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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을 보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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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검(조병활) / 2021 년 1 월 [통권 제93호] / / 작성일21-01-13 15:11 / 조회7,615회 /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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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성철 스님 [옮김] 활인검(조병활)
편집자 | 【번호】·【평석】·【강설】은 성철 스님이 직접 쓰고 말씀하신 것이다. 【7-1】은 제7장 제1절이라는 의미다. * 표시가 붙은 것은 보다 쉽게 풀이한 것이다.
【7-1】 ①내외가 허적虛寂하고 담연湛然히 응조凝照하야 일념도 불생하는 심처深處에 도달하여서 연원을 철저히 투득透得하여 소연翛然히 자득自得하면, 그 당체當體가 허공과 같아서 변량邊量을 궁진窮盡하지 못한다. 상고上古와 현금現今에 뻗쳐서 만상萬像이 나농羅籠하지 못하며 범성凡聖이 구애拘碍하지 못하여 정나라적쇄쇄淨裸裸赤灑灑하나니, 이를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 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 한다. 일득一得하면 영원히 증득證得하여 미래제未來際가 다 하여도 망실亡失하지 않나니, 무슨 생사가 있어 가히 체애滯碍하리오. 이 무심경계와 무념진종無念眞宗은 맹리猛利한 사람이라야 능히 실증實證한다. ①內外寂하고 湛然凝照하야 到一念不生處하야 透徹淵源하야 翛然自得하면 體若虛空하야 莫窮邊量이라 亘古亘今하야 萬像이 羅籠不住하며 凡聖이 拘碍不得하야 淨裸裸赤灑灑하나니 謂之本來面目이며 本地風光이니라 一得永得하야 盡未來際하나니 更有甚生死하야 可爲滯碍리오 此箇無心境界와 無念眞宗은 要猛利人이라니 方能著實이니라. (①『圜悟心要』, 『卍續藏經』120, p.747b)
* ①안팎이 텅 빈 깊고 맑음으로 집중적으로 관조觀照해 그릇된 생각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깊은 곳’에 도달해 근본 자리를 꿰뚫고 걸림 없이 스스로 깨치면, 그 본 모습이 마치 허공과 같아 끝을 헤아릴 수 없고 옛날과 지금에 걸쳐 모든 형상에 얽매이지 않으며, 범부와 성인이 구속하거나 막지 못하므로 ‘있는 그대로의 본 모습’[淨裸裸赤灑灑]이 드러난다. 이를 본래면목 혹은 본지풍광이라 말한다.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얻어 미래의 시간이 다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무슨 삶과 죽음이 있으며, 막고 걸리게 하는것이 있단 말인가! 그릇되고 삿된 생각이 없는 이 경계와 ‘잡념 없는 참다운 근원’은 자질이 아주 뛰어난 사람[猛利人]만이 능히 증득 할 수 있다.
【평석】 무심무념의 본래면목을 철증徹證하여야 비로소 오달悟達이라 하나니 미래겁未來劫이 궁진窮盡토록 자재무애한 이 대휴헐지大休歇地가 정안종사의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이다.
* 그릇되고 삿된 생각과 잡념이 없는 참다운 모습[本來面目]을 철저하게 증득해야 비로소 깨친 것이다. 미래의 시간이 다하도록 걸림 없고 자유로운 이 크나큰 쉼의 경지[大休歇地]에서 ‘참다운 본성을 올바르게 깨친 큰 스승’[正眼宗師]이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쉰다.
【7-2】 ①본래의 진여묘심眞如妙心을 직투철증直透徹證하면, 고금古今에 장긍長亘하고 담연湛然히 부동하여 만년萬年이 일념一念이요 일념이 만년이다. 심지心地에 영영히 일호一毫의 삼루渗漏도 없어서 일득一得하니 영득永得하여 여여부동如如不動한 묘심妙心은, 변이變異가 절대로 없나니 이것을 인심人心을 직지直指하여 견성성불한다고 하느니라. ①直透本來妙心하면 亘古亘今하고 湛然不動하야 萬年一念이요 一念萬年이라 永無滲漏하야 一得永得하야 無有變易하나니 乃謂之直指人心見性成佛이니라. (①『圜悟心要』, 『卍續藏經』120, p.754a)
* ①본래 그대로의 참다운 마음을 곧바로 투과해 철저하게 증득하면 옛날과 지금에 항상 걸쳐 있고 맑고 깊은 물처럼 움직임이 없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시간이 한 순간이고, 한 순간이 수많은 시간인 경지이다. 마음에 조그마한 번뇌[渗漏]도 없어 한 번 증득하면 영원히 얻나니 움직임이 없는 것 같은 미묘한 그 마음은 절대로 다르게 변하지 않는데, 이 경지에 이른 것을 ‘참다운 본성을 곧바로 체득해 부처님이 되었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말한다.
【평석】 진망眞妄의 삼루渗漏가 영절永絶하여 담연湛然히 부동하는 열반묘심涅槃妙心은 천만년이 다하여도 변이變異가 없나니, 이 무심무념지가 참으로 견성이며 성불이다.
* 옮음과 그름이라는 분별의 번뇌가 영원히 끊어지고 깊고 맑은 물처럼 움직임이 없는 ‘완전히 평화로운 미묘한 그 마음’[涅槃妙心]은 수많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나니, ‘그릇되고 삿된 생각과 잡념이 없는 이 경지’[無念無心地]가 바로 참다운 깨달음의 경계이다.
【7-3】 ①진무심眞無心으로 상응하면 이는 구경의 낙착지落著地이다. 암두岩頭는 “다만 무위무사無爲無事한 한한지閑閑地만 수호한다.” 하였고, 운거雲居는 말하기를 “천인만인중千人萬人中의 분잡紛雜한 곳에 있어도 일인一人도 없는 것과 같이 무심하다.”고 하였다. 조산曹山은 또한 “고독蠱毒의 사향死鄕을 경과經過하는 것과 같아서 한 방울의 물도 젖지 않는다.” 하였다. 이것을 성태聖胎를 장양長養하는 것이라 하며 오염될 수 없는 무심의 진경眞境이라 했다. ②장양성태長養聖胎의 일구一句는 어떻게 말하는고? 섬호纖毫의 수학심修學心도 일으키지 않고 무상광중無相光中에 항상 자재하도다. ①與無心으로 相應하면 乃是究竟落著之地니 岩頭道하되 只守閑閑地라하며 雲居道하되 千人萬人中에 如無一人相似라 하며 曹山이 道하되 如經蠱毒之鄕하야 水也不得沾他一滴이라 하니 謂之長養聖胎며 謂之汚染不得이니라. ②長養聖胎一句는 作麽生道오. 不起纖毫修學心하고 無相光中에 常自在로다. (①『圜悟心要』, 『卍續藏經』120, p.754a. ②『圜悟錄』2, 『大正藏』47, p.719b)
* ①그릇되고 삿된 생각이 없는 것으로 상응하면 이는 궁극의 종착지이다. 암두전활은 “다만 하고자 하는 것도 없고 일도 없는 자유롭고 자유로운 경지만 지킨다.”고 했고, 운거도응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있어도 마치 한 사람도 없는 것과 같이 마음에 그릇되거나 삿된 생각이 없다.”고 했다. 조산본적은 또한 “한 방울이라도 묻으면 죽는 무서운 독벌레가 있는 죽음의 땅을 지나가듯이 한 방울의 물에도 젖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태아를 잘 기르는 것이며, 그릇되고 삿된 생각에 오염될 수 없는 참다운 경계境界라 했다. ②성스러운 태아를 기르는 한 마디는 어떻게 말하는가? 배운다는 조그마한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항상 ‘모양 없는 빛 가운데’[無相光中]에서 항상 자유로운 것이다.
