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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선산 도리사, 신라불교 초전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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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1 년 2 월 [통권 제94호]  /     /  작성일21-02-05 11:21  /   조회7,21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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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道尋蘭若

遇見桃李開 

 

 

도리사桃李寺는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에 있다. 삼국시대에 최초로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신라 땅에 처음 절이 지어진 곳이다. 고구려에서 신라에 불교가 전해졌기 때문에 같은 방향에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간다고 보면, 서울에서 충주를 지나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러자면 결국 새도 날아 넘기 힘들다는 험난한 새재 즉 조령鳥嶺을 조우하게 된다. 

 

조령을 걸어서 넘어가면 조령관鳥嶺關과 조곡관鳥谷關 그리고 주흘관主屹關을 차례로 지나 문경에 도착하는데, 이곳 문경에서 더 남으로 내려가면 옛 선산善山지역인 구미에 이른다. 불의한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쿠데타에 저항하며 금오산金烏山 아래로 내려온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이 학문을 펼쳐나간 곳이다. 엄혹한 시대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선생과 뜻을 같이 하며 영남 유학과 인재들을 배출해내게 되는 조선 도학道學의 요람이 되는 땅이다. 

 


사진 1. 극락전. 

 

요즘이야 자동차로 바로 구미에 가니 새재를 넘을 필요는 없다. 반면에 오늘날 새재는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잘 가꾸어져 있어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높이 빼어난 주흘산主屹山과 조령산鳥嶺山의 사계절 풍광과 운치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로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이 길은 옛날 개성이나 한양에서 영남지역으로 오르내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연들이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하고,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하여 그 많은 선비들이 과거 시험을 보러 오르내린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낙동강과 만나 선산으로 들어오면 먼저 말 그대로 도道를 연 도개읍道開邑과 도개리를 지나게 된다. 여기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 구미시가지를 통과하여 낙동강을 건너 송곡리로 접어들어 그 옛날 냉산冷山으로 불린 태조산太祖山을 향하여 가면 길가에 일주문一柱門이 장엄하게 서 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여기서부터는 차로 가는 것 보다 걸어서 가는 것이 산사를 찾아 가는 맛을 듬뿍 느낄 수 있고, 그 옛날 이곳을 따라 도리사로 오가던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만들어간 역사를 되새겨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다. 길재 선생도 10살 때 이곳 도리사에서 처음 글을 배웠다고 한다.

 


사진 2. 화엄석탑. 

 

도리사 경내로 들어서면 오래된 ‘극락전極樂殿’(사진 1)과 ‘태조선원太朝禪院’이 오래된 터를 지키고 있다. 도리사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은 없다. 고색창연한 3칸 팔작지붕의 ‘극락전’에는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1645년에 목조로 조성한 좌상이 있다. 현재 법당은 건립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양식을 갖추고 있고 고졸한 모습이 참배객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든다.  

 

극락전 앞에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 고려시대 석탑인 화엄석탑華嚴石塔이 서 있다. 전체 모습을 보면 5개 층을 이루고 있는데, 세로로 긴 돌을 연속으로 이어 사면으로 기단을 구성한 다음 1층과 2층의 탑신은 작은 돌을 벽돌 쌓는 방식으로 쌓아 올리고, 맨 위에는 연꽃을 새긴 보주를 얹어 놓았다. 이런 형태의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같은 것을 찾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인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사진 2).

 

극락전 뒤에는 높이 1.3m의 석탑으로 석종石鐘의 모양을 한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이 있다.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도浮屠의 양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종형 부도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사리탑은 고졸하게 보이면서도 자세히 보면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 사각형의 기단 위에 탑신과 연꽃봉오리 형태의 보주寶珠를 조각하였는데, 상층 지대석의 네 귀퉁이에는 사자 머리를 새기고 그 중간에는 향로香爐를 새겼다. 탑신의 위와 아래는 모두 돌아가면서 연꽃잎을 연이어 새겼는데, 꽃잎들이 서로 겹쳐지게 한 것이 특이하다고 평가한다. 보주에는 다섯 개의 원을 새기고 각 원안에 ‘世尊舍利塔’이라는 글자를 한 자씩 새겨놓았다(사진 3). 불교가 힘들던 시절에 산 아래 폐사된 석종사 부근에서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채로 나뒹굴던 것을 인근 사람들이 도리사의 사리탑이라고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사진 3. 세존사리탑. 

