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선학 연구 대가 한국불교 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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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1 년 6 월 [통권 제98호] / / 작성일21-06-04 16:17 / 조회5,285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6 | 누카리야 가이텐
누카리야 가이텐(忽滑谷快天, 1867-1934, 사진 1)은 한국불교의 사상 전통을 통시적으로 개관한 『조선선교사』(朝鮮禪敎史, 1930)를 써서 교학과 선의 특징과 기풍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누카리야는 불교학자이자 동양사상 연구자로서 중국 선종을 전공했지만,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다카하시 도루의 『이조불교』 등 선행 연구와 축적된 자료, 근대기의 대표적 학승인 박한영, 즉 석전 정호 등의 자문과 도움을 얻어 이 책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불교와는 다른 한국불교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등 그 또한 식민지 시기 일본인 학자들의 한국불교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더욱이 누카리야는 일본 조동종 승려 출신으로 임제종 위주의 조선시대 선종 전통과 불교사 인식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럼에도 근대 한국불교학 연구의 선구자로서 그의 학문적 업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누카리야 가이텐은 1867년 도쿄 서쪽 무사시노(현재 사이타마현)의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10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다. 1887년 조동종 대학림(지금의 고마자와 대학의 전신)을 졸업하고 다음 해에 도쿄 제일고등중학교(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891년 24세에 게이오의숙 대학 문학부에 진학하여 불교학과 근대학문의 실증주의 연구방법론을 배웠고 영어도 익혔다. 그 결과 첫 번째 저작으로 낸 것이 조동종의 수행법과 깨달음을 영어로 쓴 Principles of practice and Enlightenment of the Soto Sect 였다.
누카리야는 에도시대의 천재 사상가로서 32세에 요절한 도미나가 나카모토의 『출정후어』(出定後語, 1745)를 간행하기도 했다. 이 책은 초기불교부터 대승불교까지 불교 경전의 성립과정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면서, 모든 경전은 부처가 직접 설한 가르침이라는 기존의 통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불교의 탄생과 전파, 경전의 출현 순서를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근대불교학의 중요한 연구 과제였는데, 도미나가는 150년이나 앞서 이 문제를 과감히 꺼내들었던 것이다. 일본 근대 불교사학의 기반을 다진 무라카미 센쇼는 『대승불설론비판』(1903)에서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은 교리의 문제가 아닌 역사의 문제라고 선언했다. 당시 대승비불설은 학계의 큰 호응을 얻었는데, 누카리야도 대승의 가치를 재검토하면서 비판 정신에 입각한 불교 근대화를 꾀하려 했던 것이다.
1900년에는 태국 왕실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일본에 보냈는데 이때 누카리야는 난조 분유와 함께 태국에 다녀왔다. 난조 분유는 1876년 영국의 비교종교학자이자 인도학자인 막스 뮐러에게 유학하여 실증적이고 객관적 방법론을 추구하는 근대불교학을 일본에 처음 전해온 인물이다. 누카리야는 1901년에 조동종 고등중학교의 교장이 되어, 학생복을 승복에서 기모노로 바꾸는 등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한편 그는 연구에도 전력을 기울여 1905년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経』이 위경임을 논증한 문제적 논문을 발표했다. 이 『불결의경』은 부처가 교학 외에 별도로 선을 전했다는 교외별전, 부처가 꽃을 들자 제자 가섭이 빙긋 웃으며 마음을 이어받았다는 염화미소 등의 전거가 된 경전으로, 이 책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이라는 주장은 선종이 기대어온 경전상의 근거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1911년에는 조동종에서 서구의 종교학술 시찰을 보내 3년간 외국에 체류하게 되었는데, 하와이,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불교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1915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국가학위로 문학박사를 받았고, 1919년에는 조동종 종립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1921년에는 학장에 취임했다. 이어 1925년에는 학제 변경으로 조동종립대학을 고마자와 대학으로 개칭하면서 초대 학장이 되었다. 이처럼 그는 활발히 공직 활동을 펼치는 와중에 연구를 지속하여 많은 저작을 펴냈다.
누카리야의 전공분야는 선학이었고 대표작도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넘나드는 『선학사상사』 2권이었다. 그 밖에도 『선학강화』, 『선학신론』 등 선 관련 저작이 다수 있다. 그의 선불교관은 내성적 주관주의로 불리며, 초대 학장을 했던 고마자와 대학의 건학 이념도 실천과 학문의 일치를 뜻하는 ‘행학일여行學一如’를 내세웠다. 그의 선학 연구는 일본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알려졌는데, 일본의 선을 세계에 알린 스즈키 다이세츠, 중국 근대의 대표적 사상사 후스(호적)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누카리야는 불교 외에도 양명학이나 이슬람교를 공부하는 등 매우 폭넓은 지적 호기심을 보였으며 『달마와 양명』(사진 2) 같은 흥미로운 제목의 저술도 냈다. 나아가 물리학과 생물학, 천문학 등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가져서 불교와의 비교 연구를 행하기도 했다.
사진 2. 1914년 간행된 달마와 양명.