【평석】 일체만념一切萬念이 구멸俱滅한 무심지를 체득하면, 무위무사無爲無事하며 한한적적閑閑寂寂할 뿐이다. 이 대휴헐처大休歇處에 안신安身한 달도자達道者는, 천만군중千萬群衆의 분요紛擾한 속에 있어도 인영人影이 영절永絶한 심산궁곡深山窮谷에 있는 것과 같이 신심身心이 안한安閑하다. 일적一滴의 독수毒水로 생명을 즉탈卽奪함과 같이, 극미일념極微一念이라도 기동起動하면 자성을 매각昧却하나, 일득영득一得永得하여 여여불변如如不變하므로 미념微念도 기동起動치 않나니, 이렇게 대적멸장중大寂滅場中에서 유희자재遊戱自在하는 것이 정안종사들의 오후행리悟後行履이다.
* 그릇되고 삿된 모든 생각들이 완전히 소멸된 무심의 경지를 체득하면 하고자 하는 것도 없고 일도 없어 자유롭고 자유로울 따름이다. 이 크나큰 휴식처에 몸을 편안하게 쉬고 있는 수행자는 수많은 사람이 시끄럽게 떠드는 속에 있어도 사람의 그림자가 영원히 끊어진 깊고 궁벽한 산 속에 있는 것과 같이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한가하다. 한 방울의 독물이 생명을 죽이는 것처럼 그릇되고 삿된 작은 하나의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참다운 본성이 완전히 어두워지나니,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얻어 그 경지가 변함없음으로 작은 생각도 일어나지 않나니, 이렇게 ‘크나큰 텅 빔의 경지 가운데’[大寂滅場中]에서 자유자재하는 것이 참다운 본성을 올바르게 체득한 수행자들이 깨침을 증득한 후 하는 일이다.
【7-4】 ①내심內心이 현명玄冥하고 외경外境이 공적空寂한 연후에 대도大道에 증입證入한 바 있나니, 증입證入하고 나서는 증證도 또한 증證이 아니요, 입入도 또한 입入이 아닌지라, 소연翛然히 심통철투深通徹透하여 통저桶底가 함탈陷脫한 것과 같아야 비로소 무생무위無生無爲인 한한閑閑한 묘도妙道의 정체正體에 계합契合하느니라. ①心冥境寂然後에 有所證入하나니 及至證入하야는 證亦非證이요 入亦非入이라 翛然通透하야 如桶底脫하야사 始契無生無爲한 閑閑妙道正體니라. (①『圜悟心要』, 『卍續藏經』120, p.771a)
* ①안으로 마음이 고요하고 밖으로 대상에 흔들리지 않은 뒤에야 진리를 깨닫는 길에 들어가나니, 길에 들어가고 나서는 깨달음도 깨달음이 아니요, 들어감도 들어감이 아니다. 자유자재로 깊이 통通하고 철저하게 뚫고 지나[透過] 밑바닥이 완전히 빠져버린 것과 같아야 비로소 태어남도 없고 인위적으로 하는 것도 없는 미묘한 진리의 올바른 본체와 완전히 하나가 된다.
【평석】 활연豁然히 철증徹證하여 증적證跡도 부득不得하여야 구경대휴헐지究竟大休歇地인 무생무위無生無爲하여 한한무사閑閑無事한 도체道體에 계합契合한다. 암두岩頭의 ‘지수한한지只守閑閑地’는 무생무위無生無爲인 구경무심의 한한지閑閑地를 말함이니, 이로써 장양성태長養聖胎와 보임리천保任履踐의 진의眞意를 정해正解할 것이다.
* 확 뚫리듯이 철저하게 깨달아 깨달았다는 자취도 없어야 ‘궁극의 크나큰 휴식처’[究竟大休歇地]인 태어남이 없고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 없으며 한가하고 한가로운 진리의 본체와 일치된다. 암두전활이 “다만 한가롭고 한가로운 경지만 지킨다.”고 말한 그 경지는 태어남이 없고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 없으며 그릇되고 삿됨이 없는 궁극의 마음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성스러운 태아를 기른다’[長養聖胎]와 ‘깨달은 이후 행하는 모든 일들’[保任履踐]이라는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것이다.
【7-5】 ①대도大道를 체득한 고사高士는 무심을 철저히 심증深證한지라, 비록 만반군기萬般群機가 일시에 내부來赴하여도 어찌 그 정신을 요동撓動하며 그 심려深慮를 간범干犯하리오. 다만 한한閑閑한 심지心地만 수호하여 우치愚痴함과 같으며 둔올鈍兀함과 같으나, 백사百事에 응임應臨하여서는 급풍急風과 같이 선회旋回하며 비전飛電과 같이 활전活轉하여 적기的機에 정당正當치 않음이 없느니라. ①得道之士는 徹證無心이라 雖萬機頓赴나 豈撓其神하며 干其慮哉아 只守閑閑地하야 如痴似几하나 及至臨事하야는 風旋電轉하야 靡不當機니라. (①『圜悟心要』, 『卍續藏經』120, p.701b)
* ①크나큰 진리를 체득한 뛰어난 수행자는 그릇되고 삿됨이 없는 마음을 철저하게 증득한 사람이다. 비록 수많은 중요한 일들이 한꺼번에 다가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정신이 (그 일들에) 침범당하지 않는다. 다만 한가하고 한가로운 마음의 경지를 지켜 마치 어리석고 둔한 상태로 있는 것 같으나, 모든 일들에 맞부딪치면 돌풍처럼 돌변하고 번개처럼 빨리 움직여 ‘상대방의 조짐이나 낌새’[機]에 적확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평석】 한한지閑閑地는 철증무심徹證無心한 대휴헐처大休歇處의 표현이다.
* 한가롭고 한가로운 경지는 그릇되고 삿됨이 없는 마음을 철저하게 깨달은 크나큰 휴식처를 말한다.
【강설】 견성한 사람은 구경의 무심을 철저히 증득한 자이다. 설사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큰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런 사람에겐 아무 일이 없다. 그래서 보통사람이 볼 때는 마치 멍텅구리 같고 둔한 바보 같아 보이 기도한다. 그러나 일에 닥쳐 법문을 한다든지 법거량을 할라치면 그 임기응변의 기봉이 번갯불처럼 빠르고 회오리바람처럼 매섭다. 암두 스님은 덕산 스님의 상수제자인데 자기 스승인 덕산을 두고 종종 구업이나 일삼는 자라고 폄하하곤 했다. 그렇다고 암두 스님이 덕산 스님보다 나아서 그런 소리를 한 것이 아니다. 늘 자성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이 법거량이다. 제자가 스승과 엇비슷하면 이는 스승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라 했다. 그 덕과 지혜가 스승을 능가해야 비로소 스승의 은혜를 갚는 것이라 했으니 덕산 스님도 그와 같다 하겠다. 또한 임제臨濟도 대오한 후엔 감히 황벽의 뺨을 때리고 어린아이 다루듯 하였으니 이 또한 같은 예라 하겠다.
스승의 무릎 아래에서 병 든 양처럼 예, 예, 거리며 그저 눈치나 살피는 이는 올바른 자식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스승에게 함부로 덤비라는 말이 아니다. 바른 안목과 법에 있어선 스승에게조차 양보하지 말라는 소리다. 임제가 대우에게 주먹질하고 황벽에게 달려들어 뺨을 친 것도 그분들이 선 자리를 바로 알고 번개와 회오리 같은 임기응변의 기봉을 쓴 것이다. 그렇지 않고 겉모양만 흉내 낸다면 그것은 어른에게 함부로 행동하는 어린아이의 치기와 불손에 지나지 않는다.
