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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상왕이 몸 흔드니 마음이 눈을 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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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1 년 7 월 [통권 제99호]  /     /  작성일21-07-05 11:10  /   조회5,22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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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개심사 안양루. 

 

 

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9 | 서산 상왕산 개심사

 

 

"상왕이 몸 흔드니 

 마음이 눈을 뜨네"

 

 

 象王翻身山河動 

 開心門衆無異獸

 

 

해가 넘어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을 재촉하며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新作路에서 길을 꺾어 사하촌寺下村을 지나 절 입구까지 와서 차에서 내렸다. 양쪽 손에 끈으로 가득 묶은 책을 들고 작은 자갈들이 발에 밟히는 흙길을 따라 걸었다. 절은 보이지 않고 소나무들만 산 속으로 들어가는 길 양 옆으로 울창하게 늘어서 있었다.  

 

 

사진 1. 해강 김규진 서 현판.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 가운데 절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보이는 곳으로 다가가니 조그만 돌에 ‘세심동洗心洞’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참으로 감동적인 동네 이름이었다. 마음을 깨끗이 하는 동구, 세속의 진애를 깨끗이 떨어버리는 동네! 어떻게 동네 이름을 이렇게 멋있게 지었을까 하며 감탄을 연발하는 사이에 참으로 이 동네에 잘 왔구나 하며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순간 책 짐이 무거운 것도 잊었다. 

 

 개심사로 올라가는 돌계단은 자연 그대로의 산길에 경사가 높은 곳을 돌계단으로 쌓아 놓아 흙을 밟다가 돌을 밟다가 하면서 걸어 올라갔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해미海美에서 내려 다시 차를 타고 서산으로 오느라 지친 몸이었지만 저녁 무렵의 솔숲 돌계단 길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 도리어 산 공기만큼이나 상쾌했고, 이미 세심동에 들어서며 마음을 깨끗이 씻은 몸이니 아수라 같은 세속을 이제 완전히 떠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개울 물 소리를 들으며 나무가 울창한 산길을 한참이나 밟아 사역으로 들어가는 순간 엄청난 크기의 현판에 힘찬 글씨로 일필휘지한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라는 글자가 사람을 압도하는 힘으로 누각에 걸려 있었다(사진 1). 와∽∽ 개심사! 마음을 여는 절. 심안心眼이 열리는 절. 동네에서 마음을 씻고 산길을 올라오니 바로 마음이 열리는 곳에 들어 왔다. 정말 벌써 마음이 확 열린 것 같았다. 다시는 속세로 내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한 철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내가 난 생 처음 개심사를 찾아간 날이었다. 세심동의 그 개심사! 얼마나 품격 있고 아름다운 이름인가. 그 후에도 서너 차례 개심사를 찾았다.

 


사진 2. 세심동 개심사 표지석.    

 

  개심사는 충남 서산군 운산면 신창리에 있다. 서해안에 있는 태안반도에서 내륙으로 조금 들어오면 만나는 곳이 서산지역이다. 태안반도의 복잡한 해안선을 보면, 옛날에는 바닷물이 지금의 서산시까지도 들어왔던 것 같다. 이것이 점점 내려가 지금은 해안선이 조금 멀리 내려가고 땅이 더 넓어 졌다고 보인다. 서산에는 신라 말기 부성군富城郡 태수太守를 지냈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부성사富城祠가 있다. 고운 선생은 당나라에서 변란 속에서 생활을 하다가 황소黃巢의 난이 토벌된 해 다음 해인 885년 헌강왕(憲康王, 875-886) 11년 3월에 신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조정은 이미 귀족적 향락 분위기속에 빠져 있었고, 사회는 불안정한 상황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헌강왕 시절에는 당나라와 사신도 자주 오가고 일본도 사신을 보내오고 여진족의 보로국寶露國과 흑수말갈黑水靺鞨의 흑수국黑水國 사람들도 신라에 화친을 청해왔을 정도로 나라가 다소 번창하였다. 그렇지만 국가권력은 사유화되어 권력을 쥔 자들이 자기 이익을 채우는 수단으로 되어 버렸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지방에서는 조세도 보내오지 않아 국가재정은 점점 나빠져 궁핍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런 판에 왕 자리를 놓고 수시로 반역을 일으키고 서로 죽이는 싸움은 이미 오래 반복되었다. 

