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유식불교와 베르그송 철학의 만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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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0 년 9 월 [통권 제89호] / / 작성일20-09-21 10:29 / 조회7,338회 / 댓글0건본문
중국불교9 / 김제란
베르그송(H. Bergsong, 1859-1941) 철학은 5.4 운동 시기에 중국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당시 중국에 들어온 서양철학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실증주의와 베르그송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실증주의는 과학주의와 함께 전통 사상을 반대하는 진보적인 과학파에게 주로 전파되었고, 베르그송 철학은 전통 철학과의 유사성 때문에 전통철학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주로 전파되었다.
생명의 약동과 아뢰야식의 항전
베르그송은 진화론 학파의 가장 영향력있는 주창자로서 생기론Vitalism으로 알려진 독특한 철학 체계를 전개시킨 프랑스의 생철학자이다. 생기론과 함께 직관주의, 그리고 실재적 지속 개념으로 요약되는 생철학을 제시하였다. 중국 근대의 전통철학파는 베르그송 철학을 전통철학을 부흥시키는 이론적 무기로 활용하였고, 이것이 유식불교 연구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서양의 베르그송 철학과 동양의 유식불교의 만남은 서로의 사상과 의미를 밝혀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여징(呂澂, 1896-1989)은 “현재 사람들이 말하는 베르그송 철학은 유식불교와 통한다.”고 하였고, 양수명(梁漱溟, 1893-1988)도 “사람들이 베르그송과 유식학을 비교하여 논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고 지적하였다. 베르그송 철학과 유식불교의 접합점에 대하여 장태염(章太炎, 1868-1936)은 베르그송이 말하는 ‘생명’이 유식불교의 ‘아라야식’과 일치한다는 점에 논점을 맞추었다. 여징 역시 「베르그송철학과 유식학」(1921년)이라는 글에서 “만유가 지속하고 끊이지 않고 변화하는 것이 아뢰야식의 항전恒轉이 물 흐르는 것 같은 경지와 다를 바가 없다.”고 그 근거를 추정하였다.
베르그송 철학에서는 이 세계를 생명의 우주인 동시에 유기체적인 전체로 본다. 베르그송이 보는 현상계는 물질의 무기력한 덩어리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며, 자연의 물질계 내부에도 ‘생명의 흐름’이 관통하고 있다고 한다. 실재는 정체되어 있거나 정지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생성의 상태 중에 있다. 그 주된 구성적 특징은 생명이나 의식으로 이해되는 생의 추동력, 생의 비약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르그송의 이 같은 ‘끊임없는 생명의 흐름’을 양수명은 근원적 의식의 ‘쉬지 않는 전변’으로 보았다. 양수명이 보기에, 베르그송 철학과 유식불교는 이 우주를 죽어있는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생한 생명의 우주로 파악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베르그송은 “생명은 직관과 지성을 포함하는 보다 큰 의식Conscience”이라고 보는데, 이는 유식 불교가 이 세계를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의식인 아라야식의 전변으로 보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생명은 정신적인 에너지이고, 진화와 진보의 역동적 힘의 경향을 지니고 있는 비약 그 자체이다. 생명이라는 에너지는 의식과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우주의 하등 동물이나 식물에게 의식이 없다는 것은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수용되지 않는다. 단지 ‘의식이 잠들어 있는 상태’, 또는 ‘물질에 의하여 최면에 걸렸거나 유혹의 마비에 빠져 있는 상태’라고 한다. 이는 현상계의 대상들, 동식물이나 무생물을 포함하는 모든 것들을 아라야식의 현행으로 설명하는 유식 불교의 입장과 일치한다. 아라야식의 현행으로서 동물과 식물, 생물과 무생물간에는 근원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수명은 「구원결의론究元決疑論」(1916년)에서 유식 불교와 베르그송 철학의 상호 연관을 해석하였다. 양수명이 생각하는 세계는 생기론生機論적인 것으로, 생성 그 자체 외에 배후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 세계가 근원적으로 볼 때 ‘환유幻有’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인정하였다. 이 세계는 ‘한 생각이 홀연히 일어난 것’이고 ‘인과가 서로 계속되고 머물지 않고 흘러서 지금까지 이른 것’에 불과하므로, 실재성이나 고정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세계의 해석은 유식 불교의 ‘유식무경唯識無境’ 학설과 일치한다. 유식불교는 외부 현상 세계가 실재한다는 학설을 논파하고, 아라야식 연기설을 통해 현상 세계를 찰나 생멸하고 흐름과 같이 항전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실재성이 없는 환상, 한 생각이 일어난 것, 머물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전형적인 유식 불교적 세계관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양수명은 베르그송의 학설처럼 ‘생명의 흐름’만이 실재하지만, 그 자체가 실재하는 물질 형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점임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불교에서 그 의타기성으로 세운 것에서 벗어난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양수명은 생명의 흐름, 즉 은밀히 고요한 가운데 나아가는 ‘쉬지 않는 전변’을 베르그송의 ‘진화’로 해석하였다. 객관 현상은 아라야식의 쉬지 않는 전변으로서, 실재하지 않으므로 일종의 환유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쉬지 않는 전변’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베르그송 철학이나 유식 불교는 의타기성으로 세운 현상계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유식 불교는 일체의 현상이 모두 각종 인연에서 일어난 것이어서, 물속의 달과 같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물속의 달이 실재한다고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의타기성에 의거한 견해이다. 의타기성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환유임을 알게 된다. 양수명은 베르그송 철학이 유식 불교의 이러한 이치를 가장 적절히 설명해주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지속과 찰나생멸
양수명은 유식불교를 활용하여 베르그송 철학의 해석을 시도하였는데, 이 때 둘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이 나타난다. 베르그송 생명 철학의 근본은 바로 시간의 연속성에 있다. 이 시간은 수학적 시간도 아니고 외부의 여러 순간들의 집합도 아니며, 일종의 지속이자 그 중의 존재들이 상호 침투∙ 존재하는 유기적 통일체이다. “지속이란 과거가 미래를 잠식하고 불어나가면서 전진하는 연속적인 진전이다. 과거가 끊임없이 증대하는 이상, 그것은 또한 한없이 보존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기억이다. 생명은 고정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와 동일시되어 사건의 ‘연속적인 흐름’이 있을 뿐이다. 세계의 실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다수의 사건의 연속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활은 연속적인 흐름, 즉 ‘지속’이라는 정의가 가능하고, 이는 현상계뿐 아니라 인간 정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지속적이다.
