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인도학 불교학 연구의 개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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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1 년 6 월 [통권 제98호] / / 작성일21-06-04 16:27 / 조회5,078회 / 댓글0건본문
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6 | 기무라 타이켄
일본의 근대는 영욕으로 둘러싸여 있다.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한 부국강병, 약육강식에 의한 이웃 국가의 침략과 식민지화, 이처럼 무의미한 근대의 영광은 현대에도 여전히 일부 무지한 민중들을 현혹시키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무명無明의 근대 속에서 폐불훼석으로 초토화된 불교계는 절치부심한 결과, 제국대학 속에 자신의 학문을 당당하게 심어 놓기에 이른다. 물론 병영국가와 영합하며 부화뇌동한 불교계가 면죄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누추한 역사 속에서 마치 타다버린 희망이라는 쪽지를 발견하는 것처럼, 죽어가는 생명에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불교학의 전통이 살아 있었다는 점이 그 희망에 해당할 것이다.
기무라 타이켄(木村泰賢, 1881-1930, 사진 1)도 그 주역 중의 한 사람이다. 동아시아에서 인도불교학 연구에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져간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이 하쿠주와 쌍벽을 이루며, 함께 불모의 영역을 개척한 그 열정들이 쌓여 오늘날 불교학이 세계적 시민권을 갖는 발판이 되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또한 1904년 러일전쟁 당시 만주 야전병원의 간호병으로 전쟁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국민국가의 부속품으로 전략한 젊음이 전쟁의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징집될 때, 그는 배낭 속에 독일어 서적과 사전을 넣고 떠났다. 제대할 때는 독일어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영어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언어 습득 능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훗날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그리고 한문 경전 해독 능력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사진 1. 기무라 타이켄.
일찍이 기무라의 총명을 알아본 사람은 그의 고향인 이와테현 니시네촌의 조동종 사찰 동자사東慈寺 주지 무라야마 지츠조였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양조장에서 일하던 그를 제자로 받아들여 교육을 시켰다. 후에 스승이 열반하자 20대 주지가 되었다. 1900년 조동종 대학(현 고마자와 대학, 사진 2)에 입학, 1903년 졸업과 동시에 동경제국 대학에 다시 입학했다. 그가 가르침을 받은 학자들은 일본 최초의 철학교수였던 이노우에 테츠지로, 인도철학과의 초대교수였던 무라카미 센쇼, 범어학 강좌를 개설하고 『대정신수대장경』 등 여러 대장경 편찬을 주도한 다카쿠스 준지로, 일본 종교학 연구의 토대를 놓은 아네사키 마사하루 등이었다.
기무라는 이들 근대 일본학을 구축한 쟁쟁한 학자들의 그늘에서 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터득했다. 1909년 졸업, 1912년 같은 대학 문과대학 강사로 재직했다. 이후 타계하기까지 약 20년 동안 연구, 교육, 계몽운동에 몰두했다. 그 사이 약 2년 반 정도를 영국에서 인도철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1882년 팔리성전협회를 창립한 리스 데이비스를 만나 학문적으로 교류했다. 비록 아쉬운 50세에 먼 길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불교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데에 이견은 없다.
기무라는 인도철학은 물론 초기불교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연구했다(사진 3). 그의 업적 중 가장 높게 평가받는 것은 『인도철학종교사』(1914) 및 『인도육파철학』(1915)과 『아비달마론의 연구』(1922)이다. 당시 유럽의 연구와 필적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 『인도철학종교사』는 학문의 스승인 다카쿠스 준지로와의 공저이다. 범서梵書, 오의서奧義書, 경서經書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도 고대사상의 발달사를 연구한 것이다. 당시에는 이노우에 엔료의 『외도철학』, 아네사키 마사하루의 『인도종교사고』 정도가 인도종교 연구의 성과였다. 범어 원전연구를 통한 본격적인 인도 고대종교 연구의 문이 열린 것이다. 본 연구의 연장선인 『인도육파철학』은 각파의 출생 연대의 논거 제시와 함께 순서에 따라 각 텍스트에 입각하여 학설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불교의 우월성에 기대어 외도철학으로 본 인도사상을 독립적인 학문연구의 영역인 인도철학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불교연구의 객관성이 더욱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2. 1922년 당시 조동종 대학, 고마자와대학 제공.
기무라의 박사학위 논문인 『아비달마론의 연구』는 이러한 인도철학 연구의 지평 위에서 탄생했다. 이미 『아비달마구사론』(1920)을 오기하라 운라이와 함께 일본어로 번역했으며, 부파불교 연구의 핵심서인 『이부종륜론』을 번역, 남전 논부의 핵심서인 『논사』와 비교하며 비평적 주해를 놓았다. 그리고 『원시불교사상론』(1922)을 같은 해 봄에 출판했다. 초기불교 교학의 정수인 아비달마 연구는 기무라로부터 본격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저술은 당시 불교연구자는 물론 불법에 기반한 사회운동가들로부터도 애독되었다. 팔리어 경전과 율장을 자료로, 한역 아함경과 율장을 참조, 원시불교를 재구성했다.
『아비달마론의 연구』는 이 분야 일본 최초의 연구서이다. 저서의 원제목은 『아비달마론 성립 과정에 관한 연구: 특히 주요한 45종의 논서에 대해서』이다. 초기 아비달마 연구는 매우 방대하고 난해한 점, 대승불교권에서 소승으로 폄하되어 무시되어 왔다는 점 때문에 연구가 소홀했다. 기무라는 이를 간파했다. 앞의 연구처럼 팔리어 논장과 한역의 초기 소승논장을 연구, 각 논서들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규명했다. 여러 후학들이 회자하는 것처럼 그의 기술 방식은 매우 명쾌했다. 이 저술 이후 일본에서는 초기불교 연구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본서에 실린 연기론 해석으로 철학자 와츠지 테츠로와 논쟁을 벌인 일은 유명하다. 이후 기무라는 원시불교로부터 대승불교 연구로 영역을 확장해간다.
