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다도]
차의 맛은 텅 빈 골짜기처럼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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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룡 / 2021 년 4 월 [통권 제96호] / / 작성일21-04-05 11:08 / 조회6,451회 / 댓글0건본문
한국의 茶道 4 | 돈수 스님의 茶論
차와의 인연을 밝히며 필자의 첫 번째 차 스승인 효당 스님의 가르침을 2회에 걸쳐 소개했다. 이번 호부터는 두 번째 차 스승인 돈수頓修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970년 일타 스님(주1)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득도得度한 돈수 스님은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으나, 수좌首座(주2)들 사이에는 많이 알려진 분이다. 1994년 3월, 그동안 내가 연구하고 경험한 것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에, 21년간 봉직한 한국식품연구원에서 국립 상주대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느 스님이 상주는 안동과 가까우니 안동 봉정사 지조암(주3)에 주석하고 있는 돈수 스님을 찾아뵈라는 말씀을 하셨다. 사실 처음 뵙는 분을 혼자서 찾아 가기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차일피일하다가 이러다가 못 뵐 것 같아 그냥 막무가내로 길을 나섰다. 이것이 필자와 돈수 스님과의 인연의 시작이다.
돈수 스님의 차
돈수 스님의 차에 대한 생각을 잠시 소개한다. 스님의 주옥같은 말씀은 많고도 많지만, 그 중 마음을 울리는 차에 대한 몇몇 말씀을 두서없이 전한다.
“‘茶’자를 파자破字하면 풀 초(艹) + 사람 인(人) + 나무 목(木)이다. ‘艹’는 ‘풀’, ‘풀이 파릇파릇 나다’, ‘green’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원초적 생명력, 나아가 건강健康한 육체肉體를 도모한다. 차에는 여러 가지 이로운 성분들이 있어서 차를 마시면 건강에 이롭다는 것이다. 그러면 얼마나 건강한 육체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인가? 거기에는 역시 茶자가 답을 해 준다. 즉, 茶는 ‘艹’ + ‘八十八’ 이다. 20+88=108이 된다. 차를 마시면 건강하게 108세까지는 살 수 있다.”
“‘人’은 사람을 뜻한다. 사람은 도덕적 가치道德的價値와 지적 가치知的價値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도덕적 가치는 우리 조상들의 삶의 태도에서 역사를 인식하는 이른바 전통 윤리傳統倫理와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인 일반 윤리一般倫理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지적 가치는 다양한 문화 현상의 경험에서 얻을 수 있다. 차는 단순 음료가 아니라 서정성抒情性을 갖는다. 서정성이란 시적 감응詩的感應에 사물에 대한 애정愛情이 더해진 것을 말한다. 선비들에게서 애정을 갖게 되니 차시茶詩가 나오고, 스님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니 차게茶偈, 선시禪詩가 나온 것이다. 선시는 차의 연기론적 표현의 극치이고, 선禪은 존재의 근본 원리를 밝히는 것이니 그래서 차선茶禪을 이룬다.”
“‘木’은 나무를 뜻한다. 나무는 우리 인류에게 항상 베풀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항상 산소를 공급해 주고, 종이를 만들어 인류의 문화가 발전하게 하고, 집을 지어 살 수 있게 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고, 시원함을 주는 등, 나무는 항상 우리에게 고마움을 주고 있다. 그래서 나무는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차는 위의 세 가지 요소인 풀, 사람, 나무의 특성을 조화롭게 지니고 있다.”
“차실茶室의 문은 작을수록 좋다. 일본 사람들은 원래 다실 내에는 칼을 차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문을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차실의 문은 ‘단절斷絶’을 의미한다. 잡다한 세상사와의 단절, 불합리와의 단절, 적절하지 못한 것과의 단절이다. 차실 안은 ‘깨끗한 곳[淨土]’이고 밖은 ‘모순의 세계[此土]’이다. 정토 안에서는 생멸이 없다. 중국차에서 차를 한번 씻는[美人洗塵]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정토 안에서는 이미 번뇌가 없으니, 씻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 생각이었다.”
“술은 양적陽的인 것이다. 그래서 술은 폭력을 동반하기 쉽다. 술은 직선적이다. 술잔을 줄 때에도 바로 준다. 따라서 술 문화는 직선 문화라 할 수 있다. 술을 마시면 기운이 위로 올라간다. 우리도 모르게 모든 것이 뒤집어진다. 그래서 잔을 보관할 때도 엎어 놓는다. 반가운 손님이 오면 첫잔은 마시고 뒤로 던져서 깨뜨린다. 그러니 잔의 중요성이 적고 잔을 보관하는 잔탁盞托(주4)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찻잔은 바로 재어 놓는다. 차는 기운을 내리고 고요한 것이다. 차는 음적陰的인 것이고, 그래서 차 문화는 곡선적이다. 차는 조화로운 것(和, harmony)으로 잔탁이 필요하다. 찻잔은 마치 책을 몇 권 쌓아 놓듯이 3~4개씩 바로 재어 놓는다.”
