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불교건축 이야기]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페이지 정보

홍병화  /  2021 년 7 월 [통권 제99호]  /     /  작성일21-07-05 09:55  /   조회7,275회  /   댓글0건

본문

불교건축 이야기 7 | 우리나라 최고最古 목조건축은?

 

  천년사찰이라 말 하지만 실제 목조건축이 천년을 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우리나라에 천 여 개의 전통사찰이 있지만 이중에 공식적으로 천년이 넘는 건축물은 아쉽게도 없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몇 개씩 있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하면 떠오르는 건축은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정도이다. 어떤 글을 읽으면 봉정사 극락전이, 어떤 글은 수덕사 대웅전이, 또 다른 글은 부석사 무량수전이라고 한다. 서로의 기준에 따라서 각각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아직 학계에서도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아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설왕설래를 최근 제기된 견해를 중심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봉정사 극락전 

 

  봉정사 극락전은 보통 고려 중기에 지어진 건축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1972년 해체수리과정에서 나온 기록 때문이다. 이 기록의 요지는 두 번째 수리로 추정되는 1625년 수리 직후 남긴 상량문과 종도리 묵서명에서 이보다 앞서 1363년에 지붕을 수리하였다고 한다. 보통 건물을 처음 짓고 지붕을 수리하기 까지 걸리는 시간을 100-200년 정도로 본다고 하는데, 1363년에 지붕수리가 있었다는 것은 처음 집을 지은 시점이 적어도 12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진1. 봉정사 극락전-1972년 해체수리 되면서 고려시대 모습으로 변모했다. 

 

  이외에도 봉정사 극락전의 건축형식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인 남선사 대전(782년)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건물 규모는 차이가 크지만 공포의 형태나 불꽃모양의 화반, 장여에 표현된 그림자 첨차, 도리를 고정하는 사선방향의 소슬합장 등 두 건물 간에는 닮은 부분이 많은데, 그래서 두 건물은 비슷한 시기가 아니겠는가 하는 추정인 것이다.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은 1937년 일제가 실시한 해체수리과정에서 화반에 적힌 묵서명이 발견되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1308년에 수덕사 대웅전이 창건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기록만으로는 수덕사 대웅전이 가장 이른 건축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사진3. 수덕사 대웅전. 

 

 

사진3-1. 화반 묵서명(연두색-至大元年戊申, 노란색-修德寺造成)(문화재청).

 

 

 

다른 두 건물은 조성시기에 관한 기록 없이 양식적으로 시기를 비정比定해야 하는 것에 비하면 수덕사는 분명히 생일이 기록되어 있어 양식사적인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는 건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전에 관한 기록 중 창건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은 17세기 초 두 개의 기록이다. 살펴볼 기록은 「鳳凰山浮石寺改椽記」(개연기)와 「無量壽殿前側西南部部材墨書」(부재묵서)로 모두 고려 말에 일어난 무량수전 방화 사건을 17세기 초에 간추려 적고 있다.

  우선 「개연기」의 내용을 보면 “1358년 적병이 이 건물에 불을 질렀고, 이때 불길에 불상 얼굴이 훼손됐고 1376년 원융(圓融, 964-1053)이 무량수전을 수리하였으며 1611년에는 비바람에 보가 꺾였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1376년 무량수전을 수리한 사람은 원융圓融이라 적었지만 원응(圓應, 1307-1382)의 오기이다.

 


사진4 . 부석사 무량수전. 

 

  그리고 「부재묵서」에는 “1376년 왜구로부터 입은 화재 피해를 수리하였고, 1611년에는 꺾어진 서까래를 교체하였다.”고 적고 있다. 두 기록 모두 1376년 왜(적)에 의한 피해를 수리하였고, 1611년에는 보 또는 서까래가 부러졌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적고 있다. 목조건축의 특성상 화재 피해는 완전한 소실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라서 「개연기」에 의하자면 1358년 무량수전은 불탔으며, 1376년 중건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1611년 다시 퇴락해 수리를 하게 된 것이다.

 

 



 

사진5 . 위로부터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종도리와 소슬합장의 관계. 부석사를 제외한 다른 건물은 소슬합장이 종도리를 직접 지지한다. 

 

  그런데 1376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라고 보기에는 바로 1년 뒤 경내에 지어진 조사당과 양식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역사학계의 대가大家 윤장섭 선생은 무량수전 기록에 대한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사당보다는 무량수전이 ‘100-150년’ 정도는 앞선 건물이라고 보았다.

 

 

 

사진6 . 무량수전과 조사당의 건물 뼈대의 구성형식 비교. 