【7-6】 ①극심처極深處에 도달해도 심深이 없으며, 극묘처極妙處에서는 묘妙가 없어, 대휴헐大休歇하며 대안온大安穩하며 섬진纖塵도 부동하고 다만 한한지閑閑地만 수호하며, 범성凡聖이 능히 측량測量치 못하며 만덕萬德이 장래將來하지 못한 연후에 전법傳法의 발대자鉢袋子를 분부分付하느니라. ①到極深處하야는 無深하며 極妙處하야는 無妙하야 大休歇 大安穩하야 不動纖塵하고 只守閑閑地하야 凡聖이 莫能測하며 萬德이 不將來然後에 可以分付鉢袋子也니라. (①『圜悟心要』, 『卍續藏經』120, p.726b)
* ①지극히 깊은 곳에 도달해도 ‘깊음’이 없고 지극히 미묘한 곳에 이르러도 ‘미묘함’이 없으며, 매우 크게 쉬고 매우 한가롭고 편안해 조그마한 먼지도 움직이지 않고 다만 한가롭고 한가로움만을 지키며, 범부와 성인도 능히 헤아리지 못하고 모든 덕상德相도 오지 못하는 경지에 이른 수행자에게 비로소 가르침을 전하는 발우를 맡길 수 있다.
【평석】 극심극묘極深極妙의 대안온大安穩 대휴헐처大休歇處인 무심무념의 한한지閑閑地를 원증圓證하여야만 불조정전佛祖正傳을 계승한다. 만약 유심유념有心有念의 분분지紛紛地인 해오解悟에서 득도得道를 사칭하며 전법傳法을 자행한다면, 이는 미득위득未得謂得 미증위증未證謂證하는 멸불종족滅佛種族이다.
* 지극히 깊고 지극히 미묘하고 매우 편안한 휴식처인, 그릇되고 삿된 잡념이 없고 한가롭고 한가로운 그런 경지를 몰록 깨쳐야만 부처님과 조사들이 올바르게 전한 가르침을 잇는다. 만약 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잡념이 먼지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알음알이’[解悟]를 깨달음의 경지를 얻은 것으로 착각하고 진리를 계승했다고 한다면, 이는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했다고 하는 것이자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이 될 종자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강설】 깊고도 깊은 구경의 무심을 증득하면 깊다 할 것도 오묘하다 할 것도 없는 지경에 이르러 부처도 조사도 다 필요 없게 된다. 다들 무언가를 얻지 못해 쉬지 못하고 편안치 못한데 부처도 조사도 다 필요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보다 더 편안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구경지를 체득한 대해탈도인은 이처럼 무위無爲 무사無事하여 그저 한가롭고 한가로울 뿐이다. 이것이 보임이다. 그 한가롭고 한가로운 경지는 보통사람뿐 아니라 어떤 성인도 감히 짐작할 수 없다. 그 자리에선 부처님의 과덕인 32상 80종호 조차 냄새나는 똥 덩어리와 마찬가지이다. 여러 억 천겁을 닦아 얻은 덕상德相이라도 바로 깨친 이 자리에 오면 설래야 설 수가 없다. 이렇게 자성을 철저히 깨치고 구경각을 성취해 하는 일도 할 일도 없는 한가로운 대해탈인이 아니면 선문에선 법을 전하지 않는다. 지킬 것이 있고 닦을 것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선가의 보임이 아니라는 말이다.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 하고 깨치지 못하고서 깨쳤다 하는 것은 대망어죄大妄語罪로 바라이죄波羅夷罪에 해당한다. 혹자는 무심을 철증徹證하지 못해 망념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는데 견성했다 하고, 그 망심을 점차적으로 제거해 나아가는 것을 오후보임이라 한다. 그러나 고불고조의 말씀을 살펴보면 무심을 철저히 증득한 것을 견성이라 하고, 일체 망념이 일어나지 않아 할 일이 없는 대무심지를 보임이라 하였다. 고불고조의 뜻에 어긋난 말을 소리 높여 떠든다면 어찌 대망어죄가 아니겠는가? 비록 살생과 음행과 도둑질은 하지 않았지만 거짓말로 우리 불법을 헐고 망쳤으니 대역적이 분명하다.
【7-7】 ①무심지에 도달하면 일체의 망념과 정습情習이 구진俱盡하고 지견知見과 해애解碍가 도소都消하나니, 다시 무슨 일이 있으리오. 그러므로 남전南泉이 말하기를, “평상심이 도”라 하니라. ①到無心地하면 一切妄念情習이 俱盡하고 知見解碍가 都消하나니 更有甚事리오 故로 南泉이 云平常心이 是道라하니라. (①『圜悟心要』, 『卍續藏經』120, p.737a)
* ①그릇되고 삿된 마음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면 모든 망령된 생각과 범부의 마음에 익숙한 모든 것들이 소멸되고 잘못 안 견해와 알음알이로 생긴 장애가 모두 소멸되는데,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남전은 “그릇되고 삿된 생각이 없는 한가로운 마음이 바로 진리”[平常心是道]라고 말했다.
【평석】 여기서 평상심이라 함은 망념정습妄念情習과 지견해애知見解碍가 탕진蕩盡한 대무심처大無心處이다. 미혹한 맹자盲者는, 번뇌망상 등 중생 본연의 생멸심으로 착각하나니 참으로 장남작북將南作北의 광견狂見이다.
* 여기서 ‘그릇되고 삿된 생각이 없는 한가로운 마음’[平常心]이라 함은 범부의 망령된 생각[妄念], 익숙한 나쁜 습관[情習], ‘잘못 안 지혜로 일으킨 견해’[知見], ‘알음알이가 만든 장애’[解碍] 등이 완전히 사라진 ‘잡념과 사념이 없는 크나큰 마음의 경지’[大無心處]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번뇌와 그릇된 생각 등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마음을 ‘그릇되고 삿된 생각이 없는 한가로운 마음’[平常心]으로 착각하는데, 이는 참으로 남쪽을 북쪽이라 우기는[將南作北] ‘미친 견해’[狂見]이다.
