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적막 속의 경건 --- 살아 있는 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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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1 년 6 월 [통권 제98호] / / 작성일21-06-04 16:04 / 조회5,931회 / 댓글0건본문
居然尋牛逍遙 8 | 포항 내연산 보경사
寶光明珠無非眞無
鏡花水月有非眞有
사진1. 내연산 보경사.
보경사寶鏡寺는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청하현淸河縣에 속했는데, 내연산(內延山, 711.3m)의 남동쪽 주능선에 있는 문수봉文殊峯을 주봉으로 하고 앞으로 광천廣川을 끼고 있다. 내연산은 원래 종남산終南山으로 불렀는데, 신라가 말기로 접어들면서 나라가 어지러워지던 시기에 진성여왕(眞聖女王, 887-897)이 견훤(甄萱, 867-936)의 난을 피하여 이 산으로 들어온 적이 있다고 하여 내연산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왕을 산 안으로 인도하여 난을 피하게 했다’는 의미라는 것인가?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내영산內迎山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왕을 산이 영접하여 들였다 라는 뜻인지. 아무튼 이 내연산은 태백산맥의 줄기인 중앙산맥에 있는데, 청하현은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면 영덕을 지나 포항과 경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동남해안의 방어에서 중요한 축선 상에 있는 지점이었다(사진 1·2).
사진2. 보경사 현액.
내연산은 토산이어서 하늘로 높이 솟은 바위와 같은 암봉岩峰을 볼 수 없지만, 청하곡의 맑은 계곡물과 기암 절벽 사이로 쏟아지는 용추폭포龍湫瀑布, 상생폭相生瀑, 보연폭寶淵瀑, 관음폭觀音瀑 등 12개의 폭포를 즐기러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걸음이 많은 곳이다. 조선시대 숙종(肅宗, 1674-1720) 대왕도 이곳 청하곡의 폭포를 유람하고 시를 남겼다. 봄에는 푸른 녹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여름에는 폭포수의 시원한 물소리에 땀 흘리며 걷는 발걸음이 오히려 싱싱하다. 가을 단풍은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을 가져오고, 겨울 눈 길은 산사로 가는 길을 걷는 고즈넉함이 잠겨있다.
사진3. 대웅전.
내연산 입구로 들어가 한참이나 차로 달려가면 보경사의 입구에 다다른다. 최근에 건립된 일주문一柱門과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걸어가던 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보호수가 있고, 여기서부터 사천왕문四天王門과 고려 현종 14년 1023년에 세운 통일신라의 양식을 한 5층 석탑 즉 금당탑金堂塔, 화엄 세계의 교주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고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는 적광전寂光殿, 석가모니불을 모신 조선시대 후기의 대웅전大雄殿, 그리고 석가모니의 팔상시현八相示顯을 나타낸 팔상전八相殿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으로 난 하나의 축으로 가람이 배치되어 있다(사진 2). 팔상전과 나란히 오른쪽으로 산령각山靈閣, 원진각圓眞閣,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사자를 탄 문수와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 16나한 등을 배열한 영산전靈山殿, 명부전冥府殿이 있다. 이 공간이 절의 중심 영역이다(사진 4).
사진4. 팔상전과 원진각 등.
보경사는 602년 신라 진평왕(眞平王, 579-632) 25년에 중국 남조의 진(陳, 557-589)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명智明 화상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신라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흥륜사興輪寺가 완공되어 양(梁, 502-557)나라에서 사신과 도양유학渡梁留學을 하던 신라 최초의 유학승 각덕覺德을 보내 붓다의 사리를 보내오고, 그 흥륜사에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때가 진흥왕(眞興王, 540-576) 5년인 544년이었으니, 그때로부터 약 50여년이 지난 때이다. 약 80년 전에 달마(達磨, ?-?)대사가 중국에 처음 들어와 만난 사람이라고 전승된 이가 바로 이 양나라의 왕인 무제武帝이다. 달마 대사와 황제 보살로 불린 양무제가 주고받은 대화는 『벽암록碧巖錄』 등 선종禪宗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후대에 창작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달마 대사가 활동한 곳은 북위(北魏, 386-534)였다. 아무튼 무제는 통치기간 50년 동안 율령과 제도를 정비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기도 했지만, 불교에 너무 빠져 나라도 망하는 길로 들게 하고 자신도 반란으로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사진5. 적광전과 금당탑.
역사를 보면,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남조의 양나라 다음에 들어선 나라가 진나라이다. 진흥왕 26년 565년에 북조 나라인 북제(北齊, 550-577)의 무성황제(武成皇帝, 561-565)가 조서를 내려 진흥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고, 그해 진나라에서는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오고 불교 경론 1,700여권을 보내주었다. 다음 해인 566년에는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가 완공되었고, 이해 신라 최대 불사이자 최대의 호국사찰인 황룡사皇龍寺도 준공되었다. 신라도 북조의 북제와 남조의 진나라에 사신을 자주 보냈다. 진흥왕이 세상을 떠난 해인 576년에는 안홍安弘 법사가 남북조시대를 마감하고 통일국가로 출범한 수나라에서 불법을 공부하고 인도 승려 비마라毗摩羅 등 두 승려와 귀국하면서 『능가경楞伽經』과 『승만경勝鬘經』 및 붓다의 사리를 가져왔다. 이 당시 양나라와 수나라에서 붓다의 사리가 신라에 전해지면서 사리에 신앙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능가경』과 『승만경』은 나중에 원효가 여래장사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경이 되었다. 뒷날 당나라에서 신수종神秀宗을 배우고 들어온 단속사斷俗寺의 신행(神行, 704-779) 선사가 이 안홍 법사의 증손이다.
