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의 세계]
제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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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자 / 2020 년 10 월 [통권 제90호] / / 작성일20-10-21 10:16 / 조회9,574회 / 댓글0건본문
제석천은 고대 인도 신 가운데 천둥과 번개를 지휘하며 비를 관장하는 신으로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신들 가운데 가장 신성한 신이자 신들의 제왕으로 숭배되어 왔다. 제석천은 농경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물길을 막는 악룡 브리트라vritra를 물리친 자’ 또는 ‘물길을 인도하는 자’라고 명명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제석천은 수미산 정상에 위치한 선견성善見城에 머물며 육욕천六欲天 가운데 두 번째 하늘인 도리천에 머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리천은 수미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의 산봉우리에 천인天人들이 사는 각각 8개씩의 천성天城이 있고, 중앙에는 제석천이 머무르는 선견성이 있어 33천이라고도 한다. 도리천의 천주인 제석천은 육욕천의 첫 번째 하늘인 사천왕천에 사는 사천왕을 심부름꾼으로 두고 있다.
제석천의 산스크리트 이름은 인드라Indra이며 손에는 악룡 트리트라를 살해하는데 사용한 무기 바즈라vajra 또는 금강저金剛杵를 손에 들고 있다. 제석천은 ‘아이라바타Airavata’라는 흰 코끼리를 타고 다니는데 부처님의 태몽 장면에 흰 코끼리가 어머니의 태 속에 드는 것은 제석천이 갖는 상징성과 연관되어 있다.
즉 태몽에 부처님의 화신으로 표현된 흰 코끼리는 성스러운 산을 닮은 네 개의 상아를 가진 아이라바타를 타고 다니는 인드라(Indra, 제석천)와 관련되어 있다. 제석천의 탈 것인 흰 코끼리는 인드라를 상징하며 부처님의 태몽 전설의 흰 코끼리는 부처님을 의미한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제1계급을 상징하는 천신은 브라흐마(Brahma, 범천)이고 제2계급을 상징하는 조상신은 인드라이기 때문이다.
제1계급을 상징하는 범천은 수행자를 모델로 하여 표현되었고 제2계급을 상징하는 제석천은 왕이나 무사 계급을 모델로 하였다. 범천은 긴 머리와 수염 그리고 물병 등을 지닌 수행자의 모습으로, 제석천은 터번이나 보관을 쓰고 몸에 장신구를 두른 왕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사진 1).
사진1. 간다라 불전미술 속 높은 관과 터번을 쓴 왕 모습의 제석천(왼쪽)과 긴 머리칼을 올려 묶은 수행자 모습의 범천(오른쪽).
부처님은 제2계급 크샤트리아 출신이었기 때문에 제석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간다라 불전 미술을 통해 제석천과 부처님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아기 부처님 탄생을 돕는 제석천
부처님의 일대기를 미술로 표현한 간다라의 불전미술은 불교의 도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부처님의 성도를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이 간다라 불전미술에서 최초로 등장하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또한 인도 바라문교의 신들이 불교에 수용된 초기의 예로는 범천과 제석천이 있다.
바라문교의 최고신인 범천과 제석천이 불교에 수용되어 불법과 부처님을 수호하는 신장이 되었다는 것은, 불교가 바라문교보다 우위라는 것을 은연 중에 간다라 불교도들이 나타낸 것이다.
부처님의 탄생 장면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등장하는 인물과 표현법이 달라진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다룬 불전경전佛傳經典에는 부처님이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탄생하자 사천왕이 제석천이 선의仙衣로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남인도 불교도들은 탄생불을 받는 천신으로 사천왕을 선택했다면 간다라 인들은 사천왕 대신 제석천으로 하여금 아기부처님을 받게 했던 것이다(사진 2).
사진2. 부처님 탄생, 간다라(2-3세기), 자료출처 : 미국 프리어갤러리Freer Gallery.
높은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몸에 장신구를 걸친 제석천은 손에 든 비단 천으로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 정결하여 계단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손발을 쭉 뻗어 나왔다.”는 모습을 표현한 아기부처님을 받고 있다. 여러 경전에서 부처님이 태어날 때 인간보다 먼저 신들이 받았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간다라 탄생 도상에서 보살을 받고 있는 천신은 제석천이다.