유식 불교는 아뢰야식의 ‘상속전변차별相續轉變差別’을 통해 찰나마다 끊임없이 생멸하면서 이어지는 마음의 연속성[心相續]과 종자가 갖는 힘에 의해서 새로운 결과를 산출한다고 하는 변화성[轉變差別]을 동시에 설명하고자 하였다. 아라야식의 전변과 전식의 전변이 유기적으로 상호 원인因과 결과果가 되는 연속적인 활동을 계속함으로써, 현상 세계가 전개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식불교에서 우주는 지속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수의 사건의 연속’으로서 결코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양수명은 유식 불교의 식전변 개념을 통해 베르그송의 ‘지속’ 관념을 설명하였다.
양수명이 지속과 식전변을 연결시키는 입장을 여징은 몇 가지 근거에서 반대하였다. 첫째, 유식불교는 시간과 유전流轉을 하나로 연관하지 않고, 사물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발전되어오는 과정이란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거는 저절로 소멸하여 현재까지 올 것이 없다. 현재는 정지하지 않으므로, 과거로 갈 것이 없다.” 둘째, 베르그송은 유기물과 무기물이 생명의 두 가지 서로 거스르는 운동이 조성한 것이라고 보았지만, 유식불교는 아라야식이 일체 현상의 종자들을 함장하고 있으며 종자는 자기와 같은 동류의 현상만을 낳는다고 보았다. 셋째로 베르그송은 의식이 기억으로 과거의 경험을 보존하지만, 유식불교는 의식의 ‘항전’이 ‘찰나마다 존재하는 것’이고 찰나 생멸은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따로 보존할 방법이 없다는 차이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파악하는 우주의 성격이 ‘지속’이라면 유식 불교는 ‘찰나 생멸’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상은 결정적으로 불일치한다고 본 것이다.
여징의 이러한 관점은 베르그송이 우주 내에 두 상반된 운동인 상승 운동과 하강 운동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과도 연결된다. 베르그송의 우주는 생명 에너지와 물질 에너지라는 두 상반된 방향성에 의해 대립되고 있으며, 생명 에너지는 상승하기를 바라고 물질 에너지는 하강하기를 바란다. ‘생명의 비약’은 생명의 에너지가 지니고 있는 창조의 바람을 뜻한다. 그러나 이 우주의 생명은 절대 자유의 에너지는 아니고 언제나 물질의 무게를 안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생명체는 물질의 필연성과 생명의 창조성 사이에서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유식 불교에는 생명 에너지와 물질 에너지를 상반된 흐름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없다. 따라서 베르그송의 생명 철학을 그대로 유식 불교의 전변과 연관시키는 시각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맹목적 충동과 진심眞心의 흥기
양수명 역시 베르그송 철학의 한계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다. 베르그송이 생명의 흐름의 원동력을 구하지 않고, 생명의 흐름인 이 세계가 ‘의타기성’인 동시에 ‘원성실성’임을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세계가 ‘청정 본연의 진심眞心이 홀연히 한 순간에 일어난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양수명이 세계의 원동력으로 언급한 청정 본연의 ‘진심’에서 베르그송 철학과의 차이가 분명히 나타난다. 아라야식의 전변으로서의 이 세계를 ‘진심이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은 진여연기설인데, 이같은 세계는 베르그송이 말하는 생명의 무방향적인 충동이나 비약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양수명이 진심과 같은 의미라고 본 ‘에테르[以太]’는 그 곳에서부터 온갖 법계가 나오는 본체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베르그송과 같이 맹목적인 충동으로 드러나는 우주는 당연히 도덕적 질서를 가질 수 없고, 생명의 무방향성의 난폭한 흐름일 뿐이다. 반면에 유식 불교는 아라야식을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으로 봄으로써, 현상계의 오염을 설명하는 동시에 깨달음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깨달음의 여부에 따라 이 세계는 의타기성이며 동시에 원성실적인 양면성을 가지게 된다. 이 세계는 오염된 것인 동시에 참된 것이 된다.
양수명 전집. 제남 산동인민출판사. 2005.
양수명은 기본적으로 유식불교와 베르그송의 생명의 세계관이 일치한다고 보았다. 우주를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 사건의 연속적인 흐름으로 보는 것 자체가 바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를 사건의 연속적인 흐름, 생명의 흐름으로 파악하는 사고방식은 유학, 특히 송명 성리학의 전형적인 사유 방식이다. 우주를 물질 에너지와 정신 에너지라는 서로 상반된 두 힘의 균형으로 파악하는 사상도 『주역』에 원래 함축되어 있던 것이다. 베르그송 철학을 활용하여 전통철학을 설명하는 것은 전통철학을 명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베르그송 철학과 유식불교의 우주론을 비교 설명하는 방식 역시 상호 이해에 도움이 되고, 동서 철학의 유사성 및 차이를 확인하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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