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승, 성철]
"돈오돈수로써 생사해탈 할 수 있어" - 선방 수좌 원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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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3 년 5 월 [통권 제1호] / / 작성일20-06-29 14:45 / 조회10,598회 / 댓글0건본문
‘나의 스승, 성철’에서는 성철 스님 제자들의 인터뷰를 연재한다. 성철 스님을 만난 인연과 가르침을 받았던 일화, 자신의 공부 이야기 등을 가감 없이 전달할 예정이다. 첫 번째 순서로 출가 이후 줄곧 선원에서 수행해온 원규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편집자
지난 동안거였다.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을 맞아 진행한 ‘선림보전’ 특강에서 『육조단경』을 맡아 강의해 줄 스님으로 원규 스님이 확정되었다. 나름 성철문도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원규 스님의 법명은 낯설었다.
1월 말 원규 스님이 강의를 하기 위해 토굴에서 올라왔다. 준수한 인상에서 ‘수좌’의 느낌이 금세 배어 나온다. 2회 4시간의 강의를 마친 스님은 얼마 후 조계사 선림원에서 6차례에 걸쳐 다시 『육조단경』 강의를 진행했다.
선림원 강의 종강을 하던 날 스님을 만났다. 시골에만 있다가 서울에 다니면서 머리가 아팠다던 스님은 “이제 홀가분하게 됐다. 강사도 아니고 불교학자도 아니지만 청중들이 너무 진지하게 들어줘 내가 오히려 신심이 났다.”고 전했다.
스님은 인터뷰를 통해 “은사스님이 강조하신 돈오돈수(頓悟頓修) 사상이야말로 생사를 해탈할 수 있는 확실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 토굴에서 정진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시골 벽촌에서 농사도 짓고 흙도 밟으며 동정(動靜)공부를 하며 지냅니다.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항상 화두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 예전에도 지리산에서 10여 년간 토굴 수행을 하셨다고 하던데요?
“10년 정도 대중 선방에 다니다가 지리산 토굴에서 지냈습니다. 당시 토굴에 들어갈 때 3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책을 보고 싶거나, 사람이 그리워지거나, 불사(佛事)를 하고 싶으면 토굴에서 나오기로 스스로 약속했습니다. 생활을 해보니 책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 불사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요. 사람 그리운 것은, 제 토굴이 큰 절 뒤에 있어서인지 가끔 선객 스님들이 다녀가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토굴 앞에 큰 독사 한 마리가 살았는데 처음에는 무서웠던 그 뱀도 나중에는 가까이 가서 보게 되며 친해지더군요. 그러면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소중하고 또 친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철저하게 고독해져 봐야 진아(眞我)를 안다는 말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공부를 바르게만 하면 토굴에서도 수행자는 굶어 죽지 않는다는 어른 스님들의 말씀이 있었는데 이렇게 죽지 않고 잘 살고 있습니다.”
- 최근 『육조단경』을 주해서를 내셨습니다.
"은사스님께서는 선종(禪宗)이 꽃을 피우게 된 핵심적 역할을 한 책이 바로 『육조단경』이라고 하셨습니다. 1986년도에 은사스님께서 돈황 필사본인 원문을 교정하여 단경을 내셨는데, 교정한 원문이 복잡하고 세로쓰기 형태에다 구어체가 많아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조금 어렵게 느낄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윤문을 하고 1972년도에 해인사 방장으로 계시면서 하신 덕이본 단경 법문을 채록하여 정리해 은사스님의 돈황본 단경에 주해를 달아보았습니다. 누가 해도 해야 할 일을 제가 망상을 피워보았을 뿐입니다.”
