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근대 한국불교 대표하는 학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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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1 년 2 월 [통권 제94호] / / 작성일21-02-05 11:30 / 조회5,905회 / 댓글0건본문
*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2 - 권상로
권상로(權相老, 1879-1965)는 초창기 한국 불교학 연구의 기반을 다진 승려 학자로서 호는 퇴경退耕, 또는 사불산인四佛山人이라고 했다(사진 1·2). 1879년 2월 28일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어릴 때 한학을 공부했다. 부모를 여의고 18세 때인 1896년 4월 문경 김룡사에서 출가했으며, 이력과정의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를 이수하고 1903년 문경 대승사에서 처음으로 강석을 열었다. 1906년 4월에 개교한 근대적 불교교육기관인 서울 명진학교에서도 짧은 기간이지만 신학문을 배웠다. 이후 만해 한용운이 세운 건봉사 봉명학교 운영에 관여했고, 경북지역 사찰들이 힘을 합쳐 김룡사에 설립한 경흥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쳤다. 1909년에는 근대기 최초의 종단인 원종圓宗에서 종무 편집부장으로 활동했다.
사진1. 권상로.
1911년에는 경기도 장단 화장사 화산강숙의 한문 교사를 거쳐 문경 대승사의 주지가 되었다. 1912년 1월부터는 『조선불교월보』 잡지를 창간하여 발행했고, 1917년에는 30본산 연합사무소에서 펴낸 『조선불교총보』의 편집부장을 맡았다. 또 이회광, 강대련 등 본사 주지들과 함께 3주에 걸쳐 일본불교의 실상을 시찰하고 왔다. 메이지유신 이후 문명개화를 추진해 온 일본불교의 근대화된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그는 다음 해에 결혼하여 대처승이 되었다. 이어 1924년 7월에서 1931년 5월까지 약 7년 동안 월간잡지 『불교』를 편집·간행했다. 1931년부터 1944년까지는 중앙불교전문학교와 그 후신인 혜화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1941년에는 새로 창립된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 종무원의 교학편수 상임위원을 맡았다.
그런데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까지 내선일체, 대동아공영권 등을 내세우며 강제된 일제의 전시체제 아래서 친일부역행위를 함으로써 학자로서의 생애에 큰 오점을 남겼다. 조선총독부가 기획하여 적극 추진한 심전개발운동에 참여한 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국민정신총동원 및 국민총력 조선연맹의 참사가 되었고, 조선임전보국단 창설에도 가담했다. 또 신문과 잡지에 「종교계의 임전체제」, 「대동아전쟁과 대승불교」 등의 글을 기고했으며 각종 시국 강연에 연사로 초빙되기도 했다. 이때 나온 책이 호국불교를 앞세워 불교도의 전쟁 참여를 독려한 『임전臨戰의 조선불교』(1943)였다. 이러한 친일 경력으로 인해 그는 해방 후 1949년 5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회부되었지만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60년이 지나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2009)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혔다.
사진 2. 경북 문경문학관의 '퇴경당 권상로 박사 기념관'에 있는 상像.
저명한 한국불교 학자이자 혜화전문의 교수였던 권상로는 1946년에 개칭된 동국대학에서 계속 교편을 잡았다. 1952년 부산 피난 시절에는 대학의 학장을 맡았고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동국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이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1962년 동국대 명예 철학박사 학위와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또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중앙불교연구원장, 현대불교사 사장 등을 역임하는 등 만년에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1965년 4월 19일 유명을 달리한 후 대한불교조계종의 대종사 법계를 받았다.
그의 저술로는 『조선불교약사』, 『조선선종약사』, 『조선불교사개설』 등이 있고, 한국불교 관련 사료집으로는 일본인 학자 에다 도시오와 함께 『조선왕조실록』의 불교 관계 기사를 뽑아낸 『이조실록불교초존』, 전국 지명의 유래와 변천을 밝힌 『한국지명연혁고』, 6,300개가 넘는 전국 사찰의 연혁 및 자료를 집성한 『한국사찰전서』 등을 남겨 관련 연구의 토대를 닦았다. 1947년에 펴내어 주목받은 『조선문학사』와 1970년대 후반에 간행된 『삼국유사』도 중요한 연구사적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많은 저작들은 『퇴경당전서』 총10권(1990)에 수록되었다.
권상로가 추구한 학문연구의 경향과 그 성과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1912년 자신이 주관한 『조선불교월보』에 인도와 중국, 한국과 일본의 불교사를 간략히 개관하였고, 일본 근대 불교사학의 개창자인 무라카미 센쇼의 『불교통일론』 일부를 번역·수록했다. 무라카미가 제시한 연구방법론은 ‘주석, 비평, 역사, 비교’ 연구였다. 문헌 실증주의에 의한 역사학적 접근은 근대 불교연구의 핵심 방법론이었는데, 권상로에 의해 이른 시기에 국내에 소개된 것이다.
1910년대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한국의 역사 문화, 민속과 종교 등에 대한 문헌 및 유물 조사가 전략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이는 식민통치를 위한 학술종교 조사사업의 일환이었지만 한국불교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집성과 축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조사를 위한 기초 자료로 1911년에 『조선사찰사료』와 「조선불교관계서적해제」가 먼저 만들어졌고, 1910년대 후반에는 문헌 수집과 정리를 토대로 한 가시적 연구 성과가 나올 수 있었다. 그 첫 번째 결실이 바로 권상로의 『조선불교약사』(1918)이다.
