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현량·비량과 직관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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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0 년 10 월 [통권 제90호] / / 작성일20-10-21 14:35 / 조회7,802회 / 댓글0건본문
근대불교학 중국 | 유식과 베르그송 철학의 만남 2
베르그송 철학에서 생명 개념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직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우주는 살아있는 생명의 유기체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 우주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물질을 대상으로 하는 분석적인 지성의 방법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생명의 진리는 이성적, 분석적 인식인 지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고, 오직 직관으로만 가능함을 천명하였다. 철학과 과학의 분기점이 바로 이 직관과 분석의 분기점이라는 것이다.
이지理智와 직관
그 이유로 베르그송은 지성은 유동적流動的인 것을 싫어하고 자기가 접촉하는 것을 모두 고체화시키는 반면에, 생명이란 우리의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성은 무엇을 하든 간에 유기화된 것을 비유기적인 것으로 분해한다. 우리는 불연속적인 것, 부동적인 것, 죽은 것을 다루는 경우에만 자신을 갖게 된다. 지성은 생명에 대한 본연적인 몰이해를 특징으로 한다.”
베르그송에게 직관은 현실과 실재를 그 내부에서 직접 파악하는 인간의 능력, 대상과 거리를 두지 않고 보는 것을 말한다. “직관이란 대상의 유일하고, 따라서 표현할 수 없는 것과 일치하기 위해 대상의 내부로 옮아가는 공감sympathy이다.” 따라서 직관은 절대적인 것을 파악할 수 있고, 절대적인 본체를 탐구하는 철학, 즉 형이상학의 본연의 임무를 맡기에 적합한 방법이다. 직관은 대상과의 일치를 위해 대상의 내부로 일치해 들어가는 표현할 수 없는 운동이고 의식적 공명이므로, 의식이 물질과의 접촉으로 빠져들었던 습관을 거슬러가야 하는, 지성으로서는 힘든 작업이다.
1921년 북경대 교수 시절의 양수명
중국 근대에 베르그송과 유식불교를 비교하는 경우, 직관의 방법론과 유식의 방법론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다. 언어학자 여금희(黎錦熙, 1890-1978)는 태허가 강설하는 『유마힐경』을 연구하는 동시에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론」을 세밀하게 읽으며, 그 사이에 “완전히 부합되는 점이 많다.”고 보았다. 그는 「유마힐경기문발維摩詰經紀聞跋」을 써서 불교는 진실한 본체, 즉 ‘진여’를 말하는 불가사의한 경지이고 이러한 경지를 체험하려면 아라야식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이것과 베르그송의 직관이 서로 부합된다고 주장하였다. 베르그송은 ‘직관’의 방법으로 직접 우리 의식계의 ‘지속’, ‘창조적 진화’를 체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수명(梁漱溟, 1893-1988, 사진 1·2·3)은 베르그송의 직관과 유식불교의 방법론이 전혀 다르다고 보고, 그 근거로 이렇게 말하였다. “베르그송의 방법은 이지를 배척하고 ‘직관’을 활용하는 것이고, 유식학은 직관을 배척하고 이지를 활용하는 것이다. 현재 유식학의 눈으로 베르그송의 주장을 살펴보면,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식학이 지식을 말할 때는 두 가지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량(現量=감각)’과 ‘비량(比量=추리)’이다. 직관이라는 것은 유식학의 이 두 가지 방법과 합치하지 않는다.”