- 성철 스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저는 출가(出家)라는 것은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던 저에게도 출가의 인연이 찾아 왔습니다. 22살에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들어하고 있을 때 속가의 바로 위 형님께서 해인사 일타 스님을 찾아뵈라고 추천했지요. 그래서 그 해 여름에 일타 스님을 찾아갔는데 스님께서는 불국사 석굴암으로 하안거를 가셔서 안계셨습니다. 헛걸음만 친 것이 아닌가 하고 다시 해인사를 내려오다 사형(師兄)이신 원택 스님을 길에서 만났습니다. 스님께서는 바랑을 메고 양손에 짐들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지요. ‘제가 좀 들어 드리겠다’고 하면서 같이 걸었어요. 원택 스님에게 ‘어떤 사람이 출가를 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으니 ‘부처님을 믿는 신심(信心)만 있으면 출가를 할 수 있다’고 얘기해줬어요. 원택 스님은 저에게 백련암을 소개해 주고 큰절로 가셨어요. 마침 해도 저물고 해서 저는 백련암으로 올라갔습니다. 가보니 은사스님이 계셨어요. 의자에 앉으셔서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시는데 그때 정말 눈에서 빛이 나서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었어요. 인사를 드리고 밤을 새워 3천배를 했습니다. 3천배를 하면서 확신이 서서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 성철 스님께서 따로 해주신 말씀은 없었나요?
“스님께서는 ‘여기서는 혼자 다 알아서 해야 한다. 혼자서 옷도 빨아 입고 밥도 해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나가 봐’라고 하셨지요. 그렇게 저의 행자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1977년 7월의 일이다. 스님이 출가했을 때 백련암에는 원택 스님, 원행 스님, 원천 스님, 원담 스님이 성철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다. 당시 백련암 분위기에 대해 스님은 “정말 엄격하고 살얼음을 걷는 그런 분위기였다.”고 회고했다.
- 행자 생활은 어떠셨어요?
“당시에는 보통 행자를 1년 과정으로 했는데 저는 9개월간 했습니다. 행자를 하다 군대를 가야 해서 제대하고 계(戒)를 받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은사스님께서는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9개월 만에 행자를 마쳤습니다.
행자 때에는 반찬을 만드는 소임인 채공(菜供)을 주로 했습니다. 채공은 어려운 소임입니다. 그래서 비교적 나이 어린 사람들을 많이 시켰어요. 사실 공양주를 하고 싶었는데 나이가 어려서 채공으로 밀렸습니다. 하하.
그 당시 은사스님께서는 공양 시간 외에 먹는 것에 대해서는 엄한 경책을 하셨어요. 먹다가 걸리면 쫓겨나던 시절이었어요. 하루는 부식거리를 가지러 다락에 올라갔다가 너무 배가 고파 옆에 보이는 빵을 하나 집어 먹으면서 공양간으로 내려오다가 들켰지요. 마침 포행을 하시던 은사스님께 보신 거죠. 바짝 긴장해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데 스님께서 목소리를 낮추시면서 ‘많이 묵으레이’라고 하시면서 환한 얼굴로 그냥 지나가셨어요. 평소 은사스님은 항상 엄한 분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뛰어다니는 20대 행자의 배고픈 심중을 읽고 이렇게 부드러운 자비(慈悲)도 베푸신 그런 분이셨습니다.”
스님이 행자생활을 하면서 보았던 일화 하나. 성철 스님은 필요한 일이 아니면 좀처럼 백련암 문을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스님이 행자인 원규 스님을 불러 길을 따르게 했다. 엉겁결에 백련암에서 해인사로 가는 오솔길을 따라 급하게 내려갔다. 저 아래에서는 체구가 건장한 스님이 발걸음을 재촉하며 백련암으로 급히 올라오고 있었다. 서로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큰소리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향곡이가?” “성철이가?” 평생의 절친한 도반이었던 두 스님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두 스님은 서로를 얼싸안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때 원규 스님은 향곡 스님을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원규 스님은 “그 당시의 장면은 너무도 천진한 두 도인의 만남이었다.”고 말했다.
스님은 계를 받고 군대에 가 1981년 1월 백련암으로 ‘복귀’했다. 본격적인 출가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스님은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을 시봉하면서 공부를 했다. 『불교성전』, 『법구경』, 『정토삼부경』, 『반야심경』, 『금강경』, 『열반경』, 『유마경』, 『천태사교의』, 『법화경』, 『기신론』, 『유식』 등 경전과 선어록 20종 이상을 읽었다.
“낮에는 소임을 보고 저녁에는 경전을 봤어요. 공부하면서 궁금한 것은 은사스님께 여쭈었는데 자상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3년 여간 백련암에서 소임을 맡았던 스님은 1984년부터 본격적으로 선방을 다니기 시작했다. 첫 안거를 보낸 수도암을 비롯하여 해인사, 봉암사, 정혜사, 송광사, 동화사 등 전국의 선방에서 정진했다.