 

세존사리탑에서 돌아서면 소박하고 고졸한 멋이 느껴지는 건물이 눈에 띄는데, 이는 옛날 도리사가 어려운 형편에 처했을 때 법당 이외에 도리사를 대표한 ‘태조선원’이다. 정면 7칸, 측면 8칸 규모의 ‘ㄷ자’형으로 된 구조인데, 말 그대로 선방으로 수행하는 납자들이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진리를 추구하던 수행처이다. 이 태조선원의 건물에는 ‘도리사’라는 현판과 함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선생이 전서篆書로 멋있게 쓴 ‘태조선원’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는데, 어려운 시절 법당과 이 건물이 절과 선원을 겸했던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사진 4. 태조선원. 

 

불교 사찰을 보면, 요즘 세운 건물은 웅장하여도 크게 공감이 가지 않는 반면 이렇게 소박하면서도 수수한 건축물에 더 정감이 가는 것은 그곳에서 지낸 사람들 때문이라 생각한다. 돈을 잔뜩 들인 휘황찬란한 건물들이 있어도 변변한 부도탑 하나 없는 곳은 그저 처량하게만 보이고, 아예 건물은 없어져도 이끼 낀 부도탑들이 메운 폐사지에서 넉넉하고 가슴 가득한 쾌활함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리라. 절 살림이 넉넉지 않던 시절에 그래도 없는 살림에 좌선 수행하겠다고 온 납자들의 그 형형한 눈빛들이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이 선원을 에워싸고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수행을 하고 한 시대를 들었다 놓았다 한 선지식 전강(田岡, 1898-1975) 대선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여전히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고, 어느 때 한철 여기서 수행한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이 곧 문을 열고 나오는 것만 같다. 전강선사의 강설은 다행스럽게 현재도 녹음된 당시의 육성이 생생히 전해오는데, 도학자道學者들이 어떻게 수행하고 참선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관해 새벽부터 말씀을 풀어놓으시는 스님의 목소리에 취해 이를 들으며 여러 밤을 지새운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는 전강 선사의 녹음된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 옛날 장삼을 휘휘 날리며 죽어가던 조선의 선맥禪脈을 다시 힘차게 뛰게 만든 경허(鏡虛, 1849-1912)대선사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곤 했다(사진 4).

 


사진 5. 적멸보궁 계단. 

 

아래쪽에서 위로 올라가면 근래 봉안한 아도화상 좌상을 지나 맨 위쪽에 있는 적멸보궁寂滅寶宮에 이른다(사진 5). 부족한 공간에 지어 오르막 계단이 가파르다. 적멸보궁 뒤편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1과가 새로 조성된 ‘석가세존사리탑釋迦世尊舍利塔’에 봉안되어 있다. 이 탑은 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새로 조성한 것이다. 팔각원당형부도八角圓堂形浮屠를 본 따서 정방형 지대석 위에 팔각 탑신을 세웠는데, 기단에는 용을 조각하고 탑신에는 사천왕상을 새기고 상륜부의 귀꽃에는 여래상을 새겼다.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다. 원래는 옮겨온 세존사리탑에 진신사리가 들어있었는지는 그 전에 탑의 아래를 깨어본 도굴꾼들 발견하지 못했는데, 1976년에 세존사리탑을 보수 공사하던 중 깨어진 아래 부분이 이중구조로 되어 있어 있음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도굴꾼들도 놓친 이중구조 속에서 8세기 중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육각사리함이 발견되어 그 속에 진신사리가 봉안된 사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금동육각사리함은 그 후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진신사리는 아도阿道 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올 때 가져온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 적멸보궁과 석가세존사리탑은 이 절에서 오래 주석하여 오신 법등法燈 대화상이 성심을 다하여 조성하였다(사진 6).

 


사진 6. 석가세존사리탑. 

