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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음미하는 부처님 말씀]
'만작滿酌'과 '일심불란一心不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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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학  /  2019 년 5 월 [통권 제73호]  /     /  작성일20-06-26 09:59  /   조회7,07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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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학 | 작가 · 자유기고가

 

만작滿酌. 잔 가득 술이 채워지는 모습을 그려 보이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여 가득 채워진 술잔을 일컫기도 하지요. 애주가라면 그 말만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릴 법합니다. 대단한 근육질을 아니어도 상당한 힘을 내장한 말입니다. 대개 이런 말은 의미의 울타리를 사뿐히 뛰어넘습니다. 다른 용례를 보겠습니다. 

 

활쏘기 즉 궁술에서도 ‘만작滿酌’이라는 말을 씁니다. 화살을 메긴 시위를 최대한 당긴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최대한’이라 해서 있는 힘을 다 쓰는 건 아닙니다. 넘치지 않을 만큼, 활과 활 쏘는 사람의 몸이 이상적으로 합일된 상태를 가리키겠지요. 비유컨대 가득 채워진 술잔을 들어 올려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안정된 자세 말입니다. 

 

모든 기예가 그렇듯이 활쏘기에서도 자세를 무겁게 여깁니다. 활쏘기의 세계에서는 활을 쏘는 자세를 궁체弓體라고 합니다. 독특한 어법입니다. 글자 그대로 이해하자면 활의 몸 또는 활 그 자체를 일컬어야 할 텐데 말이지요. 하지만 매력적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행위의 주체를 투명하게 지워버렸으니까요. 쉬운 말이 아닙니다. 행위에서 행위자를 지워버린다는 것은 해탈의 경지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활 쏘는 사람의 궁체가 그 경지를 보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활에 속절없이 끌려 다니는 몸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궁체의 궁극적 지향점이 하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활 쏘는 사람의 몸이 활이 된다는 것은 활 또한 사람의 몸이 된 상태일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물아일체ʼ의 상태라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상태를 해탈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활 쏘는 사람이 만작의 상태에서 만작인지도 잊고 흔들림 없이―활의 본래 성품이 되어―시위를 놓아야 하는 순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흔들림 없이 놓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활과 활 쏘는 사람의 분리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마침내 해탈일까요. 아닙니다. 아직 해탈의 길은 아득합니다. 과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적어도 여기까지는 이성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만작한 궁체에서 발사된 화살이 과녁을 향해 날아갑니다. 명중이든 아니든 둘 중 하나입니다. 명중이면 해탈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반대로 과녁을 벗어났다면 해탈과 거리가 먼 것일까요? 그것을 판단할 사람은 또한 누구일까요. 이러한 판단에서 선지식의 존재는 절대적입니다. 여하튼 어려운 문제입니다.

 

‘타력’의 활쏘기 

 

오늘날 활쏘기는 전쟁과 사냥의 살상 행위라는 태생적 목적과 거리가 멉니다. 취미(오락), 스포츠, 수양으로 행해집니다. 궁도라는 말이 궁술보다 자연스럽게 쓰이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의 전통적 활쏘기를 (양궁에 상대하여) 국궁이라 합니다. 국궁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궁도’는 일본에서 쓰는 말이므로 멀리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그쪽 집안 사정이므로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살짝만 끼어들어 볼까 합니다. 

 

일본에서도 궁도라는 말을 아주 오래전부터 써 오지는 않았습니다. 일본 고유의 전쟁 기술이었던 ‘유술柔術’이 ‘유도柔道’로 변신하여 호응을 얻은 데 자극을 받아서 ‘궁도’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유술이 유도라는 말로 바뀐 때는 메이지 시대 전후 무렵이었던 것 같고, 궁도란 말이 쓰이기 시작한 된 때는 20세기 초반으로 보입니다. 요컨대 살상 기술로서의 궁 술이 존재 가치를 잃은 시대 변화에 일본이 좀 더 빨리 반응한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들도 ‘기무치’를 먹지 않습니까. 그래도 궁도라는 말이 꺼림칙하다면 ‘활쏘기’라고 하면 될 일이지요. 

 