1980년의 양수명
양수명이 유식학에서 직관을 배척하고 이지를 활용한다고 본 것은 불교논리학인 인명因明을 가리킨 것이다. 인명 논리에서 말하는 ‘양量’은 척도, 표준의 의미로 지식의 내원, 인식의 형식, 지식의 진위를 판정하는 표준을 가리킨다. 유식 불교의 삼량三量 중 첫 번째인 현량은 대상을 대할 때 분별하거나 헤아리는 일없이 파악하는 것, 오관 능력으로 직접 외부 현상을 감각하여 인식하는 것이다. 두 번째인 비량比量은 이미 알고 있는 대상을 가지고 헤아려서 아직 나타나기 전이나 미지의 대상을 추론하여 파악하는 것이다. 세 번째인 비량非量은 정확하지 않고 잘못된 현량이나 비량을 가리킨다. 이렇게 인명에서는 ‘현량’과 ‘비량’을 감각과 추리로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직관이라는 것은 유식학의 이 두 가지 방법과 합치하지 않는다.”는 양수명의 결론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현량現量과 비량比量
양수명은 직관이 결코 현량이 될 수 없음을 확언한다. 그는 현량이란 바로 감각sensation이라고 본다. 의미가 지각되지 않는[無分別] 단순한 감각 자료, 내지 감각 소여(感覺所與, Sensedata)라는 것이다. 예컨대 차를 마실 때 느끼는 차 맛이나 책상 위 흰 천을 볼 때 아는 흰 색이 모두 현량이다. 그런데 이렇게 감각할 때는 무엇이 차 맛이고 흰 색인지 전혀 모르며, 단지 미각과 시각에 의해 획득한 차 맛, 또는 흰 색의 감각이 있을 뿐 차 맛, 또는 흰색에 함축된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량은 단순히 감각 자료만 얻을 뿐 그 함축된 의미나 추상적 개념을 얻을 수 없으므로, ‘체體를 얻지만 의義를 얻지 못한다’고 한다. 유식에서는 이를 ‘무분별’, 또는 ‘자성분별’이라고 구분한다. 차 맛을 느끼거나 흰색임을 아는 것은 ‘자성분별’이라고 하고, 감각할 뿐 그것을 전혀 모르면 ‘무분별’이라고 한다. 그런데 직관의 경우에는 당연히 차 맛을 느끼거나 희다는 뜻을 가지게 되므로, 직관과 현량이 다르다는 것이다.
비량比量 역시 직관과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다. “직관으로 얻어지는 내용은 ‘본능으로 얻어지는 것’이어서 이러한 뜻을 얻으면 원만 구족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직관은 유식학에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지속’, ‘유동’, ‘진아’와 같은 것들이 모두 유식학에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유식학은 현량과 비량만 승인할 뿐이다. 유식학은 베르그송이 극력 배척하는 이지의 방법, 과학자들이 쓰는 방법과 다르지 않은 방법을 쓴다.” 양수명은 비량이 오늘날 말하는 이지理智로, 심리적인 면에서 인식을 구성하는 작용의 하나라고 본다. 예컨대 차에 대한 인식은 여러 차례 차를 눈으로 보고 마셔봄으로써 차 아닌 것들, 즉 물, 국물, 기름, 술 등과 구별하고, 각종 차, 즉 커피, 홍차, 녹차, 보리차 등으로부터 그 공통된 의미를 추출해낸 뒤, 차를 보면 곧 인식할 수 있다. 이 때 차 개념이 가장 분명해진다. 이렇게 개념을 구성하는 작용은 구별分과 종합合이라는 두 작용으로 나누어지며, 이 구별과 종합의 작용이 바로 비량이다.
우리는 인식할 때 먼저 현량에 의지하지만, 현량, 즉 감각에만 의지한다면 얻는 것은 잡다한 영상에 불과할 것이다. 반드시 비량으로 각 감각에서 공통점을 종합하고 그 차이점을 구별해야 비로소 정확하고 명료한 개념을 구성하게 된다. 따라서 유식학은 현량과 비량만 승인할 뿐이며, 이 때문에 유식학은 이 두 양을 경영하여 이루어진다는 논의가 타당성을 갖게 된다.
베르그송은 항상 형이상학은 과학의 방법을 써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반면에 양수명은 유식 불교가 심리학, 생물학에서와 다르지 않은 이지의 방법, 과학의 방법을 쓰고 있다고 보고 있으니, 당연히 베르그송과 유식학의 철학적 방법론은 상반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양수명은 “베르그송이 중시하는 ‘창조’, ‘지속’과 같은 부류의 관념은 모두 유식 불교에 적합하지 않다.”고 단언하였다.
베르그송은 부분들의 결합으로 전체를 보는 시각을 부정한 반면에, 유식학은 상분이나 견분, 51심소법 등 기본적으로 마음을 다수의 부분들로 분석하고 그 부분들의 결합을 통해 설명하려는 방법을 취한다. 추리, 추론의 뜻을 가지는 비량은 당연히 분석적 방법, 정적인 방법에 해당하므로, 베르그송의 전체의 직관, 본능적인 파악, 동적인 인식과는 대치된다. 베르그송의 직관으로 얻어지는 내용은 ‘본능으로 얻어지는 것’이고, 비량은 ‘이지의 방법’에 속한다. 따라서 직관이 비량에 해당하지 않음은 분명해 보인다.