- 선원에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한 계기가 있었나요?
“제대 직후에는 선방에 갈 생각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형이신 원행 스님이 선방에 다니다가 건강이 안 좋아져 치료도 할 겸 해인사 청량사를 맡았어요. 그때 청량사는 아주 퇴락한 절이었어요. 그때는 전기도 안 들어오고 찻길도 없었습니다. 원행 스님과 함께 초가지붕을 허물고 요사채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사채를 지어준 목수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건강하던 그 목수가 갑자기 생사(生死)를 달리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정말 무상(無常)이 가슴 깊이 스며오며 죽음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해 곧바로 선원에 가게 되었지요.”
- 화두를 받고 선방에 가신 건가요?
“수도암 선원에 갈 때는 급하게 간다고 화두를 정식으로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 당시 은사스님께서 일률적으로 주시던 ‘삼서근(麻三斤)’ 화두를 가지고 첫 철을 지냈습니다. 화두를 정식으로 받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 해제하던 날 백련암으로 가서 밤새 3천배를 하고 ‘정식으로’ 삼서근(麻三斤) 화두를 받았습니다.”
“공부가 어떠신 것 같으냐?”는 질문에 스님은 “견성성불(見性成佛)하기 전에는 항상 시작일 뿐”이라며 웃었다.
- 성철 스님이 핵심적으로 강조하셨던 것은 무엇인가요?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만큼 항상 자성(自性)을 깨쳐야만 불법(佛法)을 알 수 있다고 강조하셨어요. ‘선종(禪宗)에서는 자성자오(自性自悟)해서 돈오돈수(頓悟頓修)하여 역무점차(亦無漸次)’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공부를 해보니 돈오돈수로 생사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단경』에서도 선종의 바른 길로 돈오돈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백련암에 있을 때 『선문정로』가 나왔습니다. 저도 책을 얻어 이틀 만에 다 읽었습니다. 책을 보면서 ‘선(禪) 공부의 바른 길은 이것(돈오돈수)이다’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은사스님이 열반하시기 전 해에 시봉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어느 날 스님께서 ‘돈오돈수는 일체망상이 다 떨어진 것이고 돈오점수(頓悟漸修)는 망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깨달음이냐?’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 성철 스님의 가르침 중 꼭 후학들에게 계승되고 지켜졌으면 하는 것이 있을까요?
“많은 것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저는 ‘수좌 5계’를 꼽고 싶습니다. 수좌 5계는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지키고 실천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수좌 5계는 성철 스님이 공부하는 스님들에게 당부한 ‘정진 지침’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간식하지 말라 △돌아다니지 말라 △말하지 말라 △잠을 적게 자라 △책 보지 말라 등으로 기본적으로 금기와 금욕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 세간에 알려진 성철 스님에 대한 인식 중 스님께서 좀 설명해 주실 것이 있을까요?
“은사스님께서 제자나 불자들에게 경책을 워낙 심하게 하시니까 사람들은 ‘도인이 왜 저렇게 화를 낼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은사스님의 경책을 단순한 ‘화’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보통 일반인들은 화를 내면 가슴에 상처도 남고 그렇다 보니 얼굴을 보면 그 상처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은사스님의 경우를 보면 당신께서 생각한 것에 부합하지 못할 때 후학이나 제자들을 경책하신 것입니다. 은사스님은 경책할 때 절대 ‘화’를 내신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경책을 하셨어요. 얼굴에서도 노여움 같은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또 돌아서면 언제 그랬느냐하며 금방 잊어버리십니다. 중생심의 감정에서 나오는 화와 은사스님의 교육적인 경책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 성철 스님은 어떤 스승이셨나요?
“정말 자신에게 엄격하고 철저한 수행자셨습니다. 또 강함과 부드러움을 같이 쓰셨고 자신과 남에게 약속한 것은 끝까지 지키고 실천하신 그런 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스님께서는 ‘스승’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스승은 지혜와 안목을 갖춰 밥 줄 사람한테는 밥을 주고 매를 줄 사람한테는 매를 주는 그런 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비(慈悲)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철 스님은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스승이셨습니다.”
-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잇고자 하는 스님의 향후 계획을 소개해 주신다면요?
“수좌가 무슨 계획이 있겠습니까? 확철대오(廓撤大悟) 하는 것만이 가장 바쁜 일이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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