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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빛의 말씀]
불법승(佛法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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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0 년 6 월 [통권 제86호]  /     /  작성일20-06-22 13:42  /   조회73,03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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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대한불교조계종 제6, 7대 종정)

 

“마음 청정이 부처요, 心淸淨是佛, 

 마음 광명이 불법이요. 心光明是法. 

 청정·광명해 걸림 없는 것이 스님이다. 淨光無礙是僧.”(주1)

 

이것은 임제臨濟스님 법문인데, 실제로 심청정心淸淨이 되고, 심광명心光明이 되고, 정광무애淨光無礙가 되어야 바로 깨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정하다’, ‘깨끗하다’ 하면 어느 정도로 깨끗한 것인가? 구름 한 점 없는 허공, 그 허공이 참 깨끗합니다만 그것은 마음이 깨끗하다고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래서 허공이 깨끗하다는 그것도 또 한 방망이 맞아야 한다〔虛空也須喫棒〕(주2)고 말합니다. 마음 깨끗한 것에 비하면 허공도 깨끗한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망중한을 즐기는 성철 스님(오른쪽)과 향곡스님

 

 

마음이 깨끗한 것을 명경에 비유합니다. 먼지 한 점 없는 그 명경이 얼마나 깨끗하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명경이 깨끗하다는 그런 유類가 아닙니다. 어떤 스님이 말했습니다.

 

“거울을 부수고 오너라, 打破鏡來, 

 너와 서로 보리라. 與汝相見.”(주3)

 

그렇다면 불교에서 수행해 가는 차제次第로 보아서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참으로 깨끗한 마음, 청정한 마음인가? 구경각을 성취하기 전에는 십지등각十地等覺도 심청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지등각은 아주 거친 망상〔추중망상麤重妄想〕은 떨어졌지만 자신도 모르게 제8아뢰야의 미세한 망상〔微細妄想〕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의식세계인 제8아뢰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떨어져야만 이것이 참다운 청정입니다. 그러면 허공보다 더 깨끗하고 거울보다 더 깨끗합니다. 이 자리는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무심경계로 진여자성이니, 성불, 견성이니 하는데, 이것은 말로서가 아니고 실제 경험에서 그 경지를 체득體得해야 됩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무심無心경계가 나타나면 목석과 같은 무심인가, 아닙니다. 거기에서, 그 깨끗한 마음에서 큰 광명이 나타납니다. 이 광명을 예전 스님들은 천일병조千日並照라고 말했습니다. 천일병조! 해가 하나만 떠도 온 세계가 이렇게 환히 밝은데 하나, 둘, 셋도 아니고 천 개의 해가 일시에 두루 비추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오히려 유한입니다. ‘천千’이라는 숫자가 있으니까.

 

마음이 청정한 여기에 생기는 광명은 천 개의 해가 한꺼번에 비추인다 해도 오히려 적당하지 않은 광명이니 불가설不可說, 말로써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방제불이 일시에 출현하여 하루 이틀도 아니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이 광명을 설명하려 해도 다하지 못하는 참다운 광명이다, 이 말입니다. 이제 심광명이라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광무애淨光無礙, 즉 청정과 광명이 서로서로 거리낌이 없다,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이 있으면 빛이 있고 빛이 있으면 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청정은 불에다 비유할 수 있고 광명은 빛에다 비유할 수 있어서 불이 즉 빛이고 빛이 즉 불입니다. 빛 여읜 불이 따로 없고 불 여읜 빛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 둘이 될 수 없는 이것을 무애라 합니다.

 

육조 스님도 정定과 혜慧를 말할 때 불과 빛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근본 요점은 어디 있느냐 하면 심청정, 심광명을 성취하여 참으로 허공보다 더 깨끗하고 명경보다 더 깨끗한 무심경계만 증득하면 자연히 거기서 천 개의 해가 일시에 비추는, 비유할 수 없는 그런 대지혜 광명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광무애라 합니다. 빛 따로 있고 불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빛이 즉 불이고 불이 즉 빛이다, 이런 말입니다.