수受·상想과 비량非量
양수명은 베르그송 철학으로 유식 불교를 수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현량의 감각에서 비량의 추상 개념에 이르는 중간에 ‘직관’의 단계가 필요하다. 현량과 비량에만 의지해서는 인식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유식학을 수정한다.” 그는 인식이 현량과 비량으로 구성되는 것은 옳지만, “현량과 비량에만 의지해서는 인식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단언한다. 현량은 구별하지 않고 의미가 지각되지 않는 것이다.
비량은 구별과 종합의 작용을 행하며, 그 다음에 비로소 추상적 의미가 생겨난다. 그런데 양수명은 이 현량과 비량 사이에 다른 작용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감각에 덧붙여지는 ‘수受’, ‘상想’이라는 두 심소이고, 이 두 심소가 의미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직관이라는 것이다. 이 수, 상이라는 두 심소에서는 분명하지 않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베르그송의 직관이 유식학의 ‘비량非量’에 해당하며, 이 직관이 인식에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인식이 이 세 가지 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 세 가지 작용 중 하나라도 없으면 인식이 성립할 수 없다고 단언하여, 유식 불교 이론을 수정하였다.
근대 중국학자들이 베르그송에 주목한 이유는?
근대 시기 많은 학자들이 현대적 학술 용어와 사상을 활용하여 유식 불교를 연구하였다. 예컨대 태허는 유식 불교에서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집착하여 자아라고 여기는 것이 독일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한 견해와 같다고 보았다. 당대원은 유식 불교가 가장 체계적이고 설명 방식이 뛰어나 과학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하였고, 이후 웅십력의 『신유식론』, 류풍림의 『유식금석』, 주옥창의 『유식신해』 등 서양철학으로 유식 불교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졌다.
한편 유식 불교에 의거하여 서양 종교나 과학, 서양철학을 비판하려는 시도도 많이 이루어졌다. 특히 철학적인 측면에서 서양 종교인 기독교의 신앙적 기초인 신(神=上帝)을 비판하는 데 유식 불교의 비판이 가장 유력하였고, 이러한 비판은 기독교의 확산을 억제시키는 데 효과적인 작용을 하였다.
1948년 중경에서 <중국문화요의>를 집필하고 있는 양수명
양수명이 베르그송 철학과 유식 불교의 관계를 살펴본 내용을 통해 우리는 유식 불교가 동서 문화의 융합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베르그송의 생명의 우주와 유식학의 아라야식의 전변이 일치한다는 것이 양수명의 생각이다. 그러나 유식 불교가 보는 세계를 ‘생명의 흐름’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만큼 타당할까? 세계를 의식의 연속적인 흐름으로 보는 측면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 세계를 그대로 생명의 약동이 진행되는 진화의 세계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르그송 철학과 유식 불교가 실제로 얼마나 일치하는가 하는 점이 아니라, 왜 근대 사상가들이 억지로라도 두 사상의 일치점을 찾으려고 노력했을까 하는 점이다. 방법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수명은 학문적 방법론에서 베르그송의 직관과 유식 불교의 분석적, 과학적 방법론이 상반된다고 보았다. 그 대신 그는 유식 불교의 인식론에 베르그송의 직관을 보충했을 때 보다 완정한 인식 체계가 완성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중국 근대 지식인들이 수많은 서양 철학자들 중 본류에서 벗어나 있는 변방의 베르그송 철학을 선택한 의도와 연관하여 설명해볼 수 있다. 진화론이 시대적 사상이기는 했으나, 베르그송의 생명주의가 서양 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는 어렵다. 이는 베르그송 철학이 변화를 중시하고 생기론적 세계관을 가진 점 등이 중국의 전통철학이 가진 생명의 우주관을 인정해줄 수 있는 묘안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유식학자들 역시 의식의 연속적인 흐름을 말하는 베르그송 철학이 전통철학인 유식 불교의 타당성을 인정해줄 좋은 수단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서양 세력의 충격 하에서 유식 불교를 빌어 서학에 대응하는 것이 당시 중국학자들의 바람이었다. 따라서 베르그송 철학과 유식 불교 간의 중요하지 않은 몇 가지 부수적인 불일치는 눈감아 넘길 수 있었다. 이것이 중국 근대시기 유식 불교와 베르그송 철학의 만남이 가지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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