 있다.(주1)
무상(680-756, 혹은 684-762)은 신라 출신으로 최치원崔致遠이 찬술한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에 이름이 거명되고, 또한 최인연崔仁.의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에는 낭공이 정중사淨衆寺를 참배하였다는 기록(주2)이 남아있다. 따라서 당대에 이미 신라에까지 무상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무상과 관련된 자료는 종밀宗密의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抄』 등에서 무상의 법맥을 언급하고 있다. 이보다 후대인 송대에 편찬된 『송고승전』과 명대에 편찬된 『신승전神僧傳』에 그 전기가 실려 있다. 특히 돈황본의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가 발굴되면서 보다 구체적인 법계와 행적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를 종합하여 무상선사의 생애와 그 사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역대법보기』에서는 “속성은 김으로, 신라왕의 족성族姓이다.”(주3)라고 하지만, 『송고승전』에서는 “본래 신라국의 사람이요, 그 국왕의 셋째 아들이다.”(주4)라고 ‘왕의 족성’에서 ‘셋째 왕자’로 기술한다. 더욱이 『송고승전』에서는 부왕이 죽고 무상의 동생이 즉위하자 무상이 귀국하여 왕위를 찬탈할까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냈다는 기사(주5)가 실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사실이라면 앞에서 언급한 낭공대사가 정중사를 참배한 일을 기록하면서 이를 누락시키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역대법보기』 등의 당대唐代에 형성된 자료에 이를 기록하였을 것이다.
『역대법보기』에는 막내 누이의 출가에 자극을 받아 무상이 출가하였다고 하지만(주6), 『송고승전』에는 그 기사가 없으며, 신라의 군남사群南寺에서 출가하였으며, 개원開元 16년(728)에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선정사禪定寺에서 현종玄宗을 알현하였고,(주7) 『신승전』에는 현종으로부터 ‘무상’의 법호를 받았다고 한다.(주8) 한편 『송고승전』에는 그 후에 촉蜀의 자중資中에서 지선智詵을 만났으며, 그때 처적處寂으로부터 ‘무상’의 법호를 받고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받은 마납의磨納衣를 물려받았다고 한다.(주9) 그렇지만 『역대법보기』에서는 스승을 찾아 각처로 돌아다니다 자주資州의 덕순사德純寺에 이르러 당화상(唐和上, 處寂)을 만났으며, 당화상에게 소지공양燒指供養하여 제자가 되었고, 후에 ‘가사신의袈裟信衣’를 부촉 받아 은거하였다고 한다.(주10)
『송고승전』에는 은거 후, 수행하기를 매번 입정入定하여 5일을 넘겼으며, 후에 성도成都로 들어와 참답게 두타행을 행하여 사람들이 점차 존중하여 정사精舍를 지어주었다고 한다.(주11) 당시 익주益州 장사長史 장구겸경章仇兼瓊이 찾아왔으며, 그로 인해 ‘안사安史의 난’을 피해 성도에 들어온 현종이 내전에 무상을 맞아들여 예배하였고,(주12) 또한 성도 현령 양익楊翌은 처음에는 무상을 의심하였으나 도리어 귀의하여 정중사 대자사 보리사 영국사 등을 건립하는데 도왔다고 한다.(주13) 『역대법보기』에서는 다만 “후에 장구대부가 선법을 열기를 청하여, 정천사(淨泉寺, 淨衆寺)에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하기를 20여년이 지났다.”(주14)라고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송고승전』과 『신승전』에서는 “지덕至德 원년(756) 5월[建午月] 19일 병환이 없이 시멸示滅하였는데, 춘추가 77세였다.”(주15)라고 한다. 그러나 『역대법보기』에서는 무상은 보응寶應 원년(762) 5월 5일 갑자기 무주無住를 떠올리고, 그를 불렀으나 오지 않자 비밀리에 공인工人 훈선薰璿에게 신의信衣와 17종의 다른 옷을 보내며 부촉하였다고 하며, 무상의 입적을 79세의 일로 설한다.(주16)
이렇게 여러 자료에 있어서 차이가 보이고 있으며, 또한 달마의 가사전법의 기사들은 당시 선종의 정통성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이 문제는 깊게 논하지 않겠지만, 여러 자료를 통하여 무상 선사가 성도成都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 당시 무주無住의 보당종保唐宗과 후대의 선종에서 자파에 유리하게 편집하였다고 추정된다. 그에 따라 무상 선사의 법계도 조금의 차이가 나지만, 종밀의 『원각경대소석의초』 권3하에서는 정중종의 법계를 “근본은 원래 오조五祖 문하에서 나뉘어 나온 것으로 이름은 지선智詵이며, 바로 (홍인의) 십대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본래 자주資州 사람으로, 후에 본주 덕순사로 돌아와 교화하였다. 