 

이리하여 ‘청정’은 부처님〔佛〕이라 하고, ‘광명’은 법法이라 하고, ‘무애’는 스님〔僧〕이라 하여 불법승 삼보三寶가 되는데 세 가지가 각각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불〔火〕이라 말할 때는 부처님을 표현하고, 빛〔光明〕이라 말할 때는 불법을 표현하고, 불이 즉 빛이고 빛이 즉 불이다 말할 때는 스님을 표현하는 것이니, 표현은 각각 달라도 내용은 똑같습니다. 불이 빛이고 빛이 불이지 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법승 삼보 즉 청정, 광명, 무애가 하나인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셋이 즉 하나이고, 하나가 즉 셋이다〔三卽一, 一卽三〕(주4)”라고 합니다. 이 근본법을 바로 깨쳐서 실제로 증득할 것 같으면 그때에야 비로소 불법을 아는 동시에 모든 속박을 다 벗어나서 자유자재한 대해탈을 성취한 때입니다.

 

그러면 모든 속박은 왜 생기느냐? 번뇌망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으면 우리가 자유롭게 다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번뇌망상이 다 떨어지고 무심을 증득하여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경지를 성취할 것 같으면 모든 속박을 다 벗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진정한 자유라고 합니다.

 

눈감은 봉사에게 무슨 자유가 있습니까? 이리 가도 엎어지고 저리 가도 엎어지고 조금도 자유가 없지만 자기가 눈을 뜨면 온 천지를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를 봉사라 하는가? 크게는 산도 보고 작게는 먼지도 다 보는데 어째서 우리를 두고 눈감았다고 하는가? 한 가지 비유를 말하자면 우리가 깨쳤다는 것은 꿈을 깨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그 꿈속에서는 모든 활동이 자유자재하고 아무 거리낌이 없는 것 같지만 그것이 꿈인 줄 모릅니다. 일단 꿈을 턱 깨고 나면 “아하! 내가 참으로 꿈속에서 헤맸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중생들이 세상을 살면서 그것이 꿈인 줄을 모릅니다. 꿈속에 사는 줄을 모릅니다. 실제 그 꿈을 깨고 나야, 그제야 비로소 여태까지 꿈속에서 살았구나 하는 것을 참으로 알 수 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 아니면 꿈을 모르는 것과 같이, 깨쳤다는 것은 실지 마음의 눈을 떠서 깨어나기 전에는 이해하기가 참으로 곤란합니다. 예전 장자莊子도 “크게 깨고 나서야 큰 꿈을 알 수 있다〔大覺然後知大夢〕.”(주5)고 하였습니다.

 

중생이 번뇌망상의 유심有心 속에 사는 동안은 전체가 꿈입니다. 그래서 십지등각도 꿈속에 사는 줄 알아야 됩니다. 오직 제8아뢰야 근본무명이 완전히 끊어져서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그때에야 꿈을 바로 깨친 사람, 즉 부처입니다.

 

성불하기 전에는 꿈을 바로 깬 사람이 아니고 동시에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중생의 자유라 하는 것은 꿈속 자유이고 깨친 사람의 자유라 하는 것은 꿈을 깬 뒤의 자유이니, 꿈속에서의 자유를 어떻게 ‘자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꿈과 생시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말한 깨쳤다는 것을 대강은 짐작할 것입니다. 깨쳤다는 내용이, 성불했다는 내용이 무심에 있는데 무심을 증하면 거기에서 대지혜 광명이 생기고 대자유가 생깁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꿈을 깬 사람,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이 되어 대자유자재한 활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부처도 필요 없고, 조사祖師도 필요 없고, 팔만대장경도 다 필요 없습니다. 부처다, 조사다 하는 것은 다 중생이 꿈을 깨우기 위한 약에 지나지 않습니다. 약! 중생의 근본병인 꿈을 완전히 깨우고 나면 약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병이 있을 때 약이 필요하지 병이 다 낫고 나면 약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꿈을 완전히 깨워서 참다운 해탈을 성취하면 그때 가서는 부처도 필요 없고 조사도 필요 없는 참다운 대자유입니다.