【강설】 흔히 “평상심이 도다.”라고 하면,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옷 입고 앉아서 부산도 생각하고 서울도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평상심이 아니냐고들 한다. 그것은 평상심을 꿈에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래서 원오 스님이 “무심지를 철저히 증득해 구경각을 성취한 것이 평상심이다.” 고 말씀하신 것이다. 무심지를 철저히 증득해 참으로 하는 일 없고 할 것도 없는 그런 마음을 평상심이라 했지, 망상이 죽 끓듯 하는 마음을 평상심이라 한 것이 아니다. 혹자는 “일상에 쓰는 마음이 그대로 평상심이지 무슨 무사무위의 마음을 일컫는 말이겠는가?” 하며 나를 외도 취급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일체 망념과 훈습이 다 끊어진 구경의 무심이 평상심이라고 원오 스님께서 분명히 밝히지 않았는가? 어떤 이가 평상심이란 말을 자주 쓰기에 한번은 그 평상심이 대체 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이의 대답이 하루 종일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는 바로 그런 마음이라고 하더라. 참으로 가소로운 이야기이다. 그것은 평상심이 아니라 생멸하고 기동하는 망상심이다. 망상이 여전하고도 견성이라 돈오라 떠들듯 생멸심을 평상심이라 일컬으니 이처럼 전도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전도된 견해를 가진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진실한 평상심이란 원오 스님 말씀처럼 일체 망상과 정식이 다 끊어진 대무심지이다. 대무심지를 일컬어 마조 스님이 늘 평상심이 도라 하시고, 남전 스님이 평상심이라 거론한 것이다. 그 말씀을 함부로 해석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며 요동치는 번뇌 망상의 마음을 평상심이라 해선 결코 안 된다. 그런 마음을 평상심이라 한다면 부처님도 망상심妄想心으로 생활하셨다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7-8】 ①지실至實한 평상의 대안온처大安穩處에 도달하면 요연了然히 섬개纖芥도 가히 소득所得한 것이 없고, 다만 이같이 처소處所를 따라 자유로이 안온安穩하나니 진실로 무심도인無心道人이다. 이 무심을 보임保任하여 구경에 불佛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을 불러 중생이라 하며, 보리도 또한 성립되지 않거늘 무엇을 불러 번뇌라 하리오. 소연翛然히 영탈永脫하며 때에 순응順應하여 자재하니 밥을 만나면 밥을 먹고 차를 만나면 차를 마신다. 설사 분잡奔雜한 시정市井에 처하여도 적정寂靜한 산림山林과 같아서 당초當初에 이종二種의 견해가 없다. 설사 연화대상蓮華臺上에 모셔도 흔열忻悅하지 않으며 구천지하九泉之下에 억폐抑閉하여도 혐염嫌厭하지 않는다. ①致至實平常大安穩處하면 了無纖芥可得하고 只恁麽隨處轉安하나니 眞無心道人也라 保任此無心하야 究竟에 佛亦不存이어니 喚甚麽作衆生이며 菩提도 亦不立이어늘 喚甚麽作煩惱리오 翛然永脫하야 應時納祐하야 遇飯喫飯하며 遇茶喫茶니라 縱處闤闠하야도 如山林하야 初無二見하야 假使致之蓮華臺上하야도 亦不生忻이요 抑之九泉之下하여도 亦不起厭이니라. (①『圜悟心要』, 『卍續藏經』120, p.763a)
* ①참으로 진정한 일상의 크나큰 편안함에 도달하면 겨자씨만한 것도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고, 다만 이르는 곳마다 편안하게 되니 그릇되고 삿된 마음이 없는 진정한 수행자이다. 그릇되고 삿된 생각이 없는 이 마음을 잘 지키면 마침내는 부처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데, 무엇을 중생이라 부르는가? 깨달음 또한 성립되지 않거늘 무엇을 번뇌라 할 것인가? 자유자재하게 (번뇌에서) 영원히 벗어나고 때에 따라 복을 가져오며, 밥을 만나면 밥을 먹고, 차를 만나면 차를 마신다. 비록 번잡한 도시에 있어도 텅 비고 고요한 숲속에 있는 것과 같아 처음부터 다른 생각이 없다. 설사 연화대 위에 모셔도 기뻐하지 않고, 지옥에 갇혀도 싫어하지 않는다.
【평석】 무심도인無心道人의 무애자재한 대적삼매大寂三昧가 보임保任이며 장양長養이니, 이는 망멸증진妄滅證眞하여 구경각을 성취한 후의 생활이다.
* 그릇되고 삿된 마음이 없는 수행자의 걸림 없이 자유롭고 고요한 생활 자체가 바로 ‘보임’이며 ‘장양’이니, 이는 ‘망령되고 그릇된 것을 소멸시켜 참다운 깨달음을 증득’[妄滅證眞]한, ‘최고最高 경지’[究竟覺]를 성취한 후의 생활이다.
【강설】 일체망념을 다 끊어버린 대무심지가 대안온처이며 일체에 걸림 없는 대해탈경계이다. 이것이 바로 무심도인의 경계이고 평상심이다. 보임이란 이 무심을 보임하는 것임을 원오스님께서 분명히 밝히셨다. 무심지를 체득한 해탈도인은 시절인연의 형편에 따라 자유자재하다. 어떻게 자유자재한가? 밥 먹을 자리이면 밥을 먹고 차 마실 자리이면 차를 마신다. 그럼 우리라고 밥을 먹지 않고 차를 마시지 않는가? 겉모양은 같지만 범부는 온갖 망상 속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해탈도인은 일체망념을 떨쳐버린 대무심지 대무사지 대해탈지 대안온처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차 맛도 바로 알고 밥맛도 제대로 알 수 있다. 죽 끓듯 하는 번뇌와 망상에 휩싸인 사람이 어떻게 차 맛을 바로 알고 밥맛을 바로 알 수 있겠는가? 숟가락 바로 들고 밥을 바로 먹고 밥맛을 바로 알며, 찻잔을 바로 들고 차를 바로 마시고 차 맛을 바로 알려면 바르게 깨쳐 대해탈을 성취해야만 한다. 그러기 전에는 밥숟가락도 바로 잡을 수 없고 차사발도 바로 들 수 없다.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중노릇 제대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밥숟가락 제대로 잡을 줄 알고 찻잔 바로 들 줄 알면 그 사람이 공부 성취한 사람이다.” 그런 이는 겉보기엔 평범하다. 때론 어린아이처럼 화를 내고 사소한 일에 기뻐하기도 한다. 허나 그 마음은 대해탈처에서 늘 안온하고 무심하다. 그런 부사의대해탈경계不思議大解脫境界가 보임이다. 아직까지 무언가 남아 있어 닦고 배우고 익힌다면 그것은 견성도 아니고 무심도 아니며 보임도 아니다. 또한 분주한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 역시 바로 깨친 것이 아니다. 바로 깨친 사람은 조용한 곳에 있어도 조용함을 모르고 분주한 곳에 있어도 분주함을 모른다. 조용함과 분주함 둘 다 초탈한 사람이 바로 깨친 사람이다. 바로 깨쳐 무심을 보임하는 이에게 어찌 조용함과 분주함만 없겠는가? 끝끝내 무심하여 부처를 찾아도 부처를 찾아볼 수 없고 조사를 찾아도 조사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니, 설사 성인이라고 칭송을 받더라도 기뻐함이 없고 험악한 지옥에 떨어져 온갖 고초를 겪는다 하더라도 끝끝내 무심하여 싫어함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무심을 철저히 증득하여 그 마음이 탕탕무애자재한蕩蕩無碍自在漢이라야 해탈도인 이라 할 수 있다.
앞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무심도인의 무애자재한 대적정 삼매가 보임이요, 성태를 기르는 것임을 원오스님께서 분명히 밝히셨다. 이것이 바르게 견성한 사람, 즉 일체 번뇌망상이 다 제거되어 진여자성을 철저히 증득한 사람의 생활이다. 흔히 망상 부리다가 투명하고 맑은 경계가 조금 나타나고 견해가 좀 밝아진 듯하면 견성으로 오해하고 착각한 이들이 많은데 그것은 견성이 아니다. 일체 망념이 다 끊어지고 망념이 끊어졌다는 자취마저 없어진 경계, 푸른 하늘처럼 맑고 맑은 경계마저도 초탈한 대무심지가 진정한 견성이고 구경각이다. 또 한 망상을 차근차근히 없애가는 과정을 보임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데, 보임이란 망상이 다 제거된 무심 속에서 자유자재한 생활을 영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어느 부처님 어느 조사가 망상이 여전한 것을 두고 견성이라 보임이라 했단 말인가? 이는 원오 스님 개인의 견해가 아니다. 부처님과 조사님들의 글과 뜻을 상세히 살피고, 당신의 깨달음에 바탕을 두고 하신 진실한 말씀이다. 크게 쉬어 할 일이 없는 대무심지의 자유자재한 생활이 진정한 보임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7-9】 ①자성의 실지實地를 답착踏著하여 무사안온無事安穩한 곳에 도달한 때에는 심중心中에 허가虛假한 공부가 없다. 면면부절綿綿不絶하여 사호絲毫도 삼루渗漏하지 않고, 응연凝然히 담적湛寂하여 불조佛祖도 지득知得할 수 없으며 마외魔外도 제휴提携하지 못한다. 이것은 무소주無所住의 대해탈에 자주自住함이니, 비록 궁겁窮劫을 경력經歷하여도 또한 여여불변如如不變하거늘 하물며 진연塵緣이 다시 있으랴. ①脚踏實地하야 到安穩處時엔 中無處假底工夫하야 綿綿不漏絲毫하고 湛寂凝然하야 佛祖莫知요 魔外無提라 是自住無所住大解脫이니 雖歷窮劫하야도 亦只如如地어니 況復諸緣耶아. (①『圜悟心要』, 『卍續藏經』120, p.703a)
* ①참다운 본성 자리를 직접 밟아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일[事]이 없고 편안한 경지에 도달한 때 마음속에는 거짓되고 일시적인 노력[工夫]이 없다. 끊임없이 이어져 터럭만큼도 새지 않고 마음은 확고하며 맑고 고요해 부처님이나 조사도 알 수 없으며 마왕과 외도들 역시 건드리지 못한다. 이것은 집착하지 않는 크나큰 해탈에 스스로 머무는 것이니, 비록 수많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다. 하물며 ‘대상에 집착하는 인연’[塵緣]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대상에 관련이 없다]!
