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생사윤회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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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5 년 4 월 [통권 제24호] / / 작성일20-08-18 10:27 / 조회6,402회 / 댓글0건본문
몸종의 삶
세상이 온통 ‘나’ 중심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나’만을 내세우고, ‘내 것’에만 집착한다. 과도하게 드러난 그 나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갈등과 상처는 깊어지고, 서로 간의 충돌도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세상에는 자기중심적 아집과 이기적 욕망을 앞세운 무수한 ‘나’들로 넘쳐나기에 현대사회를 ‘나 세대(me generation)’라고 부를 만하다.
그렇다면 ‘나’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스스로 괴롭고 남을 괴롭히면서까지 그렇게 매달리는 걸까? 일반적으로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대상은 자신의 몸이다. 자신이라는 존재를 지탱하고, 즐거움과 고통을 느끼게 하고, 자신의 생각을 작동하게 해주기 때문에 몸을 ‘나’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곰곰이 돌아보면 우리는 정말 몸을 위해서 산다. 얼굴을 예쁘게 보이려고 목숨 걸고 성형도 하고, 외모가 매력적으로 돋보이도록 몸매도 가꾸고, 남과 차별되도록 비싼 옷도 사 입는다. 어디 그 뿐인가? 좋은 집에서 안락하게 살기 위해 몸 바쳐 일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육신의 안락을 위해 온갖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란 육신의 욕구를 받아주고, 육신이 즐겁도록 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중생들의 삶은 늘 분주하고 고단하기 이를 데 없다. 이를테면 삶이란 몸을 받들고, 몸의 욕구를 받드는 몸종 노릇인 셈이다. 이런 이치를 깨달은 수행자들이 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들은 이 사대(四大)로 만들어진 몸에서 싫어하는 뜻을 내고 싫어하여 떠나고 해탈하려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 심(心) 혹은 의(意) 혹은 식(識)이라고 부르는 것에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싫어하는 뜻을 내지 못하고 싫어하여 떠나지 못하며 해탈하지 못한다.”
인용한 『상응부경』에 따르면 범부들은 삶을 번거롭게 하는 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더우면 덥다, 추우면 춥다, 배고프면 배고프다며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이 몸이다. 더 편안하게 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육신의 욕망은 파악하기 쉽다. 만약 육신에 대한 집착을 해소하고, 육신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삶은 고요해질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른 사람들은 육신의 욕구에서 벗어난 고요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 그들은 육신의 간사한 욕구를 거부하며, 거친 음식을 먹거나 단식을 하고, 불편한 자리에서 잠을 자는 등 소욕지족의 삶을 산다.
과연 이렇게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일까? 만약 몸이 나의 주인이고, 나의 주체라면 육신의 욕망을 항복받는 것은 곧 나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인용한 말씀에서는 몸의 욕구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을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라고 칭하고 있다. 물론 이들은 육신을 ‘나’로 알고 집착하는 사람보다 성숙한 부류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몸의 욕구를 거부하고 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은 몸이 ‘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육신의 욕구에 집착하는 사람이나, 육신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나 방향은 다르지만 몸이 곧 ‘나’라는 오해는 동일하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윤회전생이다. 아득한 윤회의 관점에서 보면 현생의 삶에서 설사 육신의 욕망을 항복받는다고 할지라도 생사에서 해탈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진짜 주인은 죽으면 흩어지고 마는 사대(四大)로 구성된 육신이 아니다. 아득한 윤회를 관통하는 근원적 ‘나’를 바로 알고 그것마저 넘어서야 생사로부터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뢰야, 번뇌의 뿌리
표피적으로 보면 육신의 욕구를 쫓아다니느라 바빠서 삶이 고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심의식(心意識)의 분별과 집착으로 인해 생사윤회에서 해탈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의식의 뿌리가 되고, 번뇌와 무명의 근본이 되어 윤회의 주체가 되는 심의식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이 이 경의 말씀이다.
‘나’의 뿌리가 심의식이라는 것을 모르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억겁의 세월 동안 캄캄한 한밤중 같은 유랑을 거듭하는 것이 중생이다. 결국 우리를 진짜 속박하는 것은 인연 따라 흩어지는 육신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심의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른 깨달음을 얻고,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와 같은 근본무명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는 것이 성철 스님의 지론이다.