궁도 얘기가 나왔으니 그 세계로 한 걸음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일본 궁도의 명인으로 아와 겐조(1880~1939)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20세 쯤에 활쏘기에 입문하여 22세에 최고단자가 되었다고 하니 천부적 자질을 타고났던 모양입니다. 30대에 들어 아와 겐조는 백발백중의 달인이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도 아와 겐조는 명중을 중요시하는 궁술 풍토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와는 궁술에 관한 오래된 책 한 권을 읽고 개안합니다. 그 동기는 궁술의 기술을 총망라한 다음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음을 나는 안다.”고 말한 한 문장이었습니다. 부연하자면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이겠지요. 이때부터 아와는 기술적 숙련만을 강조하는 기존의 궁술을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사도射道’를 주창합니다. ‘사도’를 통해서 인간의 본성에 이를 수 있다 했습니다. 41세가 되던 해에는 ‘대폭발’을 경험합니다. 아주 간단히 표현하자면 ‘자아’가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한 발에 목숨을 건다’ 또는 ‘발사에서 본성을 깨닫는다’는 통찰을 하게 되었고, ‘활’과 ‘선禪’은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대폭발’ 다음 해 아와에게 한 독일인이 찾아와 제자가 되었습니다. 철학자 오르겐 헤리겔(1884~1955). 신칸트학파의 이 철학자는 왜 활쏘기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었을까요. 그는 선禪의 세계에 이르는 우회로로 궁도를 선택했습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신을 넘어선 신’과의 만남, ‘주관적 초탈이 아닌 진정한 초탈’을 경험하게 하는 ‘위대한 가르침’에 다가서기 위해서였습니다. 헤리겔은 6년 동안 아와에게서 활쏘기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가르침’의 세계에 들어가기까지 넘어야 했던 ‘저항감’과 ‘거부감’을 가감 없이 드러낸 책을 썼습니다. 굳이 ‘저항감’과 ‘거부감’을 밝힌 이유는 (서구의) 독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일종의 백신 같은 것이라고 이해해도 좋겠지요. 그것은 거의 서구화된 삶을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궁도가 정신적인 수련이라면 “왜 아직도 화살과 과녁이 필요하단 말인가?”, “궁사의 자기 자신과의 대결”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입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서 수련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스승과 나눈 대화 몇 대목만 보겠습니다. 『마음을 쏘다, 활』이라는 책입니다.(오이겐 헤리겔 지음, 정창호 옮김, 걷는책. 원제는 『Zen in der Kunst des Bogenschießens』, 직역하면 『활쏘기의 선禪』입니다.) 

 

“제발 명중이라는 말을 머리에서 지워버리세요. 백발백중이 아니라도 명궁이 될 수 있습니다. 저기 있는 표적에 명중시키는 것은 최고도의 무심, 무아지경, 자기 몰입, 또는 뭐라 이름붙이든 간에, 이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외적인 검증에 불과합니다. (…)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사람만이 비로소 외부에 있는 저 표적도 백발백중 맞힐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저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점입니다.”

 

한참의 대화가 이어진 뒤 헤리겔을 도발적인 질문을 합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지요? 선생님께서는 수십 년간에 걸쳐 연습을 해 오신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말하자면 몽유병자의 확실성 같은 것으로 활과 화살을 당기고 놓는다고 말입 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겨냥을 하시지는 않지만, 표적을 명중시키고 또 명중시킬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지요.” 

 

헤리겔의 질문은 “눈을 가리시고도 표적을 맞힐 수 있어야만 한다.”는 말로 비약합니다. 두 사람은 저녁에 다시 만났습니다. 스승은 표적 앞에 가느다란 향 하나만 꽂고 불은 껐습니다. 스승의 화살이 어둠 속으로 날아갑니다. 과녁에서 울리는 소리가 명중을 알립니다. 한 발 더 명중. 두 번째 화살은 첫 화살의 대를 쪼개면서 검은 점에 꽂혔습니다. 스승이 말합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첫 번째 발사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저 표적대에 익숙해졌으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표적이 어디 있는지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다른 변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화살을 맞힌 두 번째 화살,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찌 됐든 이 두 번째 발사의 주체가 ‘내’가 아니 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쏘았고, 명중시켰습니다. 부처께 하듯이 예를 표합시다.” 

 

이후로 다시 몇 달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헤리겔이 훌륭한 발사를 했을 때 스승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쏜다는 말, ‘그것’이 명중시킨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아니요. 도대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 제가 활을 당기는 것인지, 아니면 활이 저를 최대의 긴장으로 당기는 것인지. 아니면 표적이 저를 맞추는 것인지. ‘그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면 정신적이고, 정신의 눈으로 보면 육체적인지. 또는 둘 다인지. 그도 아니면 둘 중 아무것도 아닌지. 활, 화살, 표적, 그리고 저 자신, 이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어서 더 이상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분리하려는 욕구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활을 잡고 쏘는 순간 너무도 맑고 명료하며, 그저 우습게 느껴지기….”

 

제자의 말을 끊으며 스승이 말했습니다.

 

“방금 마침내 활시위가 당신의 한가운데를 꿰뚫고 지나갔습니다.”

 

신비주의적 색채도 다분한 대화입니다. 위 대화 내용 가운데 ‘그것’이 쏘고 ‘그것’이 명중시킨다는 것이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인지,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타력’으로 이해합니다. 다소 긴 인용을 한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타력.

