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인도학 불교학 체계 수립한 학문의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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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1 년 5 월 [통권 제97호] / / 작성일21-05-04 15:23 / 조회5,341회 / 댓글0건본문
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 우이 하쿠주
일본의 평범한 마을에서는 누구라도 한 분야에 뛰어나면 장인匠人이라고 칭한다. 집을 잘 지으면 집짓기 장인, 농사를 잘 지으면 농사짓기 장인, 우동을 잘 만들면 우동 만들기 장인 등 그 방면에 뛰어나면 장인이라는 호칭으로 직업의 가치를 부여한다. 아마도 이는 일본 천태종의 조사 사이초(最澄, 767-822)가 수행자 양성제도를 기술한 『산가학생식山家學生式』에서 도심道心있는 자를 국보라고 칭하는 동시에 “경촌십매(經寸十枚, 금은보화)를 국보라고 하지 않는다. 한 구석을 비추는 것이 국보다.”고 설한 것에서 유래하는지도 모른다. 특히 불교계의 장인정신은 일본의 불교학 연구에서 잘 드러난다. 우이 하쿠주(宇井伯壽, 1882-1963, 사진 1·2)도 그 중의 한 명이다.
사진1. 우이 하쿠주.
인도철학 및 불교학을 비롯해 대승불교, 선사상사에서 쌓은 그의 방대한 연구 업적은 근대 일본 불교학계는 물론 세계 불교학계의 최고봉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이는 아이치현 출신으로 어릴 때 조동종 사찰인 동점사(東漸寺, 도요가와시 소재, 사진 3)에서 출가하여 후에 정식 승려가 되었다. 이노우에 엔료가 설립한 동경의 경북京北 중학교를 졸업하고, 동경대 문과대학에 들어가 다카쿠스 준지로의 지도로 인도철학을 전공했다. 다카쿠스의 문하에는 1년 선배인 기무라 타이켄(木村泰賢, 1881-1930)이 와있어 우이는 학문적 동지이자 라이벌로 평생 함께 같은 길을 걷게 된다. 다카쿠스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그들의 재능에 감탄했다.
우이는 문헌연구를 위한 주도면밀한 고증작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1913년 조동종 해외 유학생 자격으로 유럽에 건너간다. 독일, 영국에서 공부한 뒤 1917년 인도를 거쳐 귀국한다. 조동종 대학(현 고마자와 대학), 동경대 강사, 동북대와 동경대 교수를 역임했다. 그의 업적은 한 마디로 인도철학을 기반으로 불교학을 역사적,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는 점이다.
우이가 활동하던 시기는 일본이 대외 전쟁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던 때이다. 유학하던 시기 또한 유럽이 1차 세계대전으로 대혼란에 빠져들던 때이다. 이 와중에서도 일본불교계는 불법의 영속성을 위해 인재양성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폐불훼석의 고난을 불교학의 발전으로 상쇄시키고자 한 의도였다고 본다. 우이는 이러한 역사적 사명을 짊어질만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가 명성을 높이게 된 계기는 유학 중 영국에서 영문으로 발간한 『승종십구의론勝宗十句義論』이다. 우이의 발군의 제자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1912-1999)는 이에 대해 인도 고대의 바이쉐시카 철학(승론학파)의 산실된 원전을 한역대장경에서 찾아 연구 출판한 것으로 유럽의 원전 연구에 어깨를 견줄만한 성과라고 한다.
사진2. 우이 하쿠주, 広辞苑에서.
귀국 후 정열적인 첫 연구 성과는 『인도철학연구』(사진 4)였다. 1924년부터 30년 동안 전 6권을 발행했다. 주로 1권에는 승론학파, 인도 논리학; 2권에는 불멸연대, 연기설, 육사외도; 3권에는 8성도聖道, 『아함경』; 4권에는 승가, 아육왕(阿育王, 아쇼카왕), 『대지도론』; 5권에는 『섭대승론』, 『성유식론』, 인명론; 6권에는 진제眞諦 삼장三藏, 유가행유식파, 불타관 등을 실었다. 불교의 핵심 교설과 중요한 사상, 경론, 인물, 학파 등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테마가 총망라된 것이다. 특히 인명논리학은 서양논리학과의 비교를 통해 규명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불교의 철학화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일본 학계는 기무라의 『인도 6파 철학』과 함께 『인도철학연구』를 당시 최고의 연구 성과로 인정했다.
이후 『불교사전』(감수), 『인도철학사』, 『불교사상의 기초』, 『불교사상 연구』, 『불교철학의 근본문제』, 『대승불전의 연구』, 『대승장엄경론 연구』, 『실성론 연구』, 『유가론 연구』, 『유식삼십론 석론』, 『유식이십론 연구』, 『석도안 연구』, 『진나 저작의 연구』, 『서장대장경 총목록』(공저) 등이 있다. 특히 『선종사 연구』 3권은 자신의 학문적 길을 지켜준 국가, 부모, 스승,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는 인도철학과 불교 연구를 기반으로 대승불교사상, 중국불교에 이르기까지 그 폭을 넓혀갔다. 우이의 학문적 기반은 인도였으며, 일본 인도불교학 연구의 기반을 구축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또한 그의 문헌학적 엄밀성에 기반한 연구 방법론은 인도철학과 불교학 연구의 모범이자 기준이 되고 있다.
사진3. 동점사, 도요가와시 소재.