 

“장부가 스스로 하늘 찌르는 기운 있거니 丈夫自有沖天氣,

 부처가 간 길은 가지 않는 도다. 不向如來行處行.”(주6)

  

 

내 길, 내가 갈 길이 분명히 다 있는데 무엇 한다고 부처니 조사니 하여 딴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가느냐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참다운 대자유자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 일반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겠습니다. 종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개 초월신超越神을 주장합니다. 이 현상계現象界를 떠난 저 천상에 있는 초월신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을 그 초월신에 맡기고 그 밑에 무조건 절대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그 초월신의 뜻대로 되게 해주시오, 이런 식입니다. 이리하여 죽고 나면 그 초월신이 사는 곳에 가서 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초월신을 섬기면서. 

 

그러나 자기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일거일동이 초월신의 지배하에서 초월신의 뜻대로 살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초월신의 속박을 받는 것이니, 그런 사상은 노예도 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초월신은 주인이 되고 모든 사람은 종같이 되어 그 지배를 받아야 되니 자기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기침도 한번 크게 못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의 주장은 다릅니다. 본시 인간이란 불성佛性이 다 있어서 자성自性이 청정하고 깨끗하여 거기에는 부처님도 설 수 없고 조사도 설 수 없습니다. ‘심청정’하여 깨끗하다고 한 거기에서는 부처도 때〔垢〕이고, 조사도 때입니다. 팔만대장경은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고!

그토록 깨끗한 곳,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곳에서는 부처의 지배도 받지 않고 조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어떤 지배도 받지 않는 대자유 대해탈 경계입니다. 어떤 속박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외부의 상대적인 무슨 지배를 받고 무슨 속박을 받고 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대 금기禁忌입니다. 이것이 대해탈인 동시에 성불이며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도 자유에 대해 많이들 말합니다. 인간은 자유이며 평등이라고. 그러나 참다운 자유는 심청정을 실제로 증하고 심광명을 증해서 청정과 광명이 거리낌없이 무애한 그 속에서 놀아야만 비로소 참으로 대자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고 무조건 복종하고, 이렇게 되면 자유가 어디 있습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해탈되어 있습니다. 해탈되어 있는데 번뇌망상 때문에 여러 가지 구속이 생겨났습니다. 번뇌망상만 완전히 끊어 버리고 무심을 증하여 본래의 대자유를 회복할 것 같으면, 그러면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입니다. 내가 가장 높다 그 말입니다. ‘나’라는 것도 설 수 없는 것인데, 부처님께서 말로 표현하자니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다운 자유를 얻으려면 심청정, 심광명, 정광무애를 성취한 대해탈 경계를 성취하면 천상천하에 무애자재합니다. 그런 자유자재한 생활을 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목표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신론』에서 말하듯이 모든 고통을 벗어나서 구경락을 얻습니다〔離一切苦 得究竟樂〕(주7).

설사 초월신을 숭배하여 그 세계에 가서 난다고 해도 거기에서도 신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그런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일체고離一切苦가 안 됩니다. ‘이일체고’라 하는 것은 부처님의 속박도 받지 않고 어떠한 속박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대자유입니다. 이런 대자유는 우리 불교 이외에는 없다고 나는 단정합니다.

 

불교에서 해탈이다, 자유다 하는 것에는 어느 종교 어느 사상에서도 따라올 수 없는 큰 자유자재가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내 물건이지만 이것이 진금眞金인가 잡철雜鐵인가, 그것도 구별 못 해서야 되겠습니까. 실제 진금을 잡철로 착각해서는 큰일납니다.

 

이 대자유를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불교부터 버려야 합니다. 자꾸 부처님 믿고 조사를 의지하고 하면 결국은 거기에 구애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법을 성취하려면 자기 마음이 본시 부처라는 것, 이것 이외에는 전부 다 믿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부처다〔卽心是佛〕” 이것만이 바른 믿음〔正信〕이고, 이것 이외에 딴 것을 무엇이든 믿으면 그것은 삿된 믿음〔邪信〕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만 믿고 팔만대장경도 버리라고 항상 말합니다.

고불고조古佛古祖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 법을 성취하려면 

 부처와 조사를 원수와 같이 보라. 見佛祖, 如寃家相似人.”(주8)

 

부처와 조사를 원수와 같이 보라니!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자기 마음만 믿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이 부처이고 자기 마음이 조사입니다. 자기 마음이 극락이며 자기 마음이 천당입니다. 자기 마음을 놓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처와 조사는 꿈속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부처와 조사를 원수같이 보라고 하면 말 다한 것 아닙니까.

