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철학 최초로 중국에 소개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칸트철학 최초로 중국에 소개


페이지 정보

김제란  /  2021 년 5 월 [통권 제97호]  /     /  작성일21-05-04 15:28  /   조회5,819회  /   댓글0건

본문

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5 / 양계초 중

 

서양사상 도입의 선구자 

 

중국 근대불교는 서양사상의 도전에 대한 중국 전통사상의 대응이라는 구도로 형성되었다. 다양한 서양사상이 중국 근대에 도입되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대표적으로 실용주의, 과학주의, 베르그송 철학 등 다양한 유파가 있었고, 그 중에는 서양 근대철학의 근간이라고 할 칸트(I. Kant, 1724-1804) 철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근대 불교사상가들 중 칸트 철학을 중국에 최초로 소개하였던 인물은 양계초(梁啓超, 1873-1929)이다. 그는 1903년에서 1904년에 걸쳐 『신민총보』에 칸트 사상을 소개하는 글을 9회에 걸쳐 연재하였고, 칸트에 대한 유식불교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는 이후 서양사상과 불교를 연계하여 설명하려는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양계초는 중국근대의 대표적인 사상가로서 어려서 전통철학을 중심으로 한 교육을 받았으나 세계 지리서인 『영환지략』 등 서양 서적들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특히 1895년 강유위와 함께 강학회를 설립하고 여러 나라 서적의 번역, 신문·잡지의 발행, 정치 학교의 개설 등 혁신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후 담사동과 함께 변법운동에 진력하면서는 『만국공보萬國公報』, 『시무보時務報』, 『지신보知新報』 등 계몽적인 잡지를 발간하여 서양의 신사상을 소개하고 애국주의를 고취하였다. 『음빙실전집飮氷室全集』, 『음빙실총서飮氷室叢書』,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 『중국근대삼백년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 『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 『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 등 방대한 저술이 있다. 1900년을 전후해 호적胡適, 노신魯迅, 진독수陳獨秀, 모택동毛澤東 같은 인물들을 포함한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과 청년들이 양계초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았으며, 한용운 등 한국 근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기본적으로 양계초 철학은 국가주의와 도덕주의의 결합을 통해 당시 중국의 상황을 타개해나가고자 한 것이었다. 

 

일본 망명 시절 다양한 사상 섭렵

 

양계초의 사상적 입장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고, 크게 몇 가지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는 1896년에서 1898년까지의 변법시기이다. 이 당시 그는 강유위의 조력자로서 입헌군주제로 개혁하자는 무술변법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사상적으로는 강유위의 철학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둘째는 1901년에서 1903년 초반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그가 가장 전폭적으로 서양 문명을 수입한 시기이다. 1898년 광서제와 강유위의 개혁이 실패한 뒤 양계초는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1911년 청조가 무너진 뒤에야 중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셋째는 1903년 후반부터 1918년 개명전제를 주장하였던 시기이다. 민주공화제를 추구하는 혁명파의 등장으로 그를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고수하였다. 마지막으로 1919년부터 1929년까지 유학을 미래를 선도할 현대 정신으로 해석해간 시기이다. 그가 서양사상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은 두 번째에서 세 번째 시기 초엽에 걸쳐서 쓰여진 것이다.

 


양계초가 쓴 대승기신론고증(大乘起信論考證), 太原: 山西人民出版社, 2014

 

1898년 무술변법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한 뒤 메이지 정부가 번역해놓은 엄청난 양의 근대유럽의 산물들 앞에서 양계초는 큰 충격을 받았고,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서양의 각종 정치 사상과 철학을 섭렵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지 4개월 만에 발간하기 시작한 반월간잡지 『청의보淸議報』에서부터 등장하는 서양 사상가들의 이름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B.C.384-322)와 같은 고대 사상가는 물론 근대 유럽을 낳은 사람으로 소개되는 루소(Rousseau, 1712-1778), 베이컨(F.Bacon, 1561-1626), 홉스(T.Hobbes, 1588-1679),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그리고 칸트, 생물진화론자 다아윈(C.Darwin, 1809-1882), 사회진화론자 스펜서(H.Spencer, 1820-1903), 진화론의 혁명자라는 키드(A.Kidd, 1858-1916), 벤담(J.Bentham, 1748-1832), 정치학의 블룬츨리(J.K.Bluntschli, 1808-1881) 등 양계초가 소개한 서양 사상가들의 사상은 광범위하였다. 그는 나카에 쵸민(中江兆民, 1847-1901)이 번역한 칸트 관련 저술을 읽고 『신민총보』를 통해 중국인들에게 칸트 철학을 소개하였다. 나카에 쵸민은 일본 명치 전기에 활동한 사상가로서 정부 후원으로 프랑스에 유학한 이후 일본에 프랑스학을 소개하였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번역하고 해설한 『민약역해民約譯解』를 게재하였다. 그로 인해 양계초는 동양의 불교와 서양철학의 만남의 중요성을 인지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입장은 그 자체로 중국근대 사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후 칸트나 흄 등 서양철학과 불교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양계초 사상은 이러한 연구의 선구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칸트철학과 동양 유식불교의 만남

 

