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후대 불교사서 전형으로 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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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 2021 년 6 월 [통권 제98호] / / 작성일21-06-04 15:59 / 조회4,604회 / 댓글0건본문
근대불교사서 6/17세기의 사적기
『화엄사사적華嚴寺事蹟』(사진 1), 『대둔사사적大芚寺事蹟』(사진 2),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사진 3) 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전후의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찬술되었다. 찬술자는 중관 해안(中觀 海眼, 1567~?)으로 알려져 있다.
해안은 그의 삶 대부분을 전란과 함께 보냈다. 그가 45년이라는 긴 세월을 ‘장의총통승군仗義摠統僧軍’으로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의 문집에는 “단순히 지팡이 하나로 떠다니면서 집착이 없었다.”고 했지만, 조선의 총체적인 위기는 도외시할 수 없었다. 왜란 때는 스승이자 외숙 뇌묵당 처영雷默堂處英과 함께 의승군으로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했고, 경주에서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선원禪苑에서 수행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진. 화엄사사적
해안이 찬술한 사찰기록이 불교사적 의미가 있는 것은 일개 사찰의 연혁에만 국한되지 않은 점이다. 해안의 사적기는 사찰의 연혁, 전각과 부속 암자의 중창이나 규모 등 사찰의 사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석존의 생애, 불교의 발생과 중국·한국 전래, 중국의 선종전등禪宗傳燈을 서술했으며,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고대불교사와 승전僧傳을 수록했다. 먼저 사찰의 연혁은 각 사적기가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대체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인용하고 있다. 일부 역사적 사실이 동일하여 자료나 찬술 상의 문제를 지니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왜란과 호란이라는 전란 속에서 찬술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찬자 해안의 역사 인식과 함께 조선후기 불교사의 단편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해안의 역사의식은 그가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당시 불교계의 상황과 전란 속에서 형성되어 사적기에 반영되어 있다.
17세기의 역사학은 무엇보다도 7년간에 걸친 왜란과 1627년과 1636년 두 차례에 걸친 청나라의 침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조선의 토지가 황무지로 변했고, 면세전免稅田이 많아짐에 따라 국가재정이 빈곤해졌다. 아울러 조선 법제法制의 근본적 개혁을 주장한 실학사상의 발흥이 촉진되었고, 국토에 대한 애정, 지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사회 내부의 변화는 그동안의 역사의식이 변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15세기 국가통치제도와 경제력 정비를 목적으로 추진된 역사학과 중국사가 그 연구의 주요 대상이었던 16세기의 역사학과는 근본적으로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즉 당시 지식인들은 중국의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반면 동국사東國史에 대한 관심과 교육은 저조했다. 17세기의 역사학은 16세기와 같이 개인 학자에 의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성리학 이해의 진전으로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방식에 의해 역사를 재편찬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기도 했다. 아울러 외침을 당한 위기 속에서 역사를 통해 애국충신 의식을 강화시키는 것은 물론 조선의 영토와 군사적 요충지인 관방關防의 소재, 대외적 전투의 격전장 등에 대한 역사지리학적 연구가 있었다.
사진2. 대흥사사적
이러한 자국사自國史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불교계의 저술 작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해안이 사적기를 찬술한 이후 18세기 후반에는 정약용과 대둔사 승려들이 『대둔사지』를 찬술하고, 19세기에는 범해 각안梵海覺岸이 『동사열전』을 찬술했다. 이러한 불교계의 현상은 조선 전기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사실 고려 말 『삼국유사』가 일연에 의해 찬술된 이후 조선 건국과 함께 불교탄압의 진행으로 불교계의 찬술 작업은 승려의 문집이나 경전 간행과 같은 최소한의 서적인출 이외에는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전란의 참여로 사회적 재평가와 지위의 향상은 불교계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은 일반 역사서의 찬술과 함께 동일한 역사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불교사서의 찬술을 가능하게 했다.
