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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
숙고와 수행의 힘 갖춰야 참 수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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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  2021 년 5 월 [통권 제97호]  /     /  작성일21-05-04 15:12  /   조회5,15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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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5) 두 가지 법[二法]

 

『앙굿따라 니까야』의 「둘의 모음」에서는 ‘두 가지 법[二法]’을 제시하고 있다. 붓다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법을 제시함으로써 어떤 것이 유익한 법[善法]이고, 어떤 것이 해로운 법[不善法]인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중생들을 교화함에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붓다가 제시한 두 가지 법을 통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왓자-숫따(Vajja-sutta, 罪過經)」(AN2:1:1)에서 붓다는 두 가지 죄가 될 만한 허물[罪過]에 대해 말했다. 두 가지 죄가 될 만한 허물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금생에 과보를 받는 허물이고, 다른 하나는 내생에 과보를 받는 허물이다. 전자는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 왕에게 끌려가 온갖 형벌을 받는 것이다. 현대어로 말하면 범죄자가 교도소에서 죄 값을 치르는 것이다. 후자는 어떤 사람이 몸과 입과 뜻으로 나쁜 행위를 저질러 내생에 악한 과보를 받는 것이다. 즉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금생과 내생에 받게 되는 허물을 두려워하는 자는 반드시 모든 허물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AN.Ⅰ.47-49)

 

출가자가 갖추어야 할 두 가지 법은 ‘부끄러움(hirī, 慚)’과 ‘창피함(ottappa, 愧)’이다. 이것을 ‘양심’과 ‘수치심’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빨리어 히리hirī와 옷땁빠ottappa 둘 다 ‘부끄러움’이라는 뜻이다. 한역에서는 참괴慚愧로 번역한다. 반대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 즉 ‘부끄러움 없음(ahirīka, 無慚)’과 ‘창피함 없음(anottappa, 無愧)’이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있음을 흰색에 비유하고, 부끄러움 없음과 창피함이 없음을 검은색에 비유했다.(AN.Ⅰ.49-51)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는 개선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개선될 가능성이 없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 특히 과대망상증 환자는 사실보다 과장하여 터무니없는 헛된 망상 속에 살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정치인과 종교인 중에 과대망상증 환자가 많다.

 

 「바리야-숫따(Bhariyā-sutta, 婦人經)」(AN2:1:9)에서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밝은 법이 있으니, 그것은 세상을 보호한다. 무엇이 둘인가? 부끄러움과 창피함이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러한 두 가지 밝은 법이 세상을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어머니라고 혹은 이모, 외숙모, 스승의 부인, 존경하는 분의 부인이라고 [존경심으로 대하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이 뒤범벅이 되었을 것이다. 마치 염소, 양, 닭, 돼지, 개, 자칼처럼.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밝은 법이 세상을 보호하기 때문에 [나의] 어머니라고 혹은 이모, 외숙모, 스승의 부인, 존경하는 분의 부인이라고 [존경심으로 대하는 것을] 본다.”(AN.Ⅰ.51)

 

이 경에서 붓다는 인간사회의 윤리・도덕의 기초가 바로 ‘부끄러움과 창피함’임을 밝히고 있다. 만약 인간에게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없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있기 때문에 사회질서가 유지된다. 그러나 짐승들은 오직 본능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윤리나 도덕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자기를 낳아준 어미나 자식 혹은 형제간에도 짝짓기를 한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갖고 있지만, 간혹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없는 인간이 나타나 사회질서를 무너뜨린다. 만약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없는 자가 승가에 합류하게 되면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승가에 입단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먼저 그의 정신상태가 올바른지 반드시 검증해야 할 것이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둘의 모음」에서는 ‘두 가지 힘’을 제시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고, 둘 모두를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발라-숫따(Bala-sutta, 力經)」(AN2:2:1)에 의하면, 두 가지 힘이 있다. 이른바 숙고paṭisaṅkhāna의 힘과 수행bhāvana의 힘이다. 숙고의 힘이란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나쁜 행위를 저지르면 금생이나 내생에 그 과보를 받는다. 이와 같이 생각하여 몸과 입과 뜻으로 나쁜 행위를 저지르지 않고 좋은 행위를 닦아서 자신을 청정하게 만든다. 이것을 일러 숙고의 힘이라 한다. 수행의 힘이란 [일곱 단계의] 유학有學들의 [지혜의] 힘을 말한다. 왜냐하면 유학의 힘을 얻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불선법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러 수행의 힘이라 한다.(AN.Ⅰ.52)