『조선불교약사』는 ‘간략한 역사’라는 제목처럼 한국불교사의 주요 사건과 인물 관련 기록을 뽑아서 시간 순서대로 기술하고 저자의 해석과 평가를 붙인 편년체 사서이다. 이 책은 체계를 갖춘 주제별 서술은 아니지만 삼국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전 시기를 다룬 근대기 최초의 한국불교사 개설서이다. 권상로는 범례에서 승려교육을 위해 이 책을 집필했으며, 자료 수집의 어려움과 독자의 수준 등을 고려해 계통적 편성이 아닌 편년체 방식을 적용했다고 밝혔다. 본서는 삼국, 고려, 조선의 3편, 108항목에 걸쳐 한국불교의 역사 전체를 다루고 있다. 1편에서는 불교 전래를 기점으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불교의 사건, 인물, 사찰과 사적 등을 39개 항목에 걸쳐 정리했다. 2편은 34개 항목에서 고려불교의 주요 사건, 제도, 인물 등에 대해 서술했다. 3편은 35개 항목으로 조선의 불교의례와 사찰 중창, 승려의 행적과 제도 변화 등을 다루었다.
부록의 「제종종요」는 천태종, 화엄종, 법상종, 선종 등 동아시아 불교 각 종파의 연혁과 교리, 한국에서의 전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간추린 것으로, 일본학계의 종파불교 이해를 토대로 하여 한국불교의 종파 및 교단사를 추가해 작성했다. 이어 「불조약계」에서는 18세기 후반에 나온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에 의거해 인도에서 중국, 조선으로 이어져 온 선종의 전등 계보를 도표로 나타냈다. 여기서는 17세기 전반에 정립된 임제태고법통을 조선시대 법맥 계승의 기준으로 삼았다.
『조선불교약사』 이후 20여 년 만에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해서 내놓은 책이 『조선불교사개설』(1939)이었다. 여기서 권상로는 한국불교사의 전개를 다음과 같이 시대별로 구분했다. 삼국 및 통일신라는 ‘불교향상시대’, 고려는 ‘불교평행시대’, 조선은 ‘불교쇠퇴시대’, 근대는 ‘갱생과도시대’로 특징지은 것이다. 먼저 고대는 불교 종파와 대표 학승을 중심으로 정리했는데, 고구려 출신 보덕의 열반종, 신라 자장의 율종, 원효의 종합불교와 의상의 화엄종, 유식 종파인 유가종과 진표의 점찰법, 중관 계통의 법성종, 밀교 계통인 명랑의 신인종 등을 다루었다. 이어 통일신라 후반에 선종이 유입되어 구산선문이 성립했다고 보았다.
다음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매우 융성했지만, 그 이면에는 불교계의 타락과 위축이 이어지면서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고 평가했다. 불교정책과 신앙, 대장경과 불교문화, 선종과 교종, 말기의 배불론 등이 집중 조명되었다. 이어 조선시대는 ‘압박 절정-중간 명멸-유지 잔천’으로 시기를 세분했다. 그는 역사상 유례없는 정책적 억압이 단행된 결과 교단은 겨우 명맥만 유지했고, 후기에는 불교가 국가와 민중 사이에서 정당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배척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도 참선, 강경, 염불 등을 통해 불교 전통이 단절 없이 이어진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않았다. 끝으로 근대의 종교정책과 제도 변화, 종단 설립과 불교계의 동향 등도 소개했다.
권상로는 학문의 외길만 걸은 것은 아니었고, 일찍이 1910년대 초부터 한국불교의 혁신을 위한 제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선불교월보』에 연재한 「조선불교개혁론-조선불교진화자료」(1912-1913)에서는 한국불교의 의타적·순종적 전통을 비판하고 과거의 구습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종교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격변하는 세계정세에서 불교계는 지금까지의 폐쇄성을 각성하고 투철한 시대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는 한국불교가 장차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진단이었다. 그가 제시한 처방은 불교의 평등주의와 보편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대 인도의 엄격한 계급주의 사회에서 평등주의를 제창한 석가는 세계 제일의 대혁명가이며, 불교의 불이不二와 원융이야말로 지극한 평등이고 궁극적 혁명이라는 것이 그의 논거였다. 다시 말해 자력과 타력을 겸행하고 종교와 윤리를 겸비한 평등하고 보편적인 종교가 바로 불교임을 자부하고 강조한 것이다.
권상로의 이러한 호교적 인식은 뒤에 호국불교의 선양으로 이어졌다. 『임전의 조선불교』(1943)에서 그는 계율의 조문에 어긋나도 목적과 동기가 올바르고 청정하면 계율을 지키는 것이며, 아무리 힘써서 불살생 등을 행해도 목적과 동기가 옳지 않고 깨끗하지 않으면 계율을 어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나라를 지키는 국방이야말로 계율을 수호하는 것이고 전쟁의 승리가 바로 성불이라고까지 하였다. 또 세속오계나 임진왜란 승군과 같은 호국의 사례를 들어서 계율의 현실적 적용을 명분으로 불교도의 전쟁 참여를 합리화했다. 비록 일제강점기의 전시체제였다고 해도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의 국체 수호를 위해 계율을 그릇되게 이해하고 그것을 선전한 것은 분명 잘못이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이와 함께 그가 중시한 태고법통과 1920년대 이후 주창한 조계종명, 도의종조론道義宗祖論 등이 불교계에 영향을 미쳐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헌에 명시된 종조 도의, 중천조 보조 지눌, 중흥조 태고 보우의 조합이 완성되는 데 그가 기여한 사실도 기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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