 


사진 3. 개심사 가는 돌계단.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은 최치원이 혹시라도 중요한 자리에 발탁되어 나라를 개혁하고 자기들이 권좌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견제하였다. 그리하여 최치원은 왕경에 있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지방관으로 나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라에 귀국한 후 그를 끌어주던 경문왕(景文王, 861-875)의 큰 아들인 헌강왕과 둘째 아들인 정강왕(定康王, 886-887)은 이미 죽었고, 정강왕의 누이동생 김만金曼, 즉 진성 여왕眞聖女王 아래에서 각간角干으로 있었던 경문왕의 동생이자 여왕의 숙부였던 김위홍(金魏弘, ?-888) 마저 세상을 떠났다. 

 


사진 4. 개심사.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오늘날 전북 태인泰仁인 대산군大山郡과 경남 함양咸陽인 천령군天嶺郡의 태수로 봉직하며 변방을 돌다가 893년에 37세의 나이로 이곳 서산 즉 부성군에 태수로 와서 신라의 백성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신라 조정에서 그를 당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보내려고 했으나 흉년으로 도적떼들이 들끓어 당나라로 갈 수 없는 지경이 있은 일도 이 때이다. 변방의 백성의 삶을 직접 체험하고 신라의 상황을 걱정하다가 드디어 894년에 국가개혁방략인 시무책時務策을 진성 여왕에게 올렸다. 이때는 이미 오늘날 강원도 원주인 북원北原에서 지역 거점을 넓혀가던 양길(梁吉, 良吉, ?-?)의 부하인 궁예(弓裔, 901-918)가 기병을 이끌고 10여 군현을 습격한 일이 있었고, 신라의 서남해안 방비를 맡고 있던 상주尙州 출신의 견훤(甄萱, 900-935)도 무진주(광주)에서 후백제後百濟를 세우고 주변을 복속하고 있었다. 

  

 진성 여왕은 이런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최치원을 아찬阿飡에 임명하고 나라를 개혁해보려 했지만 그의 말이 무너져가는 신라에 먹혀 들리는 만무했을 것이고, 궁예나 견훤이 반란군을 규합하여 변방을 복속해오고 온갖 도적떼들이 민가를 수시로 쳐들어오는 속수무책의 상태에서 왕도 힘이 없었다. 결국 진성 여왕은 897년 헌강왕의 서자인 효공왕(孝恭王, 897-912)에게 양위하고 난 후 북궁北宮, 즉 해인사로 들어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당시 신라라는 나라의 국가 운영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참혹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아무튼 조선시대 선조 때에 고운 선생의 높은 덕과 학문을 존경하던 이곳 지방의 유림들이 부성산성富城山城 내에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는 사우를 건립하고 도충사道忠祠라고 명명하였다. 1913년에 당시 서산 군수가 현재의 자리로 사당을 옮기고 부성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진 6. 개심사 해탈문. 

 

  이로부터 세월이 천년도 더 흘러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가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독립한 대한민국이 건국 된지 70여 년이 넘었어도 권력을 쥔 자들은 여전히 ‘한판 해먹자’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고, 심지어 죄와 벌에 대해 엄정한 판단을 해야 하는 법원과 검찰까지도 정권의 하수인들로 채워 정권과 권력을 쥔 자들의 부정과 비리를 감추는 선봉대로 나서게 만들고 말았다. 헌법의 파괴이고 법치주의의 말살이다. 이런 작태가 지금에도 백주대낮에 벌어지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언제까지 이 땅의 주인들은 이런 불의한 권력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있어야 하는가. 