속성俗姓이 당唐인 제자 처적處寂이 계승하였다. 후에 당선사는 네 제자를 두었다. 성도부成都府 정중사 김화상金和尙은 법명이 무상으로, 그 가운데 하나이다.”(주17)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도신→홍인→지선→처적→무상”의 법계로 추정된다. 이러한 법계는 무상의 선사상을 고찰하면 더욱 명확해진다. 우선, 『역대법보기』에는 무상의 교화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김화상金和上은 매년 12월에서 정월에 이르도록 사부대중, 백 천만 인에게 수계授戒하였다. 엄숙하게 도량을 시설하여 고좌高座에서 설법하였다. 먼저 ‘소리를 끌어 염불[引聲念佛]’하게 하여 숨이 다하도록 하고, 생각이 끊어지고 소리가 멈추어 생각이 그칠 때 다음과 같이 설한다. “기억을 없게 하고[無憶], 생각을 없게 하고[無念], 망령되지 않게 하라[莫妄]. ‘무억’이 계戒이고, ‘무념’이 정定이며, ‘무망’이 혜(惠, 慧)이다. 이 삼구어三句語는 바로 총지문總持門이다.”(주18)
이로부터 무상은 12월에서 정월에 이르도록 수계법회를 했으며, 그 법회는 ‘인성염불引聲念佛’로부터 시작하여 ‘무억 무념 무망’의 ‘삼구어’가 중심이 되는 설법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무상의 수계의식에 대한 설명은 종밀의 『원각경대소석의초』에 조금 더 상세하게 실려 있다.(주19) 그에 따르면, 참여한 대중들에게 수계첩을 발급했으며, 정기적으로 행하지는
않았지만 자주 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수계의식은 바로 동산법문으로부터 전승된 것이라고 추정된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도신 선사는 『보살계법』을 찬술하여 수계의식을 행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또한 그의 법요인 ‘일행삼매’에 득입得入하는 방편으로 ‘염불’과 ‘좌선’을 제창했는데, 이는 무상이 ‘인성염불’로 법회를 시작하여 ‘수계’가 끝나고 ‘좌선’을 행했다는 점은 그대로 동산법문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하겠다. 더욱이 『원각경대소석의초』에는 홍인의 제자로 선습宣什 등을 ‘남산염불문선종南山念佛門禪宗’으로 분류하고, 김화상(무상)과 같은 의식을 행한다고 설명하고 있다.(주20) 현재 동산법문에서 수계의식을 행하였다는 구체적 자료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이러한 무상이나 선습 등의 자료로부터 역으로 동산법문의 의식을 유추할 수도 있다 하겠다.
무상의 선사상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억 무념 무망’의 ‘삼구어’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 삼구어를 ‘계·정·혜’에 배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무념’은 명확하게 ‘염불기念不起’와 연계시켜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또한 말한다. ‘염불기念不起는 마치 거울의 표면이 능히 만상을 비추는 것과 같으며, 염기念起는 거울의 뒷면이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한 말한다. ‘모름지기 기(起, 念起)와 멸(滅, 念滅)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에 간단間斷이 없으면 바로 부처를 보는 것이다.’ …… 또한 『기신론起信論』에서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이 있다.’고 하는데, ‘무념無念이 ‘진여문’이고 유념有念이 ‘생멸문’이다.”(주21)
이로부터 무상이 설한 ‘무념’은 ‘염불기’의 과정을 통하여 ‘무념’에 도달하는 경지이며, 또한 명확하게 『기신론』의 ‘일심이문’을 원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의 틀은 바로 앞에서 논한 신수의 북종선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까닭에 종밀은 신수의 북종선과 무상의 정중종, 선습의 남산염불선종 등을 모두 ‘식망수심종’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염불기’와 ‘무념’은 홍인의 『최상승론』을 비롯하여 신수의 『대승무생방편문』과 혜능의 『육조단경』, 그리고 하택 신회의 『신회어록』 등에서 모두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하여야 할 것은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여 동일한 사상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하택 신회나 『육조단경』에서는 『대승기신론』의 사유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는 점을 보자면 더욱 그렇다.