 

적멸보궁에서 탁 트인 전망으로 저 멀리 보이는 낙동강과 들판을 보면, 자연은 그대로 인데 인걸人傑만 온데 간 데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옛날 불교가 들어오고 그 뒤에 유학儒學이 들어 올 때 신라의 승려와 유학생들이 새로운 지식과 철학을 공부하고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전력으로 공부하던 모습을 상상해본다. 새로운 지식과 철학을 공부하여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인간들이 영생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나라를 제시하고자 한 열망에 가득 차 이국 땅 힘든 곳에서 밤낮 없이 노력한 그들의 모습들을 떠 올려보면 그 치열한 삶에 고개가 숙여진다. 권력을 쥔 자들끼리 하루가 멀다 하고 큰 전쟁과 작은 싸움들을 하고, 승자는 패자를 짐승 같이 다루며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세상이 온존한 인간세상일리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는 했지만 언제 무슨 영문으로 죽을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공통된 염원이 영생불사永生不死였으리라.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영생불사를 꿈꾸며 사는데, 이 당시에도 이를 노려 온갖 허황된 얘기들과 주술들이 난무하고 혹세무민하는 언설들이 사람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있었다. 하기야 종교치고 영생불사를 내세우지 않는 경우가 드물지만 말이다. 생물학적으로 영생불사가 안되면 사후 부활을 내세우든가, 아니면 생물학적으로는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있어 불사한다고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형이상학적인 나의 ‘존재’를 설정하여 몸은 없어지지만 그 존재는 영원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형편에서 만 백성이 진리에 눈을 뜨고 평등하고 행복하게 사는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고자 뛰어난 불교철인들과 지식인들이 진리 탐구의 길에 뛰어들었다.  

 

신라에 불교가 언제 처음 전해졌는가 하는 점에 관하여는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 없어 여러 견해들이 분분한 형편이다. 제13대 미추왕(味鄒王, 262-284) 2년인 263년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 화상이 전했다는 견해, 19대 눌지왕(訥祗王, 417-458)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신라 땅으로 와서 지금의 선산인 일선군一善郡에 살고 있는 유력가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며 불교를 전했다는 견해, 21대 소지왕(炤知王, 479-500) 때 아도 화상이 세 사람의 시자侍者와 함께 신라로 와서 모례毛禮의 집에 있다가 아도 화상은 먼저 가고 시자들은 남아서 불교를 전했다는 견해,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신라로 와서 불교 신자 모례毛禮의 집을 중심으로 은밀히 교화를 펼쳐나갔다는 견해 등이 잇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고증할 방법이 없는 형편이다. 묵호자와 아도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와 다르게 보는 견해도 있다.

 


사진 7. 모례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실린 내용에 의하면, 먼저 ‘아도’라는 명칭부터 따져보아, 아도阿道는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도 하는데, 아도阿道를 아두阿頭라고 하면 ‘머리카락이 없는 승려’를 일컫는 일반명사이므로 아도는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소지왕(=비처왕) 때 신라에 들어온 고구려의 승려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반면 아도 화상을 아도我道라고 하면 「아도본비我道本碑」에 쓰여 있는 것처럼 위魏나라 사신이었던 아굴마我掘摩가 고구려에 왔을 때 고구려 여인 고도녕高道寧과 정을 맺어 그 사이에서 태어난 고구려의 승려라고 특정할 수 있다고 본다. 후자에 따르면, 아굴마의 아들인 아도는 5살 때 어머니에 의해 출가하였으며 16세에는 위나라로 가서 자기 아버지인 아굴마를 만났다. 그는 아버지에 의해 현창玄彰 화상의 문하에서 불법을 배우고 19살 때 고구려로 돌아왔다. 그러자 어머니인 고도녕이 그에게 신라로 갈 것을 권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그 나라는 아직 불법을 알지 못하지만, 앞으로 삼천여 달이 지나면 계림에 성왕이 나서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곳의 서울 안에 절터가 일곱 곳이 있으니, 하나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興輪寺]이요, 둘째는 삼천기[永興寺]이며, 셋째는 용궁 남쪽[皇龍寺]이요, 넷째는 용궁 북쪽[芬皇寺]이며, 다섯째는 사천미[靈妙寺]요, 여섯째는 신유림[四天王寺]이요, 일곱째는 서청전[曇嚴寺]이니 모두 전불前佛 때의 절터이다. 법수法水가 깊이 흐르는 땅이니 네가 거기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하면 마땅히 그 땅의 불교의 초석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아도 화상은 263년(미추왕 2) 신라로 들어가 불법을 펼치고자 했으나 어려워 속림續林에 있는 모록毛祿의 집에 3년을 숨어 있었다. 264년(미추왕 3)에 성국 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었는데 무당이나 의술을 가진 자도 낮게 하지 못하였는데, 아도 화상이 대궐로 나아가자 공주의 병이 나았다. 이에 왕이 기뻐하며 그의 소원을 들어주어 아도 화상은 천경림天鏡林에 띠풀로 지붕을 덮어 흥륜사를 창건한 뒤 그곳에서 설법하였다. 모록의 누이 사씨史氏는 아도 화상에게 귀의하여 신라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 그녀는 삼천기三川岐에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영흥사라고 하였다. 얼마 후 미추왕이 죽자 사람들이 아도 화상을 헤치려 하여 그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들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진 8. 아도화상상과 불교초전지 기념공원. 