간다라 탄생 장면의 제석천 도상은 『방광대장엄경』의 “제석과 사바세계 주인인 범천왕은 공경하고 존중하여 몸을 굽히며 나아가 한마음 바른 생각으로 두 손으로 교사야燆奢耶 옷을 덮고 보살을 받들었다”는 것과,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의 “보살이 태어나려고 하자 제석천이 선의仙衣를 받쳐 들고 있었는데 마야부인이 그것을 땅에 두라고 했다.”는 내용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의 내용처럼 천을 든 제석천 도상은 간다라 탄생 도상의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사진 2>에 표현된 제석천의 이마에는 세로로 제3의 눈이 표현되어 있다. 이마에 세로로 표현된 제3의 눈은 ‘사방을 두루 보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범천의 특징이다. 그런데 고대 인도에서는 제석천이 이마에 세로로 긴 제3의 눈을 갖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탄생불의 관욕灌浴과 제석천
부처님오신날 사찰의 큰 행사는 탄생불을 목욕시키는 관불灌佛 의식이다. 관불 의식은 고대 초기 인도 불전미술의 소재로 즐겨 채택되었다. 간다라에서 유행한 관불 도상은 범천과 제석천이 온수와 냉수를 부어 아기부처님을 관욕灌浴하는 것이 특징이다. 중中인도에서는 두 마리의 용이 물을 부어 관욕시키며 중국과 한국에서는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 목욕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간다라에서 범천과 제석천에 의한 관불灌佛 도상이 많은 것은 이교도의 조복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이들의 주된 신앙대상인 제석천과 범천이 부처님을 수호하는 장면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3 . 싯다르타 태자를 목욕시키는 제석천과 범천, 간다라(1-2세기), 파키스탄 페샤와르박물관 소장.
파키스탄 스와트의 바리콧Barikot에서 출토된 <사진 3>은 중앙에 나신裸身의 태자가 사자다리로 된 상 위에 서 있고, 아기부처님의 두 손은 시녀로 추정되는 두 명의 여자가 잡고 있다. 두광을 한 태자의 머리 위에는 경전에서 언급한대로 냉온冷溫의 물이 섞여 쏟아지고 있다. 물이 든 항아리는 높은 관을 쓰고 금강저를 든 향우의 제석천과 긴 머리칼을 어깨에까지 드리운 향좌의 범천이 들고 있다. 좌우에는 합장한 인물이 싯다르타 태자의 탄생을 찬탄하고 있다. 이것은 『보요경』의 “제석천과 범천이 홀연히 내려와서 여러 향수로 싯다르타 태자를 목욕시켰다”고 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부처님께 설법을 요청하는 제석천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자신이 깨달은 바가 너무 심오해서 중생들에게 법을 설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을 염려해 설법을 주저했다고 한다. 이때 제석천이 법을 설해줄 것을 청했지만 부처님은 거절했다. 다음으로 범천 사함파티가 세 번에 걸쳐 간곡하게 설법해 줄 것을 청하자 부처님은 설법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범천이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께 법을 설해 줄 것을 간청해 전법이 이루어졌다는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이야기이다.
사진4. 제석천(오른쪽)이 범천(왼쪽)과 함께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는 장면, 간다라(1세기 경), 미국 시카고박물관.
부처님께서 제석천의 권청은 물리치고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인 이유는 기원전 2세기 경 그리스계의 미린다Milinda 왕과 나가세나Nāgasena 스님과의 문답서인 『미린다팡하Milindapañhā』와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잘 나타나 있다. 『대지도론』에서는 “부처님은 인간 세상에 태어나 대인大人의 법을 부리는 까닭에 비록 큰 자비가 있다 해도 청하지 않으면 말씀하지 않는다. 만일 청하지 않았는데도 말씀했다면 외도外道에게 조롱받을 것이므로 처음에는 반드시 청함을 기다리는 것이다. 또한 외도들은 범천을 숭상하는데 범천이 스스로 부처님께 청하면 곧 외도의 마음도 굴복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4>의 범천권청 장면 속 범천은 수행자를, 제석천은 왕을 모델로 했기 때문에 모습에서 차이가 난다. 범천은 수행자처럼 긴 머리칼은 올려 묶고 수염은 길렀으며 장신구를 걸치지 않았다. 이와 달리 제석천은 터번을 쓰고 장신구로 몸을 치장해 왕처럼 표현되었다. 인도 고대 불교미술에서는 수행자 풍의 범천과 왕을 모델로 한 제석천의 모습이 정착되어 8세기 중엽 경 경주의 토함산 석굴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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