신라 출신인 무상 선사가 중국에 구법하여 종장宗匠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사실은 우리에게 친밀함을 더해 준다. 하지만 끊임없는 ‘향상일로向上一路’를 따라 전개되는 선사상의 발전으로부터 본다면, 정중종의 선사상에 한계를 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후대에 그를 초월[向上]하는 선사상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러한 점이 바로 무상 선사의 정중종이 지니는 중요한 의의라고 하겠다.
주)
주1) [唐]宗密述, 『禪源諸詮集都序』卷上之二(『大正藏』48, 402b), “息妄修心宗, …… 또한 모름지기 禪境에 趣入하는 方便을 밝게 해석한다면, 시끄러운 곳을 멀리 떠나 고요한 곳에 머물러 몸을 고르고 호흡을 고르며 말없이 跏趺坐를 하고, 혀는 입천장에 괴이고, 마음은 한 경계에 集注한다. 이러한 것은 南宗의 智詵, 北宗의 神秀, 保唐, 宣什 등의 門下가 모두 이와 같은 部類이다.[息妄修心宗, …… 又須明解趣入禪境方便, 遠離憒鬧住閑靜處, 調身調息跏趺宴黙. 舌拄上齶心注一境, 南侁北秀保唐宣什等門下, 皆此類也.]”
주2) 이능화 편, 『역주조선불교통사』 상권1(동국대출판부, 2010.), p.489. “乾符 2년(871), 成都에 이르러 여러 곳을 순례하다가 靜衆精舍에 이르러 無相大師의 영당에 예경하였다. 대사는 신라 사람이다. 영정에 참배한 후 후세에 남긴 아름다운 일화들을 모두 들어보니, 唐帝의 導師로서 玄宗의 스승이었다. 같은 나라 사람이면서도 그 시대가 달라, 후대에 법을 구하러 와서 그 자취를 찾게 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주3) 『歷代法寶記』(大正藏51, 184c), “俗姓金, 新羅王之族.”
주4) [宋]贊寧撰, 『宋高僧傳』(大正藏50, 832b), “本新羅國人也. 是彼土王第三子.”
주5) 앞의 책. “相之弟本國新為王矣. 懼其却迴其位危殆, 將遣刺客來屠之. 相已冥知矣. 忽日供柴賢者暫來謂之曰: 今夜有客曰灼然. 又曰: 莫傷佛子. 至夜薪者持刀挾席, 坐禪座之側. 逡巡覺壁上似有物下, 遂躍起以刀一揮, 巨胡身首分於地矣. 後門素有巨坈, 乃曳去瘞之. 復以土拌滅其跡而去. 質明相令召伐柴者謝之, 已不見矣.”
주6) 『歷代法寶記』(大正藏51, 184c), “昔在本國, 有季妹, 初下聞禮娉授刀割面誓言志歸真. 和上見而歎曰: 女子柔弱, 猶聞雅操. 丈夫剛強, 我豈無心. 遂削髮辭親.”
주7) [宋]贊寧 撰, 『宋高僧傳』卷19(大正藏50, 832b), “於群南寺落髮登戒. 以開元十六年泛東溟至于中國到京. 玄宗召見隷於禪定寺.”
주8) 『神僧傳』(大正藏50, 999b), “玄宗召見隸於禪定寺號無相”
주9) [宋]贊寧撰, 『宋高僧傳』卷19(大正藏50, 832b), “後入蜀資中謁智詵禪師. 有處寂者, 異人也. 則天曾召入宮賜磨納九條衣. 事必懸知且無差跌, 相未至之前. 寂曰: 外來之賓明當見矣. 汝曹宜洒掃以待. 間一日果至. 寂公與號曰無相. 中夜授與摩納衣.”
주10) 『歷代法寶記』(大正藏51, 184c), “尋師訪道, 周遊涉歷, 乃到資州德純寺, 禮唐和上. 和上有疾, 遂不出見. 便然一指為燈, 供養唐和上. 唐和上知其非常人, 便留左右二年. 後居天谷山, 却至德純寺. 唐和上遣家人王鍠. 密付袈裟信衣. 此衣是達摩祖師傳衣, 則天賜與詵和上, 詵和上與吾, 吾今付囑汝. 金和上得付法及信衣, 遂居谷山石巖下.”
주11) [宋]贊寧撰, 『宋高僧傳』卷19(大正藏50, 832b), “每入定多是五日為度. …… 真行杜多之行也. 人漸見重, 為構精舍於亂墓前.”
주12) 앞의 책, “長史章仇兼瓊來禮謁之屬明皇違難入蜀, 迎相入內殿供禮之.”