양계초는 칸트 철학이 기본적으로 불교, 특히 유식불교의 이론과 일치한다는 특징을 가진다고 보았다. “칸트 철학은 대개 불교에 가깝다. 이 논의는 불교 유식학의 의미와 서로를 인증한다. 불교는 일체의 이치를 궁구하는 데 반드시 먼저 본식本識을 근본으로 삼았다는 것이 이러한 의미이다”고 하였다. 그는 칸트 철학이 유식불교와 “서로를 인증할” 정도로 가깝다고 보고, 그 이유가 유식불교가 본식, 즉 아라야식을 근본으로 삼고 있는 점이라고 본 것이다. 유식불교에서는 아라야식을 본식으로 보고, 그 속의 종자계로부터 현상계의 모든 것이 생성되어 나온다고 보는데, 양계초는 이러한 구도가 칸트의 물 자체와 현상계 구도와 형태적으로 일치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지혜의 작용에 두 가지가 있다”고 보아,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을 명확하게 ‘순수한 성질의 지혜’, ‘실행의 지혜’로 나누어 부르면서, ‘자기 외의 사물 하에서 고찰하는 공덕’, '스스로 동작하여 일체의 업業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칸트의 세 비판서 중 가장 중요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두 저서를 대상으로 논의를 전개하겠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이는 양계초가 칸트 철학의 대강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양계초의 칸트 순수이성에 대한 유식불교적 해석을 보면, 첫째, 칸트의 감성∙오성과 유식불교의 전5식∙ 제6의식을 연관시켜서 해석하였다. 칸트의 감성과 오성의 구별 및 둘 사이의 협력 과정을 유식 불교의 마음 구조 이론으로 설명한 것이다. “공중에는 실제로 꽃이 없지만, 눈병 때문에 있다고 하는 것이 그 의미이다. 나의 오관과 나의 지혜가 서로 결합하여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 오관은 전오식이고, 지혜는 제6식이다.” 

 

둘째, 칸트의 감성의 시공간 형식과 불교의 허공虛空· 영겁永劫, 우宇·주宙를 일치시켜 보았다. 이 때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가지 형식이 사물을 직관하는 조건으로서 인간의 감성에 선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칸트의 기본 전제이다. 양계초는 공간·시간은 불교 경전에서도 그대로 통용되는 번역어라고 말하였다. 불교의 허공· 영겁, 유학의 우· 주가 칸트의 시공간에 해당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셋째, 칸트 오성의 종합적 원칙들과 화엄불교의 상즉· 상입 세계관을 하나로 보았다. 양계초는 칸트가 감각들을 종합하여 질서있게 하는 지혜의 작용, 즉 오성에 보고 듣는 작용, 고찰하는 작용, 추리 작용의 세 가지를 보았다고 한다. 칸트에 의하면, 진정한 학문은 고찰 작용에서 시작하는데, 고찰 작용은 사물들의 현상을 관찰하여 변화하지 않는 법칙을 구하는 것이고, 판단 작용이라고도 부른다. 양계초는 칸트철학이 이 삼대 법칙을 통해 “다양하고 번잡한 사물들이 실제로는 연관되어 일체를 이루는” 세계, 즉 “큰 그물 안에 구멍이 수천만 개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연속되어 있고 어느 하나도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세계에 도달하였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세계는 화엄의 무진 세계와 그대로 일치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칸트철학의 내용과 화엄종의 불교 이론은 전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이다.  

또한 칸트 실천이성에 대해서도 유식불교적 해석을 시도하였는데, 특히 칸트의 본래적 자아· 현상적 자아 및 불교의 진여· 무명 개념을 일치시켜 이해하였다. 

 

중체서용中體西用론 암묵적 지지

 

양계초는 이렇게 서양 칸트철학과 동양 유식불교의 일치점을 주장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칸트철학이 불교학설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칸트의 논의는 정치하고 이치를 다했으며 거의 불교와 가깝다. 한 단계 부족한 것은 불설에서는 이 진아가 실로 대아이고 일체의 중생이 모두 이 체體를 동일하게 가지고 있고 분별상이 없다고 보는 데 대해, 칸트는 아직 이 점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계초는 유식 불교를 활용한 칸트철학 이해를 통하여 서양 철학보다 동양 철학이 우수하다는 점을 은연중 언급함으로써 적어도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서양보다 동양이 우월하다는 근거로 삼았다. 이는 당시의 중체서용론의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칸트철학과 유식불교는 일치하는 측면이 있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유식불교 등 동양 전통철학이 칸트철학보다 우수하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서양보다 힘의 논리에서 밀리는 상황에서 동양의 민족주의적 자존심을 부추기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도가 있었기에, 유식불교를 통한 칸트철학의 해석이 ‘올바른’ 칸트 해석인가 하는 질문은 오히려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양계초가 칸트철학 해석을 통하여 과연 무엇을 시도하였는가 하는 점이고, 그것은 중국 근대에서 가장 필요한 민족적 자존심의 회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김제란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학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석·박사 졸업. 같은 대학 철학과에서 강의,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초빙교수를 지냈다. 지곡서당 한문연수과정 수료. 조계종 불학연구소 전문연구원 역임. 『웅십력 철학사상 연구』, 『신유식론』,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등 다수의 저서 및 번역서가 있다.
김제란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