 

「아도본비」의 내용만을 놓고 보면, 아도는 아굴마와 고도령 사이에서 태어난 고구려 승려로서 신라불교의 초전자라고 할 수 있지만, 「신라본기」와 「아도본비」에 등장하는 두 명의 아도는 서로 다른 사람임이 분명하고, 고구려 불교의 재전자인 동진에서 온 아도 역시 신라불교의 초전자 아도와는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눌지왕 때 신라에 온 묵호자墨胡子 역시 「신라본기」와 「아도본비」의 아도와 같은 인물로 확정할 수 없고, 나아가 백제 불교의 초전자인 마라난타와 아도를 동일 인물로 볼 근거도 없다고 한다. 결국 신라 미추왕 때 신라에 건너 온 아굴마와 고도령의 아들 아도, 고구려 불교의 재전자 아도, 그리고 소지왕(=비처왕) 때의 아도는 분명 다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불교 초전자인 마라난타와 신라 눌지왕 때의 묵호자의 외형은 비록 머리를 깎은 아두형일 가능성은 있지만, 고구려 불교의 재전자 아도와 소지왕 때의 아도와는 다른 인물이라고 한다. 

이에 관해서는 앞으로 전문가들의 연구가 진행되어 사실관계가 확정되기를 기다려볼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삼국유사』에 일연 스님이 써 놓은 얘기는 한번 읽어볼 만하다. 흥미롭다.

 

“아도 화상에 대해 서축인西竺人 즉 인도인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고 오나라 사람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한자어 ‘阿道’라는 말은 삼국사기에도 여러 명이 나오는데, 미추왕의 고조도 阿道이고, 박제상의 할아버지도 阿道葛文王이고, 일성왕 때 갈문왕으로 봉해진 朴阿道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에서 거슬러 올라가며 역사를 알려고 하면, 우선 기록이 충분하지 않아 사실을 확정하기 매우 힘이 들고 다양한 해석적 견해들이 분분해지는 이유이다. 아도 화상이 누구인지 확정하는 일부터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다. 아무튼 아도 화상이 묵으며 불교를 전파하였다는 집 주인인 ‘모례毛禮’도 ‘모록毛祿’과 같은 사람이고, 모례의 시주로 도리사를 지었는데, 아도 화상이 수행처를 찾던 중 겨울에도 복숭아[桃]꽃과 오얏[李]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을 도리사라고 지었다고 전한다. 모례의 집에 있던 우물로 전하는 우물은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사진 7). 그리고 구미시에서는 모례의 집터로 추정되는 장소 일대를 신라불교 초전지初傳地라고 하여 대대적으로 조성하여 불교성지와 같이 조성하여 놓고 있다(사진 8). 

 

여기서 궁금한 것은 아도 화상이 처음 불교를 전했을 때 무엇을 전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를 공인을 한 것을 보면, 고구려는 372년 소수림왕(小獸林王, 371-384) 2년에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357-385)이 사신使臣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불경佛經을 전한 것이 그 시초이며 초문사肖門寺를 지어 머물게 하였고, 2년 후인 374년에 동진(東晋, 317-420)에서 아도阿道가 들어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짓고 이에 머물게 했다. 백제는 384년 침류왕枕流王 1년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백제로 와 불교를 전하여 왕실에서 이를 수용하고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짓고 열 사람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신라는 527년 법흥왕 14년에 이차돈(異次頓, 503-527)의 순교가 있자 그간 신하들의 반대로 수용하지 못했던 법흥왕이 비로소 불교를 공인하였다. 