 

헌법학에서는 이런 법언法諺이 있다. “어떤 나라든 그 나라 국민 수준만큼의 헌법을 가진다.” 또 국민이 피를 흘리고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진정 우리가 원하는 헌법국가를 가질 수 있는 것인가. 부성산성 위에 올라가 지금은 바닷물이 저 멀리 물러난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이런 세속의 숙제로 머리가 아파온다. 부성사 옆에는 근래 세운 ‘문창후고운최선생유허비文昌候孤雲崔先生遺墟碑’가 서있다. 세월이 오래되어도 훌륭한 사람의 이름은 세상이 오래 기억하고 칭송하는 법이다. 이를 두고 ‘불후不朽’라고 하지 않는가.  

 


사진 7. 대웅보전, 금당탑, 심검당, 무량수각. 

 

  개심사는 654년 백제 의자왕(義慈王, 641-660) 14년에 혜감慧鑑 국사가 창건하여 개원사開元寺라고 이름을 짓고, 1350년 고려 충정왕(忠定王, 1349-1351) 2년에 처능處能 화상이 중창하면서 개심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창건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1475년 조선 성종(成宗, 1469- 1494) 6년에 중창하고, 그 뒤 1740년 영조(英祖, 1694-1776) 16년에 중수를 거쳐 1955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진 8. 대웅보전 불상. 

 

  사역 바깥에 새로 조성된 주차장에서 절 쪽으로 걸어가면 최근에 세운 일주문이 멋있는 모습으로 서있다. 일주문에는 구당丘堂 여원구(呂元九, 1932- ) 선생이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을 지나 울창한 숲속으로 걸어가면 이제 본격적으로 절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시작된다. 시작자리에 ‘세심동’과 ‘개심사 입구’를 새겨 놓은 작은 돌이 땅에 박혀 있다(사진 2). 여기서부터 100개 정도 되는 돌계단이 오르막길로 놓여 있는데 옛날에는 자연 그대로 흙길과 돌계단이 자연스레 간헐적으로 이어져있어 자연 그대로의 길이 주는 운치가 있었지만, 지금은 걷기 편하게 모두 말끔히 단장한 돌계단으로 되어 있다(사진 3). 사람의 손이 미치면 마치 성형 외과의사가 디자인한 같은 형태의 얼굴이 되듯이 이렇게 되어 버린다. 그래도 다리품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거니 생각하고 염주 세듯이 하나씩 세며 올라가다보면 연못과 함께 널찍한 주차장이 나타난다. 

 

 

 

사진9. 김성근 주련

 

 

  지금의 주차장은 그전에는 채소를 키우는 채전菜田이었고, 봄이면 겹벚꽃 나무 아래에서 풀들과 야생의 꽃들이 피었다.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을 시절에 대부분 채소 등은 이 밭에서 기르는 것으로 자급자족하였다. 옛날 개심사에 머물던 시절 해가 질 무렵이면 이 채전을 지나 연못을 가로질러 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 경내를 한 바퀴씩 돌며 사색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맛이 없다. 주차장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도 예전에는 흙이 흘러내려 드러난 돌들이 발바닥을 찌르곤 하던 자연스런 산사의 길이었는데, 이제는 이 길도 넓게 다듬어 평평한 포도鋪道가 되었다. 하기야 절이 산 중턱에 있으니 화재라도 나면 소방차가 쉽게 진입할 수 있어야 한다. 요즘도 사탄의 건물이라면서 사찰 건물들에 불을 질러대는 미치광이들이 있기 때문에 산속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포기하고 이런 맨질맨질한 길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사진 4). 

 


사진 10. 개심사 괘불탱. 

 

  경사진 길을 걸어 올라가면 안양루安養樓(사진 5)에 걸린 「상왕산개심사」라는 커다란 현판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데, 압도적이면서 장중하고 시원한 맛이 느껴진다.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선생이 예서隸書체의 글자를 전서篆書를 쓰듯이 썼다. 획은 진秦나라 승상 이사(李斯, 284-208 BCE)가 쓴 ‘역산비嶧山碑’의 소전小篆체 옥저전玉箸篆을 쓸 때와 같이 균일함을 유지하고 크게 변화를 주지 않았다. 근대에 와서는 신해혁명 이후에 중화민국 인주국印鑄局에서 관원으로 20년 가까이 근무하기도 했던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 1875-1953) 선생이 옥저전을 제일 잘 썼다. 

