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통도사가 발행한 교계 최초의 寺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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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 2021 년 7 월 [통권 제99호] / / 작성일21-07-05 10:11 / 조회4,701회 / 댓글0건본문
근대불교잡지 산책 ⑦ /『축산보림』 (통권 6호, 1920.1~1920.10)
발행정보
『축산보림鷲山寶林』(일명 취산보림. 사진 1)은 불보종찰 통도사 내 축산보림사에서 간행한 잡지로 1920년 1월 25일 창간되었다. 축산보림사 사장은 통도사 주지인 김구하(金九河. 1872-1965), 편집겸발행인은 이종천(李鍾天, 1890~1928)이다.
창간 이후 2호(4월 15일), 3호(6월 15일), 4호(7월 15일), 5호(8월 15일), 6호(10월 15일)에 발행되었다. 창간 당시는 월간잡지로 기획했으나, 일제의 검열과 경제적인 요인으로 격월간에 가깝게 간행되었다.
처음에 축산보림사에서 간행하던 잡지는 5호부터는 주관 기관이 통도사 불교청년회로 바뀌었다. 김구하는 통도사 불교청년회의 출범을 기념하여 출판권을 청년회에 양도하고, ‘용단’과 ‘희생’ 정신으로 천오백 원을 청년회에 증여하여 청년회와 잡지의 발전을 도모하였다.(5호의 광고) 그러나 실제 지원이 원활했는지는 알 수 없다. 종간호는 ‘경제’상의 문제가 있어 간행이 지체되었고, 또 확실하지 않은 ‘어떠한 사정’으로 종간된 후 잡지 제호를 『조음潮音』으로 바꾸어 다시 간행하였다. 『축산보림』의 후속편인 『조음』 역시 경제적 요인으로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고 말았다.
사진1. 축산보림 창간호 표지
창간의 목적은 「발행사」(1호)에 잘 담겨있다. 이를 요약하면 ‘문명사회, 문명시대는 지식을 공급하는 기관이 있어야 하는데 그 최상의 기관은 신문 잡지이니, 『축산보림』 발행은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한 것이며, 이는 시대적 요구’라 하였다. 『축산보림』은 ‘우리 사회동포의 생활과 인생관에 직접 관계가 있’으며, 일반 잡지보다 ‘종교적 색채, 불교교리가 위주’가 되는 잡지로서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조야朝野의 명사로써 투고하게 하며 장차 조선 최고의 학술잡지, 최상의 지식관知識關이 되기를 바란다.’는 기대를 표명하였다.
1910년대 간행된 모든 불교계 잡지는 교단의 기관지(『조선불교월보』 등)거나 개인잡지(『유심』)거나 모두 서울, 즉 중앙의 산물이었다. 이에 비해 『축산보림』은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간행한 잡지로서 불교계 최초의 개별(지방, 본사) 사찰 잡지라는 특색이 있다. 교단의 기관지가 아니기 때문에 편집과 내용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고, 통도사가 배출한 젊은 일본유학생 출신이 발행하였기 때문에 억눌린 시대 꿈틀거리는 자유 의지를 펼치려 노력한 자취가 뚜렷하다. 양산 울산 마산 진주 등지에서 활동한 문사들이 주필이나 기자로 활약하였고, 그들이 잡지 활동 전후로도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청년회 활동과 교육사업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이 잡지는 지역문화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진2. 강성찬의 <자신하라> 일부(4호)
한편 잡지가 창간된 1920년은 일제 통치 정책이 무단정치기에서 문화정치기로 전환되는 시기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신문, 잡지의 창간되는 해도 바로 1920년이다. 그러나 젊은 승려들의 자유의지는 도처에서 마찰을 빚게 되어 잡지의 곳곳에 공란이 다수 등장하였고, 그들은 이에 대한 불만을 직간접적으로 피력하였다. 6호 공지란에 ‘○동구람이 해석-간혹 본문 중에 이상한 ○○을 그린 것은 소위 당국에서 비장脾臟 상하는 말이라 하야 ○옥獄의 삭형削刑을 나린 것이올시다.’라는 표현은 검열을 휘두르는 일제의 횡포를 비꼬아 표현한 것이다.(사진 2-강성찬의 자신하라 일부)
발행인과 필진
2호의 ‘본사 직원’란에 소개된 사장 김구하(사진 3), 편집인 이종천, 주필 박병호朴秉鎬(1888-1937), 기자 강성찬姜性璨, 서기 강정룡姜正龍(1898-?)은 발행의 주체요, 주요 필진이 된다.