 

 한편 이 경에 대응하는 『잡아함경』 제26권 제661경에서는 생각하는 힘[數力]과 닦는 힘[修力]으로 나타난다. ‘생각하는 힘’이란 택력擇力이라고도 하는데, 곧 사고하는 힘을 말한다. 즉 거룩한 제자가 혼자 고요한 숲 속이나 나무 밑에서 ‘몸으로 현세에 나쁜 짓을 하면 후세에 나쁜 과보를 받는다. 그러므로 몸으로 나쁜 행을 끊고 몸으로 착한 행을 닦아야 한다.’ 이렇게 사고하는 것을 ‘생각하는 힘’이라고 한다. 만약 비구가 생각하는 힘을 배우고 거룩한 제자로서 생각하는 힘을 성취하면, 그것을 따라 닦는 힘을 얻을 것이요, 닦는 힘을 얻고 나면 닦는 힘을 원만하게 갖추게 될 것이다.(T2, p.184b)

 

이 경에서는 생각하는 힘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닦는 힘이 뒤따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두 가지 힘 중에서 숙고의 힘이 앞서고 나중에 수행의 힘이 뒤따른다. 팔정도八正道 중에서 정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를 강조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발라-숫따」에서 말하는 ‘유학들의 힘sekhānaṃ bala’이란 일곱 단계의 유학들의 지혜ñāṇa의 힘을 말한다. 유학의 일곱 단계란 수행의 계위階位인 사향사과四向四果 중에서 앞의 일곱 단계를 말한다. 이른바 예류향・예류과, 일래향・일래과, 불환향・불환과, 아라한향이다. 예류향, 일래향, 불환향, 아라한향을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라고도 한다. 마지막 아라한과는 무학(無學, asekha)에 속하기 때문에 제외된다. 이 경에서는 유학들의 지혜의 힘을 수행의 힘이라고 했다.

 

다른 경(AN2:2:2)에서는 깨달음의 일곱 가지 구성요소[七覺支]를 닦는 것을 수행의 힘이라고 했다. 즉 ①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念覺支]를 닦는다. ②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擇法覺支]를 닦는다. ③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精進覺支]를 닦는다. ④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喜覺支]를 닦는다. ⑤경안의 깨달음의 구성요소[輕安覺支]를 닦는다. ⑥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定覺支]를 닦는다. ⑦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捨覺支]를 닦는다. 이것을 일러 수행의 힘이라 한다.(AN.Ⅰ.52-53)

 「자나-숫따(Jhāna-sutta, 禪定經)」(AN2:2:3)에서는 네 가지 선정[四禪定]에 머무는 것을 수행의 힘이라고 했다. 이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수행의 힘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고,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이선第二禪에 들어 머문다.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문다.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禪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삼선第三禪에 들어 머문다.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사선第四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수행의 힘이라 한다. 이것이 두 가지 힘이다.”(AN.Ⅰ.53)

   

위에서 말한 깨달음의 일곱 가지 구성요소[七覺支]를 닦는 것이나 네 가지 선정[四禪定]을 닦는 것은 말만 다를 뿐 모두 ‘수행의 힘’을 의미한다. 특히 「자나-숫따(선정경)」에서는 수행의 힘이 곧 선정력임을 강조하고 있다. 선정력이란 다른 말로 집중력을 말한다. 집중력에서 지혜가 나온다. 숙고의 힘과 수행의 힘이라는 두 가지 법을 갖추어야 진정한 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 숙고의 힘이란 올바른 사유를 말한다. 논리에 맞는 합리적인 사고가 이에 해당된다. 올바른 사유에서 올바른 행동이 나오기 때문이다. 깊이 사고한 후에 행동함으로써 모든 악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꼬깔제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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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에서 학사와 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샤카무니 붓다』, 『잡아함경 강의』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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