 

  상왕산(307.2m)의 상왕象王이라는 말은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룬 붓다가야BuddhaGayā, 즉 보드가야Bodh-Gayā에 있는 가야산伽倻山의 정상이 코끼리의 두상과 닮았다고 하여 상두산象頭山이라고도 부른 것에서 왔다. 개심사 인근의 가야사伽倻寺가 있는 남쪽 주봉인 가야산(667.6m)과 개심사가 앉은 북쪽 주봉이 이어져 있어 이를 가야산과 같은 뜻이면서 말이 다르게 상왕산으로 명명한 것이다. 상왕 즉 붓다가 있는 산이라는 말이다. 안양루와 마주 보는 종각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안양루는 돌아서면 겸손한 해탈문이 나온다(사진 6). 해탈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물 제143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을 맞이한다. 지상에 바로 세운 안양루를 뒤로 하고 앞을 향해 바라보면 앞으로는 오층금당탑과 대웅보전이 있고, 왼쪽에는 심검당尋劍堂이, 오른쪽에는 무량수각無量壽閣이 있다. 이 건물은 모두 조선시대의 것인데, 금당인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과 무량수각의 당우를 놓고 그 전방에 누각건물을 배치하고 있어, 조선 초기의 가람배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사진 7). 명부전冥府殿이나 팔상전八相殿 등의 전각들은 대웅보전과 안양루를 잇는 일직선상의 가람배치 양식에서는 벗어나 있다.

 



사진11. 개심사 사직사자도

 

  대웅보전은 원래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곳이다. 그런데 내부에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량수전이나 아미타전阿彌陀殿 또는 극락전極樂殿으로 이름을 바로잡든지 아니면 아미타불을 다른 전각으로 옮기고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것이 옳다. 현재 대웅보전 건물은 조선 성종 6년에 충청도 절도사 김서형金瑞衡이 사냥을 왔다가 산불을 내는 바람에 개심사가 불타 대웅전이 소실된 것을 9년이 지나 1484년 성종 15년에 중창한 것이다. 그렇지만 대웅전에 모신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은 좌상의 저부에서 확인된 봉함목 묵서명에 의해 1280년 고려 충렬왕(忠烈王, 1274-1308) 6년에 불사를 위해 특별히 설립된 승재색僧齋色의 주관 하에 내시 시흥위위內侍詩興威衛의 장사長史 송씨宋氏가 보수를 담당한 것으로 밝혀져 이 불상은 그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현존하는 고려 후기의 목불木佛 가운데 가장 오래된 목불일 수가 있으며, 조각적으로도 가장 완성도가 높은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시대 건물에 고려시대 불상이 봉안되어 있는 셈이다(사진 8).

 



사진 12. 개심사 범천도 

 

  성종 8년인 1477년에 건립된 심검당은 그 남쪽으로 ㄴ자형의 다른 요사와 함께 연결되어 있는데, 제멋대로 휜 목재를 적절히 사용하여 오히려 자연미를 더해준다. 이것을 자연의 아름다움이라며 사진을 찍어대기도 하지만, 오래된 곧은 목재를 구하기 어렵다보니 휘어진 목재를 사용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대웅전 앞에는 금당탑이 있다. 무량수각은 자연석으로 된 초석 위에 원주의 기둥을 세웠고,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안양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인데,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기둥에는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 선생이 쓴 주련이 걸려있다. 해사 선생은 북송北宋 4대가 중의 한 사람인 미불(米芾, 1051-1107)의 미불체를 잘 구사하였는데, 여기서도 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사진 9).