【평석】 억천만겁億千萬劫토록 여여불변如如不變한 대해탈경계가 무심안락인無心安樂人의 일상행리日常行履이다.
* 영원한 자유의 경지[解脫]에서 수많은 시간 동안 변함없이 머무는 것이 그릇되고 삿된 마음이 없는 수행자의 일상적인 행동이다.
【강설】 견성이란 이미 일체망념을 다 제거한 대무심경계 대해탈경계 구경각이기 때문에 다시 헛된 공부가 있을 수 없다.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실제로 증험하신 진여삼매眞如三昧 해인삼매海印三昧만이 있을 뿐이다. 이 삼매는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얻어 잃는 법이 없으므로 억만겁을 지난다 하더라도 한 생각이 여여부동如如不動한다. 그 여여부동한 경계는 추호의 망념도 일어나지 않는 대무심지이다. 자성을 바로 깨친 이 청정무구한 경계는 부처와 조사도 알아차릴 수 없다. 여기에서 또한 명심할 것이 있다. “부처와 조사도 알 수 없다 하였는데 내가 감히 어찌 알겠는가?” 하고는 물러서라는 말이 아니다. 부처와 조사도 알아차릴 수 없다고 한 그 경계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 경계는 일체의 지식과 이해가 미치지 못하고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지 몰라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누구든 견성해서 구경각 대열반 대무심을 확실히 증득하면 그 경계는 부처와 조사도 엿볼 수 없다. 하물며 마구니와 외도야 말할 것 있겠는가? 부처를 구함도 조사를 구함도 없는 그런 대무심지를 머무는 바 없는 대해탈경계라 한다. 그 경계는 억천만겁토록 여여불변해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경계이다. 이것이 실지에서 바로 깨친 사람, 견성한 사람의 실제 경계이다. 만약 이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깨친 것도 아니고 견성한 것도 아니며 보임도 아니다. 망상이 여전한데도 깨쳤다고 하고, 깨치고 나서 차근차근 망상을 없애 나아가는 것을 오후보임이라 하는 이들은 고불고조의 말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함부로 망설을 늘어놓는 것이다.
고불고조의 정견에 근거할 때, 견성은 일체망념이 다 끊어져 대열반경계 대무심경계를 실증한 것이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또 견성했을 때의 그 대무심경계에서 온갖 일상사를 자유자재하게 영위하는 것이 오후보임이다. 뭔가 부족한 점이 있어 보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그것은 올바로 견성한 것도 아니고 참다운 공부도 보임도 아니다. 그런 견성과 보임은 참다운 견성과 보임에 까마득히 미치지 못한다.
【7-10】 ①심중心中에 일물一物도 잔류殘留하지 않으면 직하直下에 목석木石과 같은 무심인無心人이 되어, 우치둔올愚痴鈍兀함과 같아 승해勝解를 내지 않는다. 양래養來하고 양거養去하여, 생사를 관하되 심히 무사한가無事閑暇로움과 같아 문득 조주趙州, 남전南泉, 덕산德山, 임제臨濟와 더불어 동일한 견지見地에 서게 되니, 간절히 스스로 보임保任하여 이 무생무위無生無爲의 대안락한 경지에 단거하느니라. ①心中에 不留一物하면 直下에 似箇無心底人하야 如痴似兀하야 不生勝解라 養來養去하야 觀生死하되 甚譬如閑하야 便與趙州南泉과 德山臨濟로 同一見也니 切自保任하야 端居此無生無爲大安樂之地니라. (①『圜悟心要』, 『卍續藏經』120, p.776a)
* ①마음속에 하나의 물건도 남기지 않고, 곧바로 나무나 돌과 같이 그릇된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되고, 어리석고 둔함 그 자체가 되어,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그런 마음의 경지를 잘 기르고 길러 삶과 죽음을 살펴보되 아무 일없이 한가롭게 지내는 것 같아 문득 조주, 남전, 덕산, 임제와 같은 경지에 서게 된다. ‘망상이 다 제거되어 그릇되고 삿된 생각 없이 자유자재한 생활을 영위’[保任]하며 ‘태어남도 없고, 인위적으로 하고자 함도 없는’[無生無爲] 편안한 경지에 확고하게 머문다[端居].
【평석】 무생무위無生無爲인 대안락의 해탈경계에서 자유자재自由自在하는 것이 보임保任이다.
* ‘태어남도 없고 인위적으로 하고자 함도 없는’[無生無爲] 편안한 경지에서 자유자재하게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보임이다.
【강설】 마음속에 한 물건도 남아 있지 않은 경계란 망상뿐 아니라 부처도 조사도 찾아볼 수 없고 부처니 진리니 하는 견해조차 남아 있지 않은 대무심경계 대해탈경계를 말한다. 대무심지에 노니는 이는 잡된 번뇌 망상뿐 아니라 수승한 지해知解조차 일으키지 않아 겉보기에 흡사 생기 없는 무정물이나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대무심경계에서 자유자재하게 생활하며 성태를 기른다. 억천 만겁을 지나도 조금도 변동 없는 대해탈경계에서 노니니 그에겐 죽고 사는 일도 오히려 사소한 일이다.
대조사로 추앙받는 임제・조주・남전・덕산・임제 스님 등과 더불어 똑같은 경계를 체득하여 동일한 세계에서 노닐며 생활하게 되니 그런 사람이라야 비로소 보임하는 이라 말할 수 있다. 무생법인을 증득해 일체만법이 나지 않으니 부처라는 견해, 진리라는 견해조차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 할 일이 없다. 모든 법을 성취해 불견佛見·법견法見도 설 수 없고 부처도 조사도 설 수 없는데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아무 할 일이 없으니 곧 천하가 태평한 대안락지大安樂地이다. 그런 사람이라야 크게 편안한 사람이다. 망상이나 욕심이 남아 있어 배우고 노력할 것이 있다면 무생・무위가 될 수 없다. 그런 이에겐 해야 할 무언가가 늘 있어 그 마음을 재촉하며 끊임없이 요동치게 한다. 무생無生을 철증徹證한 사람이라야 일없는 무위의 경계에 노닐며 크게 편안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오후보임이다.
깨쳤다면서 번뇌가 여전히 일어나고 또 일어나는 번뇌망상과 싸우며 보임이라고 한다면 이는 변죽에 변죽을 울리는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이런 소견을 가진 사람은 가시덤불 속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스로 깨쳤다곤 하지만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망상이 성가신 가시처럼 사방에서 엄습해오니 그 앉은 자리가 어찌 편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깨달음도 보임도 아니다. 진실한 깨달음은 대무생大無生・대무심大無心・대열반大涅槃을 증득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야 일체를 해탈한 한가로운 도인이 되어 대안락・대자유를 누리며 보임할 수 있다. 망상을 없애느니 번뇌를 다스리느니 정과 혜를 쌍으로 닦는다느니 하는 것은 보임이 아니다. 부디 사람을 죽이는 비상砒霜과 같은 사견에 빠지지 말고 고불고조께서 바로 전한 정견을 따르길 바란다.
