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불교를 모르면 한국을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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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 2021 년 1 월 [통권 제93호] / / 작성일21-01-15 09:49 / 조회6,291회 / 댓글0건본문
근대 불교사서史書 1 – 연재를 시작하며
1895년(고종 32) 3월29일, 고종은 스님들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단속하는 금령禁令을 해제하였다.『고종실록』에는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1842-1896)과 내무대신 박영효(朴泳孝, 1861-1839)가 건의했고 임금이 윤허允許했다고 되어있다. 이능화의『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는 일본 일련종日蓮宗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건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날 고종의 윤허는 한국근대불교사의 본격적인 서막을 알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사실 조선은 건국 이후 스님 수를 줄이고, 사원전과 노비를 몰수하는 불교정책이 진행되면서 도성출입금지령이 내려져 조선중기인 현종 대는 도성 안의 사찰을 헐어 서당書堂으로 고치도록 했고, 영조 대에는 사찰에 조상의 위패를 봉안하지 못하도록 엄단하기도 하였다.
스님의 도성출입이 다시 시작되고 난 후인 1896년 7월 불교계는 도성출입금지 해제를 주선했던 사노 젠레이의 노고를 치하하는 대법회를 마련하였다. 즉, 황제폐하의 만수무강과 나라의 중흥과 유신에 대한 업적을 기리는 대법회였다. 5월 5일 도성 안 원동의 북일영(北一營, 현재 동숭동 서울대 병원자리)에서 개최한 한일승려합동무차대법회韓日僧侶合同無遮大法會는 당시 북한산 승대장僧大將이었던 중흥사 주지 권재형權在衡과 남한산 승대장 이세익李世益을 비롯하여 화계사華溪寺·백련사白蓮寺·용주사龍珠寺 및 금강산 등에서 300여 명의 스님들이 운집했다. 아울러 외부外部·학부學部·농상공부農商工部 대신과 김홍집 총리대신의 대리 등 20여 명의 조정 고관이 참석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대표적인 지성이었던 이능화는 당시 참여했던 사람들이 “조선의 승려는 수백 년 동안 문외한門外漢의 신세였는데, 오늘에 와서 비로소 구름을 헤치고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로써 불일(佛日)이 다시 빛날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용주사의 취허就墟 스님은 사노 젠레이에게 감사장을 증정하기도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극히 비천하여 서울에 들어가지 못하기를 지금까지 5백여 년이라 항상 울적하였습니다. 다행히 교린交隣이 이루어져 대존사 각하께서 이 만리타국에 오시어 널리 자비의 은혜를 베푸시니 본국의 승도로 하여금 5백 년래의 억울함을 쾌히 풀게 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왕경王京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실로 이 나라의 한 승려로서 감사하고 치하하는 바입니다. 이제 성에 들어가면서 감히 소승의 얕은 정성으로나마 배례하나이다.”
스님의 도성 출입금지 해제에 대한 감회와 이후 불교계의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은 엇갈려 있다. 혹자는 “한국 불교계 안에 친일의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라고 했으며, 또 다른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불교계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환영받았던 해제 조치가 한국 불교발전의 계기가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친일적인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일본불교로의 예속화의 단서를 열었다는 점에서 불행한 사건이었다.”고 했다.
다카하시 도오루의 의견도 주목할 만하다.
“사노가 경성에 오랫동안 머무르지는 않았지만, 조선불교의 생기가 이미 다하여 승려에게 종승宗乘도 없고, 종지宗旨의 신조도 없음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일본불교의 종지로 개종케 하고, 일련종으로써 조선불교계를 통일하는 것은 반드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믿고, 이때에 조선 승려를 위한 파천황破天荒의 은혜를 베풀어 이로써 저들을 일본불교로 유인하는 계기를 삼고자 꾀하였다. 그리하여 기재奇才 사노가 붙든 것은 실로 조선 승려에 대한 입성해금入城解禁의 수행이다.”