 

예수교를 공부하는 어떤 사람이 벽에 부닥쳤습니다. 더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참선을 해보겠다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면 참선을 해야 되는데, 당신이 참선을 하려면 근본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입니까?”

“스님들도 참선을 하려면 불교부터 버려야 되는데, 당신이 예수교를 버리지 않으면 이 공부는 못 해. 예수교라는 속박에서부터 벗어나야 돼!”

“스님, 가서 생각해 보고 오겠습니다.”

“허허, 생각해 보고 온다는 말은 안 온다는 말 아냐? 예수교 못 버리면 아예 오지 말아. 그래서는 백 년 해봤자 참선參禪이 안 돼.”

 

내가 처음에 ‘심청정’이라 한 것은 부처와 조사도 설 수 없는 그런 청정을 말한 것입니다. 팔만대장경도 여기 와서는 때〔垢〕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대중들도 이것을 깊이 믿고 오직 자기가 본시 부처라는 것, 자기 마음 이외에 불법佛法이 없고, 자기 마음 이외에 부처가 따로 없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믿고 오직 화두를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로만 깨치면 그 속에서 대자유자재한 부사의不思議해탈경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요점은 어디 있느냐? 밥 이야기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실제로 밥을 먹느냐 안 먹느냐, 이것입니다. 공부 부지런히 해서, 화두話頭 부지런히 해서 내 말이 헛된 말이 안 되고 실제로 이것을 성취한 사람이 하나라도 생기도록 노력해야 안되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은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자기만을 믿으라’고 한다고 “옳지, 술 생각이 나는데 한번 가볼까?” 이렇게 했다가는 큰일 납니다. 그것은 자기가 아닙니다. 망상이고 도둑놈이란 말입니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자기’란 것은 ‘깨끗한 자기’를 말함이지 ‘거짓의 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을 성인인 공자孔子도 말했습니다. “70살이 되니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從心所欲不踰矩〕(주9).”고. 동으로 가고 싶으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고 싶으면 서쪽으로 가고, 앉고 싶으면 앉고, 무슨 짓을 해도 법도에서 어긋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쁜 짓 안 한다는 말입니다.

심청정, 허공보다 더 깨끗한 이 마음을 실제로 알고 보면, 직접 자기가 증득해 놓고 보면 이리 가도 대해탈 경계, 저리 가도 대해탈 경계, 부처님 행동 그대로입니다. 저 시방세계를 다 찾아봐도 술 먹고 싶어 날뛰는 그런 사람은 그 깨끗한 거울 속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태평양 한복판, 물이 깊고 깊어서 태풍이 불어 아무리 바닷물이 움직이고 움직여도 깨끗한 물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얕은 구정물을 보고서 “물은 꼭 같지?” 이렇게 나오면 그때는 깨끗한 물은 평생 못 보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참으로 허공보다 더 깨끗한 마음, 그것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일체의 선과 악이 다 떨어진 곳이고 부처와 조사도 설 수 없는 곳입니다. 청정한 자기를 바로 믿고, 청정한 자기를 바로 깨칩시다.  

│1982년 5월15일, 방장 대중법어│

 

주)

1) 『임제록』에 나온다. 원문은 “佛者, 心清淨是; 法者, 心光明是; 道者, 處處無礙淨光是.”이다. 道者는 수행자를 말하므로 僧者라 할 수 있다. 각주는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이하 동일.

2) 『천은선사어록天隱禪師語錄』 권제1에 나온다. 

3) 『원오불과선사어록』 권제7에 나온다.

4) 『임제록』에 나오는 구절이다.

5) 『장자』 「제물론」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은 “且有大覺而後, 知此其大夢也.”이다.

6) 『천목중봉화상광록』 권제4지3 등 여러 곳에 나온다.

7) 『대승기신론』 앞부분에 나온다.

8) 『밀암화상어록密菴和尙語錄』 「영은불해회중오비구靈隱佛海會中五比丘·행개구법어行丐求法語」에 나오는 구절이다. 

9)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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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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