【7-11】 ①일념도 불생하고 전후제前後際가 단절한 심처深處에 도달하여 맥연驀然히 투철透徹하여 통저桶底가 탈락함과 같아서, 탈락한 처소가 있으면 극오極奧하고 극심極深하여 본지本地의 풍광風光을 답착踏著하고 본래의 면목을 명견明見하여 천하노화상天下老和尙의 설두舌頭를 의심하지 않는다. 일체를 좌단坐斷하며 파주把住하여 무심과 무사無事로 장양長養한다. 이육시중二六時中에 허과虛過하는 공부가 없어 심심心心에 촉물觸物하지 않고 보보步步에 처소가 없나니, 이것이 참으로 만사를 요필了畢한 출진出塵한 납승이다. ①到一念不生하고 前後際斷處하야 驀然透徹하야 如桶底脫하야 有歡喜處하면 極奧極深하야 踏著本地風光하며 明見本來面目하야 不疑天下老和尙의 舌頭니라 坐得斷把得住하야 以無心無事로 養之라 二六時中에 無虛過底工夫하야 心心不觸物하며 步步無處所하나니 便是箇了事衲僧也니라. (①『圜悟心要』, 『卍續藏經』120, p.735a)
* ①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 없어진 깊은 곳에 도달해 홀연 철저하게 꿰뚫어 통의 밑바닥이 떨어져 나간 것과 같은 기쁨이 있고, 심오하고, 매우 깊은 곳이 있으면, 본래 모습을 착실하게 밟고 본래의 얼굴을 분명하게 파악해 천하의 여러 스님들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는다. 꼼짝 못하게[坐斷] 움켜쥔 채[把住] ‘그릇되고 삿된 생각이 없고 인위적인 일을 하지 않음’[無心無事]으로 (성스러운 태아를) 기른다. 하루 종일 헛되이 보내는 공부가 없어 모든 마음이 대상에 걸리지 않고 걸음마다 집착하는 곳이 없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모든 일을 완전하게 마친 진정한 수행자이다.
【평석】 일념불생하는 심오한 경계에서 활연대오豁然大悟하여 본래면목 즉 자성을 철견徹見하고 무심無心과 무사無事로 장양성태長養聖胎하는 것이 불조도 규지窺知할 수 없는 정안납승正眼衲僧의 불가사의한 오후悟後의 보임保任이다.
* 한 생각도 생기지 않는 심오한 경계에서 홀연 크게 깨달아 참다운 본성을 확실하게 체득하고 그릇되고 삿된 마음이 없고 인위적으로 무엇을 하는 그런 마음이 없는 태도로 성스러운 태아를 기르는 것은, 부처님과 조사들도 엿보아 알 수 없는 올바른 눈을 가진 수행자의 헤아릴 수 없는, 깨달음 이후의 보임이다.
【강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함은 6추의 거친 망상뿐 아니라 3세의 미세한 망상까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10지와 등각도 일념불생一念不生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8 아뢰야식의 미세무명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10지・등각을 초월해 정각을 성취하고 나서야 비로소 본지本地, 즉 자성의 본래면목을 확연히 보게 된다. 천하 노화상들의 법문은 구경각을 성취한 뒤 대적삼매大寂三昧에 들어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대적삼매를 성취하지 못한 자들은 그 법문을 올바로 알아들을 수 없다. 소리야 듣겠지만 그 정확한 뜻은 알 길이 없으니 제각기 알음알이로 사량해 곡해하기 일쑤다.
그러나 구경각을 성취하고 똑같은 대적삼매에 들어 그 법문을 듣는다면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가 없다. 맑은 하늘 빛나는 태양처럼 너무도 분명하다. 그런 사람은 시방법계는 물론 부처와 조사도 앉은 자리에서 몽땅 끊어버릴 수 있다. 그런 경계를 성취한 뒤 자유자재하게 생활하며 성태, 즉 바르게 깨친 그 자리를 길이 보존하는 것이다. 길이 보존한다는 것도 무심無心과 무사無事로 기르는 것이지 보호하고 지킬 무엇이 있어 애를 쓰고 노력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대해탈인의 오후보임 경계는 불견佛見, 법견法見도 넘볼 수 없는 신묘한 경계이다. 이런 신묘한 경계를 두고 뒤범벅이 된 번뇌 망상의 정식情識으로 이러니저러니 억측하고 사량한다면 이는 봉사가 그림을 평하는 것과 똑같다.
봉사라면 모름지기 눈뜰 생각을 간절히 해야 한다. 지긋이 눈감고 앉아 검으니 푸르니 적절하니 부당하니 떠들어서 도대체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런 봉사의 평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모름지기 견성해서 무심을 철저히 증득하는 공부에 힘을 써야지, 깨닫고 난 뒤의 일을 두고 이러니저러니 억측하거나 선지식의 경계를 평하는 일은 절대 삼가야 한다.
【7-12】 ①곧 대사大死한 사람과 같아서 기식氣息이 단절된 연후에 소성甦醒하면, 비로소 확연廓然히 태허太虛와 동일함을 알아야 바야흐로 실지實地를 답착踏著하는 데 도달한다. 차사此事를 심심철증深深徹證하여 등한等閑에 탕탕무애蕩蕩無碍하여 백부지百不知하고 백불회百不會하나니, 반드시 축착築著하게 되면 문득 녹록轆轆히 활전活轉한다. 다시는 물제物制도 없고 또한 방소方所도 없어서 요용要用하면 편용便用하고 요행要行하면 편행便行하는데, 다시 무슨 시비득실是非得失이 있으리오. 상上으로 통투通透하고 하下로 철저徹底하여 일시에 수섭收攝하나니, 심현深玄한 이 무심경계를 어찌 용이容易히 이천履踐하며 주박湊泊하리오. 이것은 모름지기 과량대인過量大人이라야 한다. ①直似大死底人하야 絶氣息然後에 甦醒하면 始知廓同太하야 方到脚踏實地니라 深證此事하야 等閑蕩蕩地하야 百不知百不會하나니 纔至築著하면 便轉轆轆이라 更無物制하며 亦無方所하야 要用便用하며 要行便行하나니 更有甚得失이리오 通上徹下하야 一時收攝하나니 此無心境界는 豈容易履踐湊泊이리오 要須是箇人始得다. (①『圜悟心要』, 『卍續藏經』120, p.737b)
* ①바로 크게 죽은 사람과 같아 호흡이 끊어진 후에 다시 살아나면 분명하게 큰 허공과 같음을 알아 비로소 ‘참다운 경지’[實地]를 밟는다. 이 일을 깊이 인식하고 한가로이 호호탕탕하게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듯이 이리 저리 두드려 견실해지면[築著] 곧바로 잘 굴러간다. 다시 사물에 제압되지 않고 장소에 묶이지 않아, 사용하고자 하면 곧바로 사용하고, 행하고자 하면 곧바로 행하므로 이것 이외 무슨 얻음과 잃음이 있겠는가? 위로 통하고 아래에 철저하여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받아 섭수하며, 그릇되고 삿된 생각이 없는 이런 경계에 어찌 쉽게 도달하겠는가? 모름지기 한계를 뛰어넘는 큰 역량을 가진 사람만이 이런 경계를 얻을 수 있다.
【평석】 오후리천悟後履踐은 심증차사深證此事하야 임운자재任運自在한 대무심경계에 있으니, 대사대활大死大活한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이라야 한다.