그렇다면 심의식이란 무엇인가? 스님은 여기서 말하는 심의식이란 유식에서 말하는 8식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심은 제8식, 의는 제7식, 식은 제6식이라고 해석했다. 눈·귀·코·혀·몸이 5식(五識)이고,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이 6식이다. 유식학에서는 여기에 심층심리와 무의식에 비유되는 제7식과 제8식까지 추가한다.
제8아뢰야식은 유식학의 핵심개념이지만 성철 스님은 이 말의 연원을 근본불교로까지 추적해 들어간다. 아뢰야식이라는 말과 영겁에 걸쳐 윤회하는 주체가 식(識)이라는 것은 근본경전에 이미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예증으로 율장 『상응부경』의 내용을 인용한다.
“중생은 아뢰야를 즐거워하고 아뢰야를 기뻐하고 아뢰야를 좋아한다. 그러나 아뢰야를 즐거워하고 아뢰야를 기뻐하고 아뢰야를 좋아하는 중생으로서는 이 연의성(緣依性), 연기의 도리는 보기 어려우며, 또 일체 제행의 고요히 그침, 일체 의거의 버림, 갈애의 모든 소멸, 떠남[離]・소멸[滅]・열반의 도리도 참으로 보기 어렵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 연기의 진리를 순관과 역관으로 살펴보셨다. 고해에서 신음하는 중생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때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은 중생들이 아뢰야를 좋아하고 그것에 집착하여 연기의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아뢰야식이 중생의 근본무명이라는 개념이 초기경전에 이미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라지지 않는 번뇌의 종자
아뢰야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역으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뢰야는 다음과 같이 한역되는데 모두 아뢰야의 특징을 나타낸다. 첫째 무몰식(無沒識)이다. 사람의 육신과 의식은 죽으면 사라지고 말지만 아뢰야식은 육신이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윤회의 주체가 되어 유전하기 때문이다. 둘째 장식(藏識)이다. 장(藏)이란 ‘저장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사유 활동과 언어 그리고 행위 등은 고스란히 아뢰야에 저장되어 다음 생으로 전해짐을 나타낸다. 셋째 종자식(種子識)이다. 씨앗은 식물의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가 봄이 오면 싹을 틔운다. 종자식도 인간이 행한 모든 내용을 저장하고 있다가 인연을 만나면 싹을 틔우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종자는 어떤 토양에서 싹을 틔우게 될까?
『증지부경』에는 “아난아, 업(業)은 밭이고 식(識)은 종자요, 애(愛)는 윤택함[潤]이다.”라고 설했다. 아뢰야가 씨앗에 비유된다면 그 종자식이 싹을 틔우는 밭은 업(業)이라는 것이다.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뢰야에 아무리 많은 정보가 담겨 있어도 씨앗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씨앗을 싹트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인간의 사유와 언어 그리고 몸으로 짓는 행위들이다.
그리고 아뢰야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도록 촉진하는 것은 인간의 애착이다. 씨앗을 파종하고 물을 주면 싹이 트는 것처럼 애착으로 오염된 사유와 언어, 행동은 아뢰야에 싹이 돋도록 물을 주고 가꾸는 것과 같다. 애착이 강할수록 오염된 사유와 언어 그리고 행동은 깊어지고, 그렇게 인간의 업이 애착으로 젖어들면 그때 아뢰야에 저장된 정보는 싹을 틔운다. 따라서 아뢰야를 완전히 끊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애착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애착을 줄이면 오염된 행위가 줄어들고, 그렇게 하면 아뢰야라는 씨앗이 파종될 밭이 사라져 번뇌의 씨앗이 싹트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뢰야는 생사유전하는 근원적 무명이고 속박이다. 따라서 아뢰야의 근본무명을 끊지 못하면 영원토록 생사고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불교에서 해탈이란 육신의 욕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사윤회라는 근본적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결국 부처님처럼 정각을 이루고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하고자 한다면 몸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아뢰야의 근본무명을 뿌리 뽑아야 한다. 돈오돈수를 통해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해야 한다는 성철 스님의 구경각론은 이와 같은 인식에서 나온 수행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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