 

  명부전은 무량수각 동편에 있는데, 맞배지붕에 측면에 풍판風板이 있는 인조 24년인 1646년에 세운 건물이다. 내부에는 철불인 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十王像이 봉안되어 있다. 팔상전은 명부전 북쪽에 있는데,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개심사에 있는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은 조선 영조英祖 48년(1772)에 제작된 것인데, 임금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하여 그린 것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족자형으로 되어 있고, 전체 크기가 1,010×587㎝에 달하는 대형이며 비단에 그린 것이다(사진 10). 오방오제위도 및 사직사자도(五方五帝位圖 및 四直使者圖)는 1676년에 화승畵僧 일호一浩 화상이 홀로 그린 것으로, 사찰에서 수륙재水陸齋나 영산재靈山齋 등 의식을 행할 때 도량장엄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한 불화이다(사진 11-1·11-2). 현존하는 도량장엄용 불화 가운데에서 조성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것으로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조성연대와 제작과 관련하여 시주자, 증명, 화원, 화주 비구 등을 확인할 수 있는 화기가 남아 있어 특히 주목되는 작품이다. 제석帝釋·범천도梵天圖와 팔금강八金剛·사위보살도四位菩薩圖는 1772년에 괘불탱을 제작할 때 함께 만들어진 도량장엄용 의식불화로서 제석천도, 범천도, 사보살도, 팔금강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사진 12-1·12-2·12-3·12-4). 이들 도량옹호번은 괘불도와 함께 영산재를 베풀기 위해 일괄로 제작된 것으로 이들이 함께 남아 있는 드문 경우에 해당하여 그 가치가 높다. 이 불화들도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12. 개심사 제석도.

 

  개심사에서는 경판도 제작하여 불경을 간인하기도 했는데, 1580년에 제작한 「도가논변모자리혹론道家論辨牟子理惑論의 경판과 1584년에 제작한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과 『법화경』의 경판 등이 있다.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근래 새로 지은 보장각寶藏閣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사진 13). 개심사에는 아직 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불화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것들도 조사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보장각의 현판과 주련의 글씨는 송원松原 설정雪靖 대종사가 쓴 것이다. 

 

 개심사의 사역은 그렇게 크지 않았고 근래 지은 당우들이 들어서서 건물들이 많아졌다. 내가 머물 때는 몰랐지만 그 후에 불화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경판들도 보배로운 것으로 인정받아 이제는 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개심사는 중요한 사찰로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개심사는 특히 조선시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선생의 집안과 인연이 있어 번창한 것으로 보인다. 

 

 추사 선생의 10대조인 김연(金堧, 1494-?)이 서산에 자리를 잡고 그 후손들이 살게 되면서 벌족을 이루어 김흥경(金興慶, 1677-1750) 때는 영의정을 하였고, 그 아들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은 영조의 사위가 되었으며 예산 용궁리 일대 땅을 별사전別賜田으로 받아 지금의 ‘추사고택’을 짓고, 아버지를 위하여 예산의 화암사華岩寺를 원찰로 중건하였다. 판서를 지낸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추사 선생은 그 증손이 된다. 아무튼 이들 경주 김씨 집안인 김연의 어머니 묘를 절 건너편에 쓰고 나중에 아버지의 묘까지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면서 개심사는 이들 김씨 집안과 긴밀한 인연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이고, 그에 따라 사세도 좋아졌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 13. 보장각의 경판. 

 

  개심사에 머물며 공부하던 시절 거기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나중에 대부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법률가의 길을 갔다. 법학을 공부하고 법률가의 길을 가는 것은 이 땅에 법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이제는 권위주의 시대를 극복하였다고 생각되는 이 시대에 다시 법이 파괴되는 처참한 현실을 보면서 역사는 전진만 하지 않는다는 것도 다시 확인한다. 헌법학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한 일들이 모두 헛된 것이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젊은 시절 공부하던 개심사를 걸어 나오며 해탈은 나중의 문제이고 우선 인간세人間世 문제를 풀 수 있는 혜안이라도 얻기를 간절히 소망하여 보았다. 아직은 저자거리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할 시간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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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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