 

불교 신앙의 형태를 두 가지로 대별하면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이 될 것입니다. ‘자력문’, ‘타력문’이라고도 합니다. 전자는 스스로 열반을 성취하는 깨달음의 문 즉 성도문聖道門, 후자는 아미타불의 힘으로 정토에 태어나서 깨달음을 이루는 길 즉 정토문淨土門입니다. 행하기 어려운 길이라 하여 난행도難行道, 행하기 쉬운 길이라 하여 이행도易行道라고도 불립니다. 정토문을 쉬운 길이라 하는 것은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 극락에 왕생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과연 쉽습니다. 정말 그럴까요?(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겠습니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왜 쉬운 길을 두고 자력문만을 내세울까요? 염불은 아예 둔한 근기의 하열한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치부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에 가깝습니다. 대부분의 신도들의 기도는 염불이 주를 이룹니다. 스님들이라 하여 크게 다르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깨달음만 강조합니다. ‘마음’을 보라고, ‘참나’를 찾으라고 채근합니다. 집단적 자기기만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집지명호執持名號’, ‘일심불란一心不亂’

 

정토교의 근본 경전 가운데 하나인 『아미타경』의 핵심은 ‘집지명호執持名號’, ‘일심불란一心不亂’입니다. ‘아미타불의 이름 부르기를 간절히 하여’ ‘마음을 하나로 모아 어지럽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경전을 보겠습니다. 

 

사리불이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말씀을 듣고 그 이름을 기필코 놓지 않고 불러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나, 나흘이나, 닷새나, 엿새나, 이레 동안 마음을 하나로 모아 어지럽지 않게 하면[일심불란一心不亂] 그 사람이 운명하려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인들과 함께 그를 마중하시니라. 마침내 그의 목숨이 다해도 그의 마음은 전도되지 않아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즉시 왕생하느니라. 

 

아미타불을 간절히 부른다는 것은[집지명호執持名號] 마음을 하나로 모아 어지럽게 않게 하는 일[일심불란一心不亂]입니다. 사실 ‘일심불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아미타불’을 부르라는 것이겠지요.

일심불란. 참학자의 삼매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정녕 일심불란의 경지란 화두를 타파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 일이 어찌 쉽겠습니까.

 

요즘 전 세계적으로 호응 받는 명상 수행법인 ‘마음챙김’의 이론가이자 임상가인 크리스토퍼 거머는 ‘일심불란’의 경지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마음챙김은 어렵지 않다. 마음이 끓임 없이 방황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더라도 낙담해서는 안 된다. 그게 마음의 속성이니까. 방황하는 마음을 결국 인지하게 되는 것도 또한 마음의 속성이다. 역설적이게도, 마음챙김을 하게 되는 때는 마음챙김을 못했다고 낙담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마음챙김 수행을 완벽하게 하기란 불가능하며, 또한 실패하려야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것을 ‘수행’이라도 부르는 것이다.” 정토문의 수행관을 바탕에 둔 견해가 아닐까 하는 착각일 들 정도입니다.(『오늘부터 나에게 친절하기로 했다』, 크리스토퍼 거머 지음, 서광 스님 옮김, 더퀘스트.)

 

어렵지 않기로 치면 칭명염불이 으뜸이겠지요. ‘나무아미타불’ 하고 부르는 일은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일심불란은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더욱 간절히 아미타불을 염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하면 염불 행위가 곧 ‘일심불란’일 것입니다. 간절한 염불은 의정이 순일한 것과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자력문, 타력문이라는 것도 결국은 둘이 아니겠지요.

 

용수 보살은 “불법에는 무량한 문이 있다. 세상의 도에 어려운 것이 있고 쉬운 것이 있는 것과 같다. 행하기 쉬우면 빨리 도착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염불하여 명호를 부르라. 아미타불의 본원이 이와 같다.” 했습니다.

아미타불의 본원이란 아미타불이 법장 비구 때 세운 48가지 원을 말합니다. 『무량수경』에 전하는 그 본원 가운데 제18원은 고래로 많은 이들이 의지했던 원입니다.

 

내가 부처가 되는 때가 오더라도,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지극한 마음으로 환희심을 내어 내 이름을 열 번 불렀는데도 나의 나라에 태어날 수 없다면 나는 정각을 이루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오역죄를 범한 자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합니다. 

 

우리가 아미타불을 부르는 순간은 아미타불의 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다만 오역죄를 범한 자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하지만 『관무량수경』에서는 그런 사람들조차도 10번만 아미타불을 끊임없이 부르면 극락에 태어난다 했습니다. 여기서도 ‘선지식’을 만나야 한다는 단서가 붙긴 합니다만. 다시 활 얘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활쏘기에서 ‘만작’은 ‘일심불란’의 경지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만작을 위해 끝없는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마저 잊고 만작하게 되듯이, 간절히 아미타불을 부르면 일심불란하게 되겠지요. ‘생각하는 사람’ 하면 떠올리게 되는 ‘로뎅’이 말했습니다. “영감이란 없다. 작업이 있을 뿐.” 로뎅의 말에서 일상이 염불이어야 하는 이유를 다시금 확인합니다. 일이 염불이고 염불이 일이 되는 그 순간이 곧 극락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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