1919년 5월, 통도사 지원으로 일본에 유학 갔던 이종천이 해인사 유학생인 김영주․조학유와 함께 귀국하였다. 5, 6년 동안 통도사에서 학비를 지원할 당시 주지는 김구하였고, 둘은 통도사에서 재회하였다. 삼십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이자 중앙학림 교장으로 포교와 교육에 헌신했던 김구하, 그리고 옥천사 출신으로 통도사 유학생에 발탁되어 조동종 제1중학과 동양대학 윤리철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일본유학생 신분으로 『조선불교총보』에 「불교와 철학」(9·12·13호), 「기독교와 불교의 입각지」(14호)를 투고한 이종천이 통도사에서 재회한 사건은 새로운 불교잡지 창간의 시발점이 되었다. 잡지의 필진 가운데 일본 유학생이 많았던 이유는 당시 불교계의 근대적 변화에 민감했던 주지이자 사장, 그리고 불교유학생 출신인 이종천의 역할이 컸다.
진3. 구하스님 진영
박병호는 잡지에서 ‘조선 문단 상에 가장 저명한’ 분(2호, 社告)으로서, ‘외우畏友’ 이종천의 추천으로 입사하였다.(3호, 「입사의 변」) 이종천과 박병호는 울산, 통도사를 기반으로 『축산보림』 제작 전후로 청년회 활동을 함께 펼쳐나간, 지역의 민족운동을 대표한 선각자들이었다. 이종천은 이후 불교청년회 간사, 포교사, 그리고 옥천사가 설립한 진주 진명학원 교원으로 활동하였고, 박병호는 울산 출신으로 3.1운동 직후 울산청년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아 민족운동에 나선 인물이다.
필진 중에는 다수의 일본 유학생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논설과 문학 작품, 축사 등을 투고하여 젊은 잡지의 면모를 갖추는 데 기여하였다. 이도현, 김진목, 문세영, 이지영, 그리고 필명으로 등장하는 동성東星은 당시 일본의 각 대학에서 수학하고 있던 학생들인데, 이들의 기고문을 통해 보면 당시 일본에서도 잡지 발행에 대한 기대가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또 김구하와 유학생, 이종천과 후배 유학생 사이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축산보림』에서 보여준 청년들의 목소리와 유대는 이후 전개된 불교청년회 활동으로 이어지며, 1924년 동경불교유학생회에서 『금강저』를 발간하게 되는 데도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간행한 부피도 작은 잡지 『축산보림』은, 사실은 당시 최고 지성의 집합소인 동경유학생들의 성원을 받으며, 또 그들의 투고가 함께 한 의미 있는 잡지인 것이다.
신·구세대의 종교론
김구하는 「이십세기 불교」(1호), 「참괴慚愧의 가치」(2호),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3호), 「대자유大自由 대평등大平等」(4호), 「작일금일급명일昨日今日及明日」(5호) 등에서 20세기 불교계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기존의 공안이나 교리를 현대의 다양한 지식 정보를 활용하여 이해하기 쉽게 제시하였다.
「이십세기 불교」에서는 조선시대 이래 잠재된 관습 때문에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서도 본격적인 개혁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오늘날 불교의 급무는 구태를 변화시켜 이 시대 요구에 적합한 활동을 경영하는 것이라 하였다. 「평상심시도」는 선의 대표적인 공안의 의미를 철학의 역사와 학설을 인용, 고찰하여 논리적으로 전개한 글이다. 종국에는 현실이 곧 정신이요, 정신이 곧 현실이며, 불법과 세법이 결코 둘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작일금일급명일」은 인류의 일생을 통계 내면 수많은 어제, 오늘, 내일이 있을 터인데 그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일까 자문하면서 삼계를 관통함이 제일 귀하다는 요지를 제시하였다. 청년 독자를 대상으로 한 생활 법문에 해당한다.
이종천은 「종교론」(1,2호. 사진 4), 「사후死後의 문제」(6호)를 발표하였다. 「종교론」은 독일 철학자 ‘슈라히마화Schlimacher’의 종교론을 상당 부분 참고하여 작성한 것이다. ‘종교적 요구’는 인심의 최심최대最深最大한 요구로서 생명의 요구라 하였다. 「사후의 문제」에서는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고 무 번뇌, 상락의 경에 처하게 하는 것이 종교라 하며 죽음에 관한 제반 문제를 기술하였다. 궁극에는 사전死前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곧 사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 하였다.