차의 맛
돈수 스님은 그림을 잘 그린다. 정초에 세배가면 한 장씩 주는 그림이 예사롭지 않은데 알고 보니 남종화(주5)의 대가 의재 허백련(주6)의 문하에서 화선지 여덟 트럭 정도를 소비할 만큼 그림 공부를 많이 하셨다고 한다. 스님을 졸라 글 한 토막과 그림 한 장으로 구성된 67편을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그 책의 제목이 『차의 맛은 텅 빈 골짜기처럼 고요하다』이다.
「수졸守拙」 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옛 사람의 말을 빌어 집주위에 대[竹]를 심어 내 어지러운 생각을 평온하게 하고, 탕관湯罐에는 항시 찻물이 끓어 내 마음을 기쁘게 한다. 차의 맛은 텅 빈 골짜기처럼 항시 고요하고, 차의 성품은 무심하여 마치 흐르는 구름과 같은 것이다.”고 하셨다.
또한 차를 권하는 글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 돈수 스님이 송나라 때의 정치가요 학자인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독락원기獨樂園記」를 차에 맞게 일부 수정 보완하여, 164자로 된 ‘차를 권하는 글[勸茶文]’을 쓰셨다. ‘권차문’이라는 제목처럼 차인들에게 널리 읽혀지기를 발원하셨다. 혹 아래 권차문의 내용에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 허물은 오롯이 기록을 잘못한 필자에 있음을 밝힌다.
勸茶文(주7) 차를 권하는 글
夫平日行茶事時 대저 평소에 찻일을 행할 때
上師聖人 위로는 성인을 스승으로 삼고
下友群賢 아래로는 뭇 어진 사람을 벗으로 삼는다.
窺仁義之原 어질고 바름의 근원을 엿보고
探禮樂之緖 예락의 실마리를 더듬었다.
自未始有形之前 스스로 모양이 비롯되기 전과
曁四達無窮之外 끝없는 공간 저편에 미치기까지
事物之理 사물의 이치가
擧集目前 눈앞에 드러나 있다.
可者學之 옳은 것은 배우고
未至夫可 아직 옳은 것에 이르지 않는 것은
何求於人 무엇을 사람에게 구할 것이며
何待於外哉 무엇을 밖으로 기다릴 것인가!
志倦體疲 마음(뜻)이 권태롭고 몸이 피곤하면
則煎取淸氣 곧 차를 달여서 그 맑은 기운을 취하고
執衽採藥 옷자락을 여미고 약초를 캐고
決渠灌花 도랑을 열고 꽃에 물을 대고
操斧剖竹 도끼로 대를 쪼개어
濯熱盥水 홈통의 물로 열을 씻는다.
臨高縱目 높은 곳에 임하여 눈이 가는 데까지 자유롭게 보고
逍遙徜徉 소요하고 거니는 것이니
惟意所適 오직 뜻을 쫒는 바라
明月時至 때에 이르러 밝은 달이 뜨고
淸風自來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옴이라
行無所牽 행하여도 집착함이 없고
止無所抳 그쳐도 막히는 바가 없으며
耳目肺腸 귀와 눈과 폐와 장도
券爲己有 모두 거두어들여 스스로의 소유로 삼아
踽踽焉洋洋焉 홀로 걷고 홀로 감이요 더없이 넓고 더없이 넓다.
不知天壤之間 하늘과 땅 사이에
復有何樂 다시 어떤 즐거움이 있어
可以代比也 가히 이것과 비교함을 알지 못한다.
因合而命之曰 그런 까닭으로 이를 명하여 가로되
飮茶獨樂 차를 마시며 홀로 즐거워함이며
又淸氣五臟眞供養 또 오장의 맑은 기운이 가득하니 참다운 공양이라 이른다.
스님께 차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차는 차다’고 하셨다. 다만 ‘차는 동북아 사람들의 정체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고 덧붙였다. 차의 맛이 텅 빈 골짜기처럼 고요해질 때까지 차를 마셔 보려 한다.
주)_
1) 일타日陀 율사律師, 1929-1999, 법호 동곡東谷, 삼여자三餘子.
2) 원래 고려시대 교종의 법계 가운데 하나였으나, 보통 선원禪院에서 참선하는 스님을 일컫는 말.
3) 고려시대 건물인 극락전이 있는 봉정사(세계문화유산)의 서쪽에 있는 작은 암자.
4) 잔탁盞托은 잔을 보관하는 것이고, 비슷한 말인 차탁茶托은 찻잔 받침을 의미한다.
5) 남종화南宗畵는 남종 문인화南宗文人畵라고도 하는 산수화의 한 분파로 북종화에 대비됨.
6)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은 해방 후 국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한 한국 화가이다.
7) 丙戌正月吉日 頓修禪師口述 梵江居士汗書[병술(2006)년 1월 좋은 날 돈수 스님이 말씀하신 것을 범강 거사가 땀을 흘리며 받아쓰다]. 계간 『차생활』 제2권 제4호 pp.6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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