 

  최근 건축역사학계에서 몇몇의 연구자들이 부석사 무량수전의 초창初創을 봉정사 극락전보다 앞선 건물로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성과를 내 놓았다. 가장 앞선 연구자는 류성룡으로 종도리를 지지하는 소슬대공의 수법이 부석사 무량수전과 다른 고려시대 건물과는 엄연히 다르고, 오히려 중국 당송대의 건물에서 비슷한 수법을 찾을 수 있다는 탁견을 제시했다.

  이외에도 이병춘은 공포를 중심으로 중국의 사례와 비교하여 12세기 초 중국에서 체계화된 『영조법식』보다도 앞선 공포와 무량수전 공포가 친연성이 높다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부석사 무량수전의 공포를 나말여초羅末麗初에 형성된 수법을 계승한 공포일 가능성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부석사 무량수전 귀공포.

 



중국 소림사 초조암 귀공포(1125년).

 

 

사진7 . 중국 초조암 귀공포는 『영조법식』(1097년)에 나타나는 귀공포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무량수전은 그렇지 않아 그 이전의 수법임을 짐작하게 한다.

 

 

건물 나이를 가늠하는 다른 방법들

 

  요즘 건물의 나이를 가늠하는 방법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연륜연대법이다. 나무의 나이테 패턴을 조사하여 기준이 되는 패턴과 비교해 벌채된 시점을 정확히 찾아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비교할 패턴 샘플이 충분해야 하는데, 고려시대 나무의 샘플을 구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매우 어려워 비교할 자료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외에도 탄소연대측정과 같은 방법이 있지만 이걸로도 건축문화재의 연대를 측정하지 않는 것을 보니 뭔가 현실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는 과학적 방법에 의한 연대의 측정보다는 미술사적 양식비교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추론이 일반적이다.

 

진짜 최고最古의 건축은 어떤 것인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양식사적 고찰은 절대적인 시기를 추정할 수는 없지만, 상대적인 시기를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시기가 다른 두 유인원의 유골이 온전한 상태에서 각각 발굴되었다고 가정하자. 공교롭게도 다른 방법을 통해 절대연대를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서 두 유인원의 선후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꼬리뼈를 비교해 보았다. 다행히 꼬리뼈의 길이에 차이가 있다면 어떻게 추론할 것인가? 현생 인류가 원숭이로부터 기원했기 때문에 꼬리의 퇴화는 필연적 진화의 결과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본다면 말이다.

  즉, 부석사 무량수전이 봉정사 극락전에 비해 종도리와 소슬합장의 결구방법에서 앞서는 방식을 사용한 건물이다. 종도리를 지지하는 방법과 같은 구조적인 수법의 변화는 단순한 장식적 요소의 변화와는 다른데, 봉정사나 수덕사의 방식이 구조적 차원에서 보자면 부석사 무량수전에 비해 발전한 방식이라고 볼 수 있어 결과적으로 부석사 무량수전이 봉정사나 수덕사보다 오래된 건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건물인가

 

  이를 추론하기 위해서는 당시 부석사를 둘러싼 불교계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파악할 문제인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고려 초’라 볼 수 있다.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전반은 선종만이 국사를 배출하던 이전과는 달리 화엄종과 법상종도 번갈아 국사를 배출하던 시기로 종파간의 각축이 있었다. 그 와중에 법인 국사이래 오랜 침묵을 깨고 화엄종에서 다시 국사를 배출했던 시기가 바로 11세기 초이다. 

  원융이 국사가 되면서 부석사가 하산소로 결정되고, 전례에 따라 왕의 후원으로 부석사가 중창되는 과정에서 무량수전이 지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은 건물의 세부수법이 가리키는 시기와 겹쳐지는데, 비록 원응(圓應, 1307-1382)의 오기라지만 「개연기」에 등장하는 원융(圓融, 964-1053)이 무량수전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에 등장한 이유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최고最古가 최고最高인가

 

  최고最古를 선호하는 것은 문화재를 골동품의 관점에서 보는 습관 때문이다. 수덕사는 1308년이라는 양식사적 기준을 제시하는 작품이라 그 가치는 엄청나다. 봉정사 극락전의 경우 작지만 정제된 조형미를 보여주는 명품건축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동시대 중국의 건축과 규모는 물론 수법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 작품으로 국제적 시각에서도 고려의 건축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건축이다. 이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건축일까? 그건 독자들의 기준에 달렸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홍병화
건축학 박사. 전 금강산 신계사 추진위원회 연구원, 전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전 조계종 전통사찰전수조사연구실 책임연구원, 현 동국대 강사 및 은평구 한옥위원.
홍병화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