박병호는 「불교의 진수眞髓」(3,4,5호), 「금주문제에 대ᄒᆞ야」(3,4호) 등을 게재하였다. 「불교의 진수」에서는 종교의 개념을 비悲, 정情, 지智의 조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한 후 불교만이 이를 조화하여 전미개오轉迷開悟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고, 이하 불교의 목적과 불교의 이법理法, 인과론因果論의 여러 측면을 기술하였다.
이외에 김영주의 「동경불교소관東京佛敎小觀」(1호), 조학유의 「인격의 요소」(3호), 황기우 「사원과 종교의 부활」 등을 비롯하여 송설우宋雪牛의 「수양론」(1호), 김진목의 「최근 기독교의 성인盛因과 불교의 자각을 촉促함」(4호), 문세영의 「나의 종교관」(4호) 등은 대부분 유학생 출신이거나 현재 유학생 신분으로 투고한 것인데 대체로 종교론, 수양론, 종교계 시론을 담고 있다. 이처럼 『축산보림』에는 김구하와 주요필진이 다채로운 관점에서 종교론을 개진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대중적인 관심을 적절히 고려하며 글을 전개한 특징이 있다.
다채로운 소설
<재화災禍의 몽夢>(2호)은 개인이 가지는 불행의 부피에 대해 이야기한 단편 소설로서 <주홍글씨>, <큰바위 인물>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1804-1864)의 작품이다. 옥황상제의 심판에 따라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한곳에 모으고 서로의 재앙을 바꾸는 우스꽝스러운 소동을 벌인 후에 ‘각각 무거운 짐 벗어버리고 그 전에 가지고 있던 짐을 가져가라’는 명에 일동이 희열과 안도를 느꼈다는 내용이다. 우의적이고 상징적인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묘사한 작가의 특기가 잘 드러나 있는 흥미로운 번역소설이다.
호관濠觀(박병호)의 <혈가사>(4,5,6호, 『조음』 1호)는 미완으로 끝난 추리소설이다.(사진 5) 흥미로운 이 작품은 1826년에 울산에서 두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한국추리문학사상 초기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축산보림』에는 본격적인 전개에 앞서 경성 남산공원이라는 공간적 배경, 이 협판의 딸 이숙자와 안동에서 올라온 고학생 권중식이라는 등장인물을 소개하였고, 본격적인 사건의 발생, 즉 남산공원에서 죽은 남자를 발견하는 장면까지 전개되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기존 양반의 후예인 친일 귀족의 양태를 폭로하는가 하면, 재산을 몰수당한 가족을 통해 나라 빼앗긴 조선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혈가사>의 경우 개연성 있는 스토리에 사실성 있는 인물 묘사로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로 평가받았지만, 작가가 스토리에 개입하며, 우연과 비약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는 점은 한계로 작용한다.
『축산보림』의 소설은 1910년대 불교잡지에 소개한 어느 소설보다 흥미로운 소재와 인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불교적인 색채가 얕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인간의 다양한 탐구를 통해 우리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게 한다는 점에서 대중성을 확보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한다.
지역의 발견
김경봉(金鏡峰, 1892-1982)은 당시 천성산 내원암 주지로 「양산梁山의 신금강新金剛」(3호)을 발표하였다. 그는 양산 천성산千聖山을 남쪽에 있는 금강산으로 명명하고 그 구비구비 아름다운 산세와 지명, 89암자 등을 하나하나 모두 금강의 그것에 비유하며 경물을 찬탄하며, 자연경물이 인간 심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하였다.
이 글을 미리 접한 잡지 기자는 「신금강新金剛 발표에 대ᄒᆞ야」(1호)에서 천성산에 화상의 위대한 인격이 표현된 것으로 평가하고 감동의 마음을 토로하였다. 이는 단순히 양산 천성산이라는 경관 좋은 한 장소의 소개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발길이 닿고 눈길이 머무는 그곳을 금강산으로 치환함으로써 장소에 대한 애호를 표출하고 그곳이 세계의 중심임을 천명한 의미가 있다. 물론 그곳에 서 있는 나 자신은 세계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외에 영축사문의 <운문사雲門寺의 반송盤松이라>(2호), 축림인의 <석남사石南寺까지>(3호)는 다른 글들과 다르게 유려한 문체로 지역의 명소이자 수행공간을 답사한 기록을 담아낸 수필로서 잡지의 지역성을 강화하는 성격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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