다카하시 도오루(
주목할 부분은 한국불교의 생기가 다해 한국의 승려들에게는 종승도, 종지도 없다고 한 것이다. 이상은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가 일본인 승려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 이후 한국불교가 굴절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는 부정적인 시각과 해제 자체는 우리의 자체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견해의 대체적인 내용이다.
스님들의 도성출입을 두고 이렇게 장황하게 떠든 것은 우리는 우리 불교의 역사와 문화에 무지無知했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노에게 감사장을 준 그 상황을 친일이니 순진하다느니 지적한 것 역시 그 시절을 모르고 하는 공허한 말이다. 다카하시는 조선불교의 생기가 다했다고 했고, 종승도 종지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물론 조선불교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불교가 탄압과 소외받기 시작했던 조선건국 이후부터 정확히 해방 이후까지도 우리는 우리 불교 역사와 그 문화에 대해 문외한이었고 관심도 없었다. 유구한 불교 의식儀式과 신앙이 미신迷信으로까지 취급당하고, 경전은 절 뒷간에서 찢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최남선은 “한국의 역사는 정치법제, 교학문예라는 어떤 방면으로든지 불교와 불교도의 관련을 제외하고는 해석하고 밝게 판단할 수 없다.”고 했고, 이능화 역시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이 땅에 불연佛緣이 깊고 해인사의 대장경 또한 세계의 법보法寶가 되었다.”고 했다. 우리나라 고승의 전기를 수집한 박봉석(朴奉石, 1885-1910)이나 10여 년 동안 불교 사료를 찾아 팔도의 산천을 헤맨 권상로(權相老, 1879-1965) 같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지성知性들 역시 한국불교의 역사와 문화가 지닌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불교사 복원에 일생을 바쳤던 것이다.
연재는 조선시대에 편찬되고 찬술된 역사서와 사대부의 문집, 스님들이 찬술한 사적기寺蹟記 속의 불교사 등을 소개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불교를 탄압하고 소외시킨 기록들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왕과 신료들의 불교인식에 대한 민낯을 볼 수 있고, 사대부들은 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풍류와 함께 사찰의 역사를 기록하고 덕 높은 스님들의 비문을 그들의 문집에 옮기기도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기간 동안 유구한 불교 역사가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불교 기록을 뽑아 『대동선교고大東禪敎攷』를 찬술하기도 하였다.
“불교가 중국에서부터 해동海東에 이른지가 1천 7백여 년이나 된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 조정에서는 유교를 숭상하고 도道를 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도구로 삼아 300의 군현郡縣에 모두 부자(夫子, 공자)의 묘廟가 있어 멀거나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봄에는 거문고를 타고 여름에는 시를 읊어서 이단의 학學인 도교가 마침내 전해지지 않았고, 오직 승려들만 한갓 오래된 절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깊은 산골짜기의 우거진 숲속이나 큰 늪 가운데는 호랑이와 표범의 소굴이기도 하며 못된 무리들이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여, 부서簿書가 이르지도 못하며 소송이 있지도 아니하고 병식兵食을 의뢰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비구대중으로 진정시켜 길이길이 큰 재난에 보호받게 하니, 대체로 승려들이 참여하여 거기에 힘을 썼다. 이것이 『범우고梵宇攷』를 짓게 된 까닭이기도 하며, 또한 종산서원鐘山書院에 불교서적을 두어 주자朱子를 위해 게시해 두고 보았던 남은 뜻을 모방한 점이 있는 것이다.”
왕명으로 『범우고』를 편찬하고서 정조正祖가 남긴 글이다. 왕은 스님들이 궁벽진 산골의 무지몽매한 백성을 교화하고, 외적으로부터 산천을 방비하며, 조선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는 공덕이 있는 팔도의 사찰과 스님들을 기록으로 남겨 조선의 소중한 재산으로 삼고자 했다. 불교적 신앙심이 있는 왕은 아니었지만,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이후 남긴 공적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이다. 이 글은 불교가 탄압받고 소외받았던 조선의 역사 속에서 그 가치를 기억하고 있는 우리 불교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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