누카리야 가이텐이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모아 한국불교의 선과 교의 사상적 전개를 개설한 책이 바로 『조선선교사』이다. 그는 1929년 여름에 한국을 방문하여 사찰과 사적을 조사한 후 자료를 모으고 자문을 얻어서 다음 해에 『조선선교사』(사진 3)를 출간했다. 그런데 그와 한국불교와의 인연은 그로부터 20년 앞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 선종을 대표하는 저작인 청허 휴정의 『선가귀감』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1911년에 『선가귀감강화』를 펴낸 것이다. 『선가귀감』일본에 전해져 1630년대와 1670년대에 5번이나 간행되었고, 코린 젠이의 『선가귀감오가변』을 비롯해 주석서도 2종 나올 정도로 에도시대에도 중시된 책이다. 누카리야는 이처럼 한국불교 관련 역서와 저술을 냈고 고마자와 대학에서 조선불교사를 강의하는 등 일본에서 한국불교 연구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었다.
『조선선교사』는 꼼꼼한 사료 비판과 해석, 문제의식과 통찰 면에서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역작이다. 구성을 살펴보면 1편(삼국) 교학전래의 시대, 2편(통일신라) 선도흥륭의 시대, 3편(고려) 선교병립의 시대, 4편(조선) 선교쇠퇴의 시대로 되어있다. 그런데 책의 일부 내용과 그 안에 담긴 저자의 시선에는 한국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누카리야는 『이조불교』를 쓴 다카하시 도루와 마찬가지로 한국불교를 중국불교의 아류로 보고 그 사상적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선교쇠퇴의 시대로 명명한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서술도 사상적 측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고 현세이익적 기복신앙이 중심이 된 것으로 파악했다.
무엇보다 누카리야는 일본 조동종 승려 출신으로 종립대학인 고마자와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기 때문인지 임제종과 간화선 위주의 한국의 선종 전통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특히 19세기 조선의 선 논쟁에서 임제종을 가장 우월하게 높이고 조동종을 그 아래로 낮추어 본 선종 분류방식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예를 들어 임제종이 연원을 둔 남악 회양을 조사선의 종주, 조동종이 파생되어 나온 청원 행사를 여래선의 종주라고 하여 전자를 높이고 후자를 낮춘 구분 방식을 들며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선교사』에서는 19세기 선 논쟁에서 자주 언급된 진귀조사眞歸祖師설에 대해 경전적 근거가 없는 가설이라고 논박했다. 또 선 분류의 주된 근거로 활용된 삼처전심三處傳心설이 위경에 근거한 후대의 조작이며 망설이라고 비판했다. 진귀조사설은 부처가 선을 진귀 조사로부터 직접 전해 받았다는 주장으로 선법 전승과 관련된 한국만의 고유한 불교사 인식이다. 고려 말인 1293년에 천책이 지었다는 『선문보장록』에는 『해동칠대록』이라는 책을 인용해 9세기 통일신라의 선승 범일이 이를 언급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즉 “진귀조사가 설산에 있을 때 석가에게 조사의 심인을 전하게 했다.”는 달마의 게송을 끌어와 실은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당시 교에 대한 선의 우위를 내세우고 그 근거를 확립하기 위해 제기된 주장이었다. 이후 진귀조사설은 청허 휴정의 「선교석」에서 교외별전의 근원으로 언급한 바 있고 선 논쟁에서도 빈번히 등장한다.
사진 3. 중국어로 번역출판된 누카리야 가이텐의 『한국선교사朝鮮禪敎史』.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5.
앞서 누카리야는 『불결의경』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임을 들어 염화미소 등의 경전적 근거가 없음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선 논쟁에서는 삼처전심이 중요하게 다루어졌고, 백파 긍선의 경우 삼처전심을 위계적으로 분류하여 임제종 우위의 선종 판석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극 활용했다. 삼처전심은 붓다가 심법을 전한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영산회상 거염화[靈山會上舉拈花], 니련하반 곽시쌍부[泥蓮河畔槨示雙趺]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삼처전심의 신빙성 문제에 대해서는 누카리야 뿐만 아니라 권상로도 회의적 시각을 나타낸 바 있다. 이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서는 삼처전심도 진귀조사설과 마찬가지로 교로부터 선의 독립과 우월성을 획득하기 위한 정체성 인식의 문제로 보고, 세 일화가 중국에서 만들어졌지만 이를 합성한 삼처전심이라는 용어는 한국의 선 문헌에 처음 보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누카리야 가이텐은 저명한 선종 연구자였지만, 당시의 시대성을 반영해서인지 한국불교에 대한 부정과 폄하의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선학 및 선종 연구의 대가로서 자신의 학문적 능력을 발휘해 한국불교 사상사의 궤적을 재구성하려 했다. 1930년에 나온 『조선선교사』는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등 선행 연구와 축적된 자료에 기대면서 근대학문의 연구방법론을 적용한 체계적 개설서이다. 다카하시 도루의 『이조불교』가 조선시대에 국한된 연구임에 비해 누카리야의 이 책은 한국불교의 전 시기를 망라한 선과 교의 사상사적 개설서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에 한국불교학의 사상적 토대를 구축하고 큰 학문적 영향을 미친 이 책의 연구사적 의미와 가치는 높이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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