스에키 후미히코는 「일본 근대불교학의 전개와 문제」(2003)에서 동경(제국)대에서의 불교학의 발전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하는데 우이는 두 번째 단계에 속한다. 제1기는 인도철학(=불교학)의 전임강좌 개설 단계까지이다. 난조 분유, 가사하라 켄주를 필두로 ‘불서 강의’의 하라 탄잔, 범어학 강좌의 다카쿠스 준지로, 1916년 전임강좌를 담당한 무라카미 센쇼 등이다. 이 시기는 한문불전을 중심으로 유럽의 연구 방법론을 도입한 시기이다. 제2기는 전임강좌 개설부터 1945년 일본의 패망까지이다. 그 주인공은 기무라와 우이이다. 인도로부터 발원한 불교가 일본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흐름 속에 있다는 의식에 의거, 인도연구와 전통교학을 통합하고자 했다.
제3기는 패망 후이다. 미야모토 쇼손, 히라카와 아키라, 하나야마 신쇼, 나카무라 하지메 등이다. 나카무라에 와서는 인도철학이 곧 불교학이라는 일체성이 의문시되고, 불교의 다양한 역사성, 그 위에 다양한 연구 방법론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호교론적인 불교문헌학 연구에서 체계적인 교리, 사상 연구, 그리고 객관적, 실증적 사상사 연구로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1951년 창립된, 불교학자들의 등용문인 일본인도학불교학회는 3기 세대들이 주도한 것이다.
우이는 1기의 선배들처럼 일방적으로 유럽의 학풍을 도입한 것만이 아닌 불교연구의 독자성을 구축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전쟁 통의 유럽을 전전하면서 만난 학자들을 통해 동양학으로서의 자기화의 길을 모색했을 것이다. 기무라 기요타카는 우이의 학문적 의미는 유럽 유학을 통해 “역사적 시야에 서서 문헌학 방법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일본 불교연구의 백년」, 2005)이라고 평가한다. 우이가 이국에서 대면한 학자들은 당시 유럽 불교학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사진4. 인도철학연구 1-6권.
먼저 우이가 최초로 접한 학자는 독일의 리차드 가르베였다. 그는 상키야 학파 연구에 정평이 있었다. 기무라 타이켄은 가르베의 『상키야 철학』에 대해 자료나 출처의 정확성 등 필적할 연구가 없다고 한다. 가르베는 힌두교의 『바가바드기타』 독어 번역, 인도사상과 기독교의 상호 영향 관계를 연구한 『인도와 기독교』를 출판했다. 우이는 가르베로부터 성실하게 팔리어는 물론 인도문헌학을 배웠다. 이미 독일에는 영국의 모니엘·윌리암 저 『산스크리트-영어 사전』과 필적할만한 『산스크리트-독일어 사전』 7권이 있었다. 이는 튀빙겐 대학의 발터 루돌프 로트와 옷토 뵈틀링크가 편찬한 것이다. 당시 독일 괴팅겐 대학의 인도학 교수는 헤르만 올덴베르크였다. 베다와 팔리어 율장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다. 그의 『붓다: 그 생애·사상·교단』은 실증적 역사 연구의 성과였다. 우이도 훗날 그를 만났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우이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인도국局 도서관원으로 인도학 및 티베트학 전문가인 프레데릭 윌리암 토마스를 만났다. 그의 도움으로 『승종십구의론』을 출판했다. 토마스는 후에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특히 아쇼카왕 비문과 스타인본의 티베트문헌에 정통했다. 우이는 당시 인도를 식민지화한 영국의 인도학 연구의 수준을 눈여겨보았다.
그러나 한편, 독일의 폴 도이센의 인도철학 연구에 대해서는 공부가 깊어가면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도이센은 다카쿠스 준지로와 아네자키 마사하루의 스승이었다. 일본에서는 도이센의 막강한 영향으로 그를 최고의 스승으로 보는 풍조가 만연했다. 우이는 도이센의 문제점을 찾아 그의 학설을 철저히 비판했다. 도이센의 학설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일본학자들의 잘못을 바로 잡도록 권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근대 일본의 불교학자들이 그랬듯이 우이 또한 국수주의적 불교학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는 『불교범론』에서 “불교의 진정한 의의는 우리나라(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발휘되었다.”고 한다. 자서전인 자신의 소전小傳에서 불법을 흥륭시킨 고대 쇼토쿠聖德 태자의 17조 헌법 1절에 등장하는 불법승 3보에 대해 일본 왕 앞에서 강의한 것을 자랑으로 삼으며, 조동종에서는 처음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천황제 국가의 그늘에서 학문적 성과를 쌓았으며, 국가의 녹에 대한 보은을 되새긴다. 패망 전과 후의 민중과 사회를 보는 관점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이에게도 불교는 불타가 설한 고난의 인간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을 비켜간 우이는 인도철학 속에서 불교에 적당한 지위를 부여하며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오직 학문 일변도의 길을 걸었다. 그는 국립대학을 비롯해 수많은 불교계 및 일반 대학에서 강의했다. 학자들 모임 외에는 언론이나 사교장에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는 승려로서의 신분도 잊지 않았다. 대학에서 은퇴 후, 동점사의 34대 주지로도 복무했다. 그는 사찰의 법요식에 불참하는 일은 없었다. 보수를 일체 받지 않았으며, 전부 사찰에 다니는 아이들의 교육비로 사용했다.
우이는 박로博勞에 대해 즐겨 이야기했다. 박로는 주나라 때 말을 매매하던 사람의 이름이다. 좋은 값을 받기 위해 말의 좋고 나쁨을 잘 구별해야 했다. 말 전문가인 셈이다. 우이는 말을 호수까지는 데려갈 수 있어도 박로라도 물을 먹이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부모나 스승이 도와서 학교를 보내도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세속적인 권력이나 명예를 탐하지 않고, 학문 외길을 걷는 것은 사명감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교육의 기본은 동기유발에 있음을 자신을 미루어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의 불교문헌학이 세계적 반열에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불교를 통해 삶의 본질을 꿰뚫도록 하는, 깨어있는 사장師匠의 훈도를 계승하는 전통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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