무엇보다도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해탈을 향한 길』(解脱への道, 1924, 사진 4)이다. 당시 만 수천 부가 팔렸다. 생명관으로부터 시작하여 절대생명, 해탈론, 선의 종류와 철학적 의의, 자력과 타력, 원시불교에서 대승불교로, 현대생활과 불교, 운명과 자유 등 불교사상에 기반, 다양한 주제로 인간의 자유의지와 생생하게 약동하는 주체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 그는 불교의 특징을 바라문의 제식주의와 구별되는 윤리도덕을 제창한 것에서 찾는다. 특히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많은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맑혀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는 칠불통게七佛通偈를 불교 덕목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과의 법칙은 공리주의 위에 서 있다. 그리고 불타의 핵심 가르침인 무아를 전제로 한 해탈도로서의 도덕을 주장한다. 그것은 대승의 진여법성이 표준이 된다.
그렇다면 기무라가 말하는 대승은 무엇인가. 소승은 형식주의이다. 그것은 모든 계급에 문호를 개방한 불타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열린 인생미人生味와 상식미常識味로 풍부한 불교를 형해화한 것이다. 불타의 모든 이상은 표면적 설법 내부에, 형식적 규율의 내면에 면면히 흐르는 대정신이다. 대승불교는 이러한 정신주의를 표방하고 나왔다. 기원 전후에 대승불교는 형식화한 불교를 거부하는 인심의 요구에 대응하여 일어난 시대정신이다.
사진 3. 기무라 타이켄 전집.
기무라의 학문적 목표는 신대승불교이다. 「현대의 종교적 요구와 신대승불교」에서 그는 근대에 들어와 비록 기성교단에 대한 대중의 열정은 식어 있지만, 대승불교는 최고의 종교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불교도 변화를 요구받고 있지만, 근대사회에서 요구하는 종교와 과학이 모순되지 않는 것, 교리의 철학적 배경과 함께 내재적 초월의 세계관을 바로 우리 본성에서 구할 수 있는 것, 실생활에서 환희를 얻음과 동시에 향상을 위한 노력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 승속·남녀·국적을 불문한 보편적인 것에 가까운 것이 바로 대승불교이다. 미신성을 배격한 대승불교가 신대승불교이다.
그는 불교야말로 반야의 지혜가 밑바탕이 된 진공묘유가 그 진수라고 한다. 『해탈을 향한 길』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개론: 진공으로부터 묘유로』(1939)에 잘 나타나 있다. 불교를 초월적, 염세적 종교로 간주하는 것은 해탈의 소극적인 면만을 보는 것으로 현실 세계의 활계活計적 측면의 반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다. 불교의 염세관은 결코 현실도피의 가르침이 아니고, 오히려 세계의 실상을 고통으로 보지만 용감하게 그 고통을 정복하는 공부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의 정토사상 또한 범부들을 미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파악, 개개인을 완성시키는 이상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승의 보살도에 기반, 사바세계를 정화하는 정불국토淨佛國土의 이상인 셈이다. 그는 이것을 ‘생성의 정토’라고 한다.
기무라가 왕성한 연구력을 발휘하던 때는 서구로부터 다양한 사조가 난입하던 시대였다. 국가중심주의와 자본주의가 또한 맹위를 떨치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에 반국가, 반자본의 진영도 가세했다. 지면에서나 거리에서 마르크시즘이나 사회주의에 의한 종교 비판도 거세었다. 종교부정론자들에 대한 종교계의 대응 또한 격렬했다. 종교신문인 『중외일보』에서는 기무라를 포함하여 야부키 세이이치, 다카시마 베이호, 후루노 키요토 등이 합세하여 반종교론자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기무라가 신대승불교운동을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불교는 어떤 형태의 인간고도 해결하는 동시에 인간 스스로 구축한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진4. 해탈을 향한 길
그는 불법의 무위無爲 속에서 활달하며 강직했다. 인정과 이타심 또한 두터웠다. 자신의 생활 리듬을 개의치 않고 강연이나 원고 의뢰도 거부하지 않았다. 제자들에게 “나는 개척자로서 3, 4척尺 앞을 대충 경작해 나가므로 후진들이 보다 깊게 파야 한다.”고 열린 마음으로 말했다. 또한 어떤 논제를 규명하고자 할 때는 “먼저 문제 전체의 전망을 하라.”고 했다. 자료 전체를 수집하여 단지 정렬만 하는 것은 반드시 좋은 연구법은 아니다. “논문을 쓸 때는 가능하면 재료를 버려라.”라고 했다. 자신도 참고서를 제쳐놓고, 오직 원전 자료만으로 논을 세웠는데, 이는 사상의 독립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일본불교가 문헌중심의 연구로 폐쇄적인 연구풍토가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교야말로 언어에도 매이지 않는 활달한 학문의 세계임에도 연구자들은 문자주의를 신봉한다. 오늘날 일본불교 연구의 성과는 세계적이라고도 하지만, 상상력의 빈곤에 처해있다고 비판받는다. 사바세계에서 활발발活潑潑한 삶을 불태웠듯 기무라는 우리에게 늘 창조적이며 개방적인 사고, 애초에 어디에 구속됨 없는 독존적 자유를 누리라고 일침을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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