* 깨닫고 난 뒤의 실천은 이 일을 깊이 인식하고 아무런 인위적인 조작이 없이 자유로운 경지에 있는 것이니 크게 죽고 크게 살아나, 배울 것 없고 할 일 없는 한가로운 수행자라야 한다.
【강설】 공부를 부지런히 하다보면 끊임없이 이어지던 번뇌망상이 고요히 사라지는 무심경계를 맛보게 된다. 그러나 그런 무심경계마저 완전히 떠나야 참다운 공부이다. 무심경계에 주저앉아버리면 그것은 참다운 깨달음이 아니다. 옛 말씀에 “무심을 도라 하지 말라. 무심이라도 한 겹의 큰 관문이 남아 있느니라.”고 하였다. 무심을 깨쳤다 해도 무심경계에 머문다면 견성, 즉 깨달음이 아니라 했는데 하물며 무심도 증득하지 못해 번뇌망상이 왔다 갔다 하면서 도를 깨쳤다 하고 견성했다 해서야 되겠는가? 그것은 공부하다 병이 생겨 남쪽을 북쪽이라 하듯 크게 착각하고 오인한 것이다.
바로 깨친 사람이면 죽은 송장처럼 온갖 망상이 다 떨어진 무심경계가 된다. 또한 그런 무심경계마저 머물지 않고 초연히 벗어난다. 죽은 송장처럼 철저한 무심경계, 그런 깊은 경지에서 눈을 떠 확연히 깨치는 것이 견성이다. 그때 비로소 깨친 경지가 끝없는 허공처럼 탁 트이는데, 바로 깨친 경지에서 보면 그런 태허조차 바늘구멍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끝없는 허공의 다함없는 법들이 생겨나는 것을 대각 가운데서 보니 물 위에 거품 하나 생겨나는 것과 같더라.”
크게 깨친 경지에서 보면 저 허공도 바다 위의 작은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 법이다. 끝없는 대해와 작은 거품을 비교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끝없는 깨달음의 바다는 참으로 불가설 불가설이라 설명을 하면 모조리 거짓말이 되고 만다.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형상을 나타내 보일 수도 없으니 물맛을 알고 싶으면 스스로 먹어보는 수밖에 없다. 스스로 깨쳐야 아는 것이지 깨치기 전에는 천불千佛이 출세해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설명한다 해도 털끝만큼도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깊은 무심경계를 체득한 이는 겉보기에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멍텅구리처럼 보인다. 허나 누군가 법을 물어오거나 어려운 일을 겪게 되면 번갯불도 미치지 못할 만큼 빠르고 날랜 기봉으로 척척 해결해 나아간다. 이런 이가 크게 죽었다가 크게 살아난 자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환한 대낮에도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넘어지고 엎어지기 일쑤인 봉사처럼 망상 가운데서 한 번 웃고 한 번 우는 삶을 어찌 삶이라 하겠는가? 두 눈을 바로 뜬 사람이라면 넘어질 일이 무엇이 있겠으며 구애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 사람이라면 작은 풀 한 포기 한 줌의 흙덩어리도 황금처럼 귀하게 쓰는 자유자재한 경지를 누리게 된다. 그런 대자유인에게 다시 무슨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이 있겠는가?
그는 한마디 말로 온갖 진리를 온전히 다 드러낼 수도 있고 작은 티끌 하나에서 일체 경계와 일체 법문을 훤히 다 볼 수도 있다. 이런 무심경계 대열반경계를 어떻게 성취하여 보임할 수 있을까? 모름지기 제8 아뢰야식의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어야만 하리라. 10지와 등각도 계단과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는 사람이니 10지 등각마저 완전히 초월한 과량인過量人이라야 가능하리라. 이런 해탈인의 무애자재한 삶은 일체의 번뇌망상, 부처와 조사의 경계마저 뛰어넘어 크게 살아난 자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도 뛰어넘지 못한 채 무애자재를 말하고 흉내 낸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이겠는가?
196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북한산 비봉 부근에서 왼쪽부터 향곡 스님, 성철 스님, 청담 스님.
【7-13】 ①심성의 근원을 직절直截하여 다시는 의의依倚가 없고, 지견知見과 해애解碍를 탈각脫却하여 정예이변淨穢二邊에 구애拘碍되지 않아서 무상無上의 진종眞宗을 초증超證하여 무위무작無爲無作을 이천履踐한다. ①直截根源하야 更無依倚하고 脫却知見解碍하며 不拘淨染二邊하야 超證無上眞宗하야 履踐無爲無作이니라. (①『圜悟心要』, 『卍續藏經』120, p.766a)
* ①심성의 근원에 곧바로 들어가 다시는 의지하는 것 없고, 그릇된 견해와 알음알이의 장애에서 벗어나 깨끗함과 더러움의 두 변邊에 구속되지 않아, 위없는 참다운 가르침을 곧바로 깨닫고, 인위적으로 하는 것 없음[無爲]과 일부러 행하는 것이 없음[無作]을 실천한다.
【평석】 무심무념의 무상진종無上眞宗을 초증超證하여 무위무작無爲無作을 이천履踐하는 것이 불조정전佛祖正傳의 오후보임悟後保任이다.
* 그릇되고 삿된 생각이 없고 잡념 없는 참다운 가르침을 곧바로 깨달아 인위적으로 하는 것 없음[無爲]과 일부러 행하는 것이 없음[無作]을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과 조사들이 올바르게 전한 ‘깨달음 이후의 보임’[悟後保任]이다.
【강설】 자성의 근원을 바로 깨치면 의지하는 것이 없다. 부처도 조사도 법에도 의지하지 않고, 지혜 견해 등 일체에서 다 해탈해 버린다. 그러면 청정한 무심이 되는데 거기에 머물면 그 청정함도 곧 때가 된다. 티 없는 허공과 같은 저 청정한 경계에도 머물지 않고 훌쩍 벗어나야만 참으로 바로 깨친 자리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망상이 없는 청정한 경계가 나타나면 그만 그 청정함에 구속되어 버린다. 그것은 견성이 아니고 돈오가 아니며 바로 깨친 것이 아니다. 허공처럼 깨끗한 경계마저 부셔버리고 초월한 사람이라야 참으로 바로 깨친 사람이다. 이런 자라야 자유자재할 수 있는 요량이 있다. 그런 사람은 하는 일도 할 일도 없다. 모든 것을 성취했으니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이런 편안하고 자유자재한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바로 참다운 보임이다. 허공처럼 청정한 경계마저 벗어나야 하는데 잔뜩 낀 구름처럼 번뇌 망상이 우글우글한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7-14】 ①만약 일념에 자성을 원증圓證하여 염념念念이 수행修行하면 수修함이 없이 수修하며 작作함이 없이 작作하는지라, 일체의 경계에 집념執念치 않으며 애착치 않아 선악의 업연業緣에 계박繫縛되지 않아서 대해탈을 얻는다. 사후死後에 이르러서는 소연翛然히 독탈獨脫하여 전정前程이 명랑明朗하여 겁겁생생劫劫生生에 자기를 미매迷昧하지 않느니라. ①若一念圓證하야 念念修行하면 以無修而修하며 無作而作이라 於一切境에 不執不著하야 不被善惡業緣縛하야 得大解脫하나니 到百年後에는 翛然獨脫하야 前程이 明朗하야 劫劫生生에 不迷自己니라. (①『圜悟心要』, 『卍續藏經』120, p.750b)
* ①만약 한 생각에 참다운 본성을 완전하게 깨달아 생각마다 닦으면, ‘닦음 없음’[無修]으로 닦는 것이며 ‘행함 없음’[無作]으로 행하는 것이다. 모든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애착하지 않아 선과 악에 붙들려 얽매이지 않아 크나큰 해탈을 얻는다. 죽은 후에는 홀로 자유로이 벗어나니 앞길은 밝으며 태어날 때마다 자기를 알지 못하는 미혹함은 없다.