먼저 해안은 사적기 찬술을 통해 불교 탄압과 전란으로 폐허가 된 사찰과 조선불교의 역사를 복원하고자 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진행된 조정과 유학자들의 불교 탄압과 그로 인한 불교계의 암울한 현상들을 목격했다. 더욱이 왜란과 호란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사찰과 조선불교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전적典籍들을 없애버렸다. 해안은 이러한 불교계의 내외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사명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사상과 문화발전에 공헌하였고, 선禪 수행과 교학으로 불교계를 지탱했던 고승들의 사상이 소멸되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의 불교사 인식의 기초는 이러한 혼란한 시대에 이미 추락해버린 조선불교를 부흥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불교계는 그동안 조정과 유학자들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지극히 어려운 세월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전란을 경험하고 난 이후 스님들의 참전과 희생으로 사회적 평가는 긍정적이었고, 불교계는 잠시나마 활력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잊혀져간 조선불교의 역사는 재조명되어 불교계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아의식을 성장시켰다.
해안이 정리한 고대불교사는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조선불교사를 인식하고자 했다. 사적기는 신라불교를 중심으로 한 고대불교사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불교 전래와 홍포弘布, 스님의 전기傳記, 사찰의 창건과 중건 등 전반적인 고대불교사가 중심이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개인적 찬술 경향의 결과지만, 전란의 영향이 강렬하게 작용한 듯 하다. 예컨대 조선불교사의 유구한 흐름을 중국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거나 전란 이후 자아의식의 형성으로 중국사와 한국사가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강조한 듯하다. 여기에는 왜란과 호한 이후 변화한 자아의식과 조선사에 대한 자주적 인식 또한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사진3. 금산사사적
해안의 사적기는 이러한 불교계의 주체성 확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해안은 인도에서 태동한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었고, 다시 조선으로 전래된 사실을 정리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불교가 인도나 중국불교와 대등하게 발전하였음을 표방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정통성과 함께 독자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었다. 해안이 조선 고대불교의 승전僧傳을 수록한 것 역시 조선불교의 역사와 자긍심 고취를 위한 것이었다. 결국 해안은 사찰의 역사와 인물, 그리고 그 문화를 당은 사적기를 통해 조선불교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표방하고자 했다.
한편 해안의 사적기는 전란 이후 찬술된 사적기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초기에 해당되며, 그 내용 또한 조선 후기 불교계의 동향을 반영하고 있다. 17세기 불교계는 전란으로 불타버린 사찰을 복구하는데 진력했다. 사찰 사적기 또한 이후 전개되는 각종 사원의 복원불사와 함께 사찰의 연혁과 전각, 고승의 행적, 사원경제 등 사원의 역사와 당시의 현황을 정리하려는 목적으로 찬술되었다. 사찰에 관한 사적기는 이전부터 찬술되었지만, 임란 이후 망실된 사원의 복원과 함께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더욱이 석존의 생애, 불교의 중국전래, 고대 조선의 불교전래와 홍포 등을 수록하여 조선불교사 인식의 범주까지 확대시켰다.
마지막으로 해안의 사적기는 이후 찬술된 불교역사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대둔사사적』은 비록 18세기 후반 다산 정약용과 그 영향을 받은 대둔사 승려들이 『대둔사지大芚寺志』를 찬술할 때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들 역시 해안의 『대둔사사적』을 저본으로 이용했다. 전란 이후 관련 전적이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그의 사적기는 훌륭한 참고자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찬술된 사지류寺誌類의 전형典型이 되었다.
19세기에는 범해 각안이 『동사열전東師列傳』을 찬술했다. 『동사열전』은 고대부터 조선말기까지 198인의 승전僧傳을 정리한 것으로 종합적인 불교역사서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이전 시기의 불교사서가 지닌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 가운데 고대승전은 『삼국유사』와 비문碑文을 기초로 찬술되었는데, 각 자료를 비교했을 때 해안의 사적기와 그 내용이 거의 동일함을 엿볼 수 있다. 『동사열전』의 고대승전 가운데 대부분이 해안의 사적기에 정리된 승전을 기초로 찬술된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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