주13) 앞의 책(大正藏50, 832c), “時成都縣令楊翌, 疑其妖惑, 乃帖追至, 命徒二十餘人曳之. 徒近相身一皆戰慄心神俱失, 頃之大風卒起沙石飛颺直入廳事, 飄簾卷幕. 楊翌叩頭拜伏踹而不敢語, 懺畢風止. 奉送舊所. 由是遂勸檀越造淨眾、大慈、菩提、寧國等寺. 外邑蘭若鐘塔不可悉數.”
주14) 『歷代法寶記』(大正藏51, 185a) “後章仇大夫請開禪法, 居淨泉寺, 化道眾生, 經二十餘年.”
주15) [宋]贊寧撰, 『宋高僧傳』(大正藏50, 832c), 『神僧傳』(大正藏50, 999b), “以至德元年建午月十九日無疾示滅. 春秋七十七.”
주16) 『歷代法寶記』(大正藏51, 185a), “後至寶應元年五月十五日, 忽憶白崖山無住禪師. …… 使工人薰璿將吾信衣及餘衣一十七事, 密送與無住禪師. …… 大師時年七十九.”
주17) [唐]宗密撰, 『圓覺經大疏釋義鈔』卷三之下(卍續藏9, 533c), “根元是五祖下分出, 名為智詵, 即十人中之一也. 本是資州人. 後却歸本州德純寺開化. 弟子處寂俗姓唐承. 後唐生四子. 成都府淨眾寺金和尚, 法名無相, 是其一也.”
주18) 『歷代法寶記』(大正藏51, 185a), “金和上每年十二月正月, 與四眾百千萬人受緣. 嚴設道場處, 高座說法. 先教引聲念佛盡一氣, 念絕聲停念訖云: 無憶、無念、莫妄. 無憶是戒, 無念是定, 莫妄是惠. 此三句語即是總持門.”
주19) [唐]宗密撰, 『圓覺經大疏釋義鈔』卷三之下(卍續藏9, 533c), “그 傳授의 儀式은 간략히 이와 같다. 이 나라에서 지금 官方의 戒壇에서 具足戒를 주는 것과 비슷하다. 설명하자면, 한두 달 전에 먼저 날짜를 정하여 공시하여 僧尼와 士女들을 소집하여 方等道場을 설치하여 禮懺하기를 21일 혹은 35일 동안 한 후에 수계의식이 끝난다. 모두 야간에 실행하였는데, 이는 외부와 인연을 끊고 시끄러움을 막기 위한 것이다. 수계의식이 끝나면 바로 잡념을 쉬게[息念] 하여 坐禪을 시켰다. 멀리서 온 사람이나 혹은 비구니와 속인들은 오래 머무르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모두에게 7일 혹은 14일 동안 좌선하도록 하였으며, 그러한 후에 인연을 따라서 헤어졌다. 또한 律宗과 같이 戒壇에 임하는 법은 반드시 대중이 거행되었으며, 관청에서 발급하는 文牒에 의거하여 명칭을 ‘開緣’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행사는 1년에 한번, 혹은 3년, 2년에 한번 정기적으로 개설하지는 않았지만 자주 열었다.[其傳授儀式, 略如此. 此國今時官壇, 受具足戒. 方便謂一兩月前, 先剋日牒示, 召集僧尼士女, 置方等道場禮懺, 或三七五七, 然後授法了. 皆是夜間, 意在絕外, 屏喧亂也. 授法了, 便令言下息念坐禪. 至於遠方來者, 或尼眾俗人之類, 久住不得. 亦直須一七二七坐禪, 然後隨緣分散. 亦如律宗, 臨壇之法, 必須眾舉, 由狀官司給文牒, 名曰開緣. 或一年一度, 或三年二年一度不等開數開.]”
주20) [唐]宗密撰, 『圓覺經大疏釋義鈔』卷三之下(卍續藏9, 534c) “傳香이라는 것은 처음 대중을 모으고 禮懺 등의 儀式은 金和上 門下와 같다.[言傳香者, 其初集眾禮懺等儀式, 如金和上門下.]”
주21) 『歷代法寶記』(大正藏51, 185a) “又云: 念不起猶如鏡面, 能照萬像. 念起猶如鏡背, 即不能照見. 又云: 須分明知起知滅, 此不間斷, 即是見佛. …… 又起信論云: 心真如門、心生滅門. 無念即是真如門, 有念即生滅門.”
상주 신상리 해바라기. 박명숙 불자 7월9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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