 


사진 9. 낙동강이 보이는 풍경. 

 

중국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불교가 전해지던 이 무렵 중국의 상황을 한번 본다. 중국에서도 불교가 언제 전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후한(後漢, 25-220) 때에 와서 안식국(安息國, 파르티아)의 태자 안세고(安世高, 2세기 중엽)와 월지국月支國 출신의 지루가참(支婁迦讖, Lokaksema, 2세기 중엽)이 불경을 번역하면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여 전진의 도안(道安, 312-385)과 도안의 제자인 동진의 그 유명한 혜원(慧遠, 334-416)이 불경을 활발히 연구하며 결사도 만드는 등 영향력을 넓혀나가던 시절이었다. 이들의 활동과 가르침이 한반도에 전해졌는지도 흥미롭다. 시기로만 보면, 중앙아시아 쿠차 왕국의 왕자인 구마라집(鳩摩羅什, 350-409, 344-413)이 후진(後秦, 384-417)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와서 대대적으로 불경을 번역하던 때도 이 시대였는데, 당시 번역된 불경이 한반도에 유입이 되었는지, 어떤 불경이 유입되었는지, 그리고 이를 제대로 가르쳤는지, 한역 경전을 누가 습득했으며, 과연 제대로 이해하였는지 등등 모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신라에서 본격적으로 불교가 국교로 된 것은 진흥왕(眞興王, 540-576)때이고 이때 승려로 출가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호국불교로 사찰들도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천재 불교철인인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이 태어나는 것은 아도 화상이 불교를 전하였다고 하는 시기로부터 대략 200여 년 후의 일이고, 신라가 불교의 전승기를 맞이하는 것도 그 이후의 일이다.

 

아도화상이 불교를 전했을 때, 신라에는 무속신앙이나 원시신앙이 있었다고 쳐도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은 영생불사이고 위험한 세상에서 복을 받을 수 없는가 하는 염원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과연 불교는 무엇을 말하였는지 궁금하다. 석가모니의 존재와 가르침이 있다는 사실을 전했는지, 업業에 따른 인과응보나 윤회에 대하여 말했는지, 새로운 기복신앙을 말했는지, 아니면 중국어로 번역된 불경의 지식을 전파하였는지, 아니면 그야말로 왕족과 귀족, 지식층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더라도 신라가 지식과 철학이라는 것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일까. 

 

중국에서는 천하가 혼란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221) 때 지금의 산동반도山東半島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제齊나라에서 수도 임치臨淄에 직하학궁稷下學宮이 만들어지고, 기라성 같은 천하의 지식인들이 모여 순우곤(淳于髡, BC 385-BC 305경), 맹자(孟子, BC 372-BC 289 추정), 장자(莊子, BC 369-BC 289경), 고자(告子, ?-?), 추연(鄒衍, ?-?), 노중련(魯仲連, BC 305-BC 245 추정), 순자(荀子, BC 298-BC 238경), 한비자(韓非子, BC 280?-BC 233) 등 백가쟁명으로 서로의 지식과 철학을 논하고 체계화시켜 가던 때가 기원전 4세기와 3세기 시대에 있었던 일이니, 아도 화상의 이런 일이 있은 때로부터 대략 700여 년전 일이다. 

 

플라톤(Platon, BC 427-347)이 「국가Politeia」와 「법Nomoi」을 쓴 때가 기원전 4세기이고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가 「정치학Politika」을 쓴 때도 그 시대였다. 그 간에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무엇을 생각했고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더해 감은 어쩔 수 없다. 태조산 중턱에서 눈앞으로 펼쳐진 산하를 바라보며(사진 9) 인간의 삶과 아직도 ‘국가의 실패’가 계속되는 이 나라에 대해서 또 생각해보았다. 지금까지 ‘좋은 나라’에 대해 탐구해온 헌법학자인 나는 솟아나는 여러 의문들로 머리가 여간 복잡하지 않았다. 도리사에서 머리가 복잡해지다니, 참으로 구제하기 어려운 중생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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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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