【평석】 오후悟後의 수행은 자성을 원증圓證하여 구경무심을 성취한 후에 시작되나니 이는 자재해탈이며 자재삼매이다.
* 깨달음 이후의 수행은 참다운 본성을 완전하게 깨친, 즉 그릇되고 삿된 마음이 없는 궁극의 경지를 성취한 이후에 시작된다. 이것이 ‘영원한 자유’[解脫]과 ‘참다운 집중’[三昧]이다.
【강설】 증득에 원증圓證과 분증分證 두 가지가 있다. 모든 부처님과 조사님들은 일체를 원만히 깨달아 성취하므로 원증이라 하고, 10지 보살을 비롯한 여러 성인들은 공부한 바에 따라 조금씩 부분적으로 성취하므로 분증이라 한다. 여기서 거론하는 ‘증득’이란 원증을 말하는 것이지 분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혹 이것을 아직 도상途上에 있는 3현 성인들의 분증이라 오해한다면 이는 해오를 견성이라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종의 견성은 증오, 즉 원증을 말하는 것이다. “견성하면 모든 것을 원만히 증득한다고 했는데 다시 무슨 수행이 필요한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수행을 한다.’는 표현 때문에 혹 “깨달은 뒤에도 수행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고 오해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깨달은 뒤의 수행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유위행有爲行이 아니다. 아무리 수행해도 수행함이 없고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하는 것이 없다. 말을 하자니 ‘수행한다’, ‘짓는다’고 표현했지만 도무지 하는 바가 없고 짓는 바가 없다. 닦을 것이 있고 할 일이 남아 있어 ‘수행한다’, ‘짓는다’고 한 것이 아니다. 일체를 초월해 자유자재한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을 ‘수행’이라 표현했을 뿐이다.
그런 이는 일체 경계에 집착하지 않으니, 애착할 일이 무엇이 있고 경계에 물들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일체 시비선악의 그물에 걸리지 않으니 신묘한 불가사의 대해탈의 경계일 뿐이다. 이렇게 견성을 바로 한 사람은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얻어 억천만겁을 지난다 해도 자기에 미혹하지 않고 늘 여여부동한 진여삼매의 경지에서 노니는 것이다. 억 만 번을 죽어 다시 태어나더라도 자성을 바로 깨친 이의 경계는 조금도 변동이 없으니, 허공이 무너졌으면 무너졌지 깨친 이의 경계는 변동이 없다. 이런 깊은 경계를 증득해야만 견성이고 돈오고 오후보임이다. 따라서 ‘오후수행’, ‘오후보임’, ‘장양성태’란 유위행이 아니라 자성을 원만히 증득해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한가한 도인의 자재무애한 삼매요 해탈이라 하겠다.
【7-15】 ①남악南岳이 “수증修證은 없지 않으나 오염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 불오염不汚染의 수修는 가위可謂 원수圓修니 수자修字가 붙을 수 있는가. 이 불오염不汚染의 증證이 가위可謂 원증圓證이니 증자證字가 붙을 수 있는가. 이러한즉 종일토록 수修하여도 수修함이 없어서 소지분향掃地焚香이 전부 무량無量한 불사佛事이어늘, 이를 또한 어찌 폐廢하리오. 다만 수증修證에 착著하지 않을 뿐이다. 9지九地도 오히려 무공용無功用이어늘 하물며 10지十地리오. 설사 등각이 설법하기를 여운여우如雲如雨하여도 오히려 남전南泉의 가척呵斥을 당하여 대도大道에 전연 배괴背乖되었거늘, 하물며 10지 보살의 관조로써 선문의 우열을 논할 수 있으리오. ①南岳이 云 修證卽不無나 汚染卽不得이라 하니 卽此不汚染之修는 可謂圓修니 還著得箇修麽字아 卽此不汚染之證이 可謂圓證이니 還著得箇證字麽아 如此則終日修而無修하야 掃地焚香이 皆悉無量之佛事어늘 又安可廢리오 但不著修證이니라 九地도 尙無功用이어늘 況十地乎아 乃至 等覺이 說法을 如雲如雨하야도 猶被南泉呵斥하야 與道全乖어늘 況十地觀照가 與宗門而較其優劣이 可乎아. (①『博山警語』, 『卍續藏經』112, p.970a)
* ①남전이 “수행이 없지는 않으나 오염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 오염되지 않는 수행을 원만한 수행이라 말할 수 있는데 ‘수행’이라는 글자를 붙일 수 있겠는가? 이 오염되지 않는 깨침은 완전한 깨침이라 말할 수 있는데 ‘깨침’이라는 글자를 붙일 수 있겠는가? 이처럼 하루 종일 닦아도 닦음이 없고, 땅 쓸고 향을 사르는 모든 것이 불교를 위한 일이 아닌 것이 없거늘 어찌 없앨 수 있으리오! 다만 닦음과 깨침에 집착하지 않을 뿐이다. 9지 보살도 인위적으로 한다는 생각 없이 움직이는데 10지 보살이 인위적으로 행하는 것이 있겠는가? 등각 단계에 이른 보살이 구름일고 비 오듯이 마음대로 설법해도 오히려 진리와 어긋난다며 남전의 질책을 받는데 하물며 10지 보살 수준의 관조觀照 정도로 선문의 뛰어남과 하열함을 논하겠는가?
【평석】 육조가 말하였다. “다만 자심自心에 항상 정견正見이 일어나서 번뇌와 진로塵勞가 능히 오염하지 못하는 것이 곧 견성이다.(但於自心에 常起正見하야 煩惱塵勞가 常不能染이 卽是見性이니라 : 『壇經』, 『大正藏』48, p.350c)” 이와 같이 불오염不汚染은 철증徹證 후의 구경무심이라야 가능하며 10지 등각도 추수追隨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원오圜悟도 “구경무심의 한한지閑閑地를 오염부득汚染不得”이라 하였다(7-3 참조). 그리하여 남악南岳의 불오염수증不汚染修證은 10지 등각을 초월한 구경지인 무위무작無爲無作의 이천履踐이다. 이 불오염不汚染의 원증처圓證處는 유불여불唯佛與佛이 내능궁진乃能窮盡하나니, 여래의 정안正眼을 완구完具한 종문정전宗門正傳의 명맥命脈이다.
* 육조가 “다만 자기의 마음에 항상 올바른 견해가 일어나 번뇌와 망상이 오염되게 물들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다.”고 말했다. 이 경지는 오염되지 않은 철저한 깨침 이후에 오는 그릇되고 삿된 생각이 없는 궁극의 경지이며, 10지 보살이나 등각 보살도 따라올 수 없는 경계이다. 그러므로 원오가 “그릇되고 삿된 생각이 없는 궁극의 한가하고 한가한 그 경지는 오염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남악이 말한 오염되지 않은 닦음과 깨침은 10지 보살과 등각 보살의 단계를 넘어선, 인위적으로 함이 없고 작위적으로 짓는 것[作]이 없는 그런 실천이다. 이 오염되지 않는 완전한 깨침의 경지는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이 부처님 같은 참다운 눈을 가진, 선문에서 올바르게 전해오는 생명줄이다.
【강설】 박산무이 선사는 명나라 때 스님으로 조동종 사람이다. 이 글은 그분의 『참선경어參禪驚語』에서 인용하였다. 『참선경어』는 선의 전성기인 당송대의 글은 아니지만 선의 요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선의 여러 병폐들을 정확히 지적하였으므로 선종에서 다른 어떤 책 못지않게 중요시하는 책이다. 그 책에서도 오후보임에 대해 원오 스님과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남악회향 선사가 육조 혜능 대사를 찾아가자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오느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남악이 8년 고심 끝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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