사진 6. 원진국사비.
아무튼 이 지명 화상이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어떤 도인으로부터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받아 이를 신라의 동해안에 있는 명당에 묻고 그 위에 절을 세우면 왜구의 침략을 막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귀국한 후 이를 진평왕에게 아뢰니 왕이 기뻐하며 그와 함께 동해안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해아현海阿縣에 이르렀는데, 멀리 오색구름이 덮여 있는 곳이 있어 찾아가보니 그곳이 바로 내연산이었다. 그 산 아래 평평한 곳에 큰 못이 있었는데, 그 자리가 천하 명당이어서 마침내 못을 메우고 팔면경을 묻은 다음 그 위에 금당金堂을 세워 이를 보경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는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 1544-1610) 대사가 지은 「내연산 보경사 금당 탑기」에 전하는 내용이다. 금당인 지금의 적광전은 조선시대 중창된 것이지만 현재의 보경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통상 금당은 축대 위에 기단을 쌓아 그 위에 건축하지만 이곳 적광전은 평지에 기단을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계단이 있는 경우에 벽사辟邪와 외호外護의 의미를 가지는 사자를 새겨놓는 것을 여기서는 목조로 조각하여 건물의 중앙 문 옆 아래에 이어 붙여 놓고 있다(사진 5).
사진 7-1. 원진국사 부도탑 가는 길.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평왕 11년인 589년에 원광 법사가 불법을 공부하러 진나라로 떠났고, 596년 고승 담육曇育이 불법을 공부하러 수나라로 떠났다. 528년 법흥왕(法興王, 514-540) 15년에 왕의 측신 이차돈(異次頓, 506-527)이 육부六部 중심의 부족공동체 수준에 머물고 있던 신라를 율령과 관제를 제정하고 불교를 중심으로 통일된 이념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불교를 공인해야 한다고 하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순교한 때로부터 약 60년이 지난 때의 일이다. 중국에서 명성을 떨친 원광 법사가 600년에 수나라로 들어간 조빙사朝聘使 제문諸文과 횡천橫川을 따라 신라로 귀국하여 여래장사상 등을 설파하며 나라의 중심적 승려로 활약하였다. 602년에 백제가 신라의 아막성阿莫城을 쳐들어온 전쟁에서는 원광 법사에게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은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아막성은 오늘날 남원시 동쪽에 있는 ‘할미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바로 이해에 고승 지명화상이 진나라로 들어간 입조사入朝使 상군上軍을 따라 귀국하였는데 진평왕이 화상의 계행戒行을 존경하여 대덕大德으로 삼았다. 608년에는 급기야 원광 법사가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611년에 사신이 이를 가지고 수나라로 들어가 양제煬帝에게 올려 그로 하여금 군사를 움직이게 하였다. 진평왕 당시에 원광 법사가 나라의 중심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었고, 605년에 입조사 혜문惠文을 따라 귀국한 담육 화상은 지명 화상과 비견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이때는 아직 원효(元曉, 617-686) 대사와 의상(義湘, 625-702) 대사가 태어나기 전이다. 당시 신라는 진흥왕 때 이사부(異斯夫, ?-?)와 거칠부(居柒夫, ?-579), 사다함(斯多含, ?-?) 등의 활약으로 지금의 함경도 마운령과 황초령, 북한산, 창녕 지역까지 영토를 최대로 넓히고 성도 굳건히 쌓기도 하였지만, 이후에도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바람 잘 날 없이 군사적 공격을 받고 있었고, 신라는 수나라와 당나라 사신과 조공을 보내 도움을 청하는 형편이었다. 신라는 진평왕 53년 631년에 미녀 두 사람을 사신과 함께 당나라 조정에 바치기도 하였는데, 당 태종 시기 천하의 명재상 위징(魏徵, 580-643)이 인륜에 비추어 볼 때 이 여인들을 돌려보냄이 마땅하다고 직간直諫하여 태종이 가족들과 이별한 채 강제로 보내져온 불쌍한 여인들을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한 일까지 있었다.
사진 7-2. 원진국사 부도탑.
보경사는 그 후 고려시대인 1214년 고종(高宗, 1213-1259) 1년에 보경사의 주지였던 원진 국사圓眞國師 승형(承逈, 1171-1221) 화상이 승방 4동과 정문 등을 중수하고 종鍾, 경磬, 법고法鼓 등을 갖추어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1677년 숙종 3년에는 도인道仁 화상, 천순天淳 화상, 도의道儀 화상 등이 보경사의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1695년 가을에 준공하였으며, 삼존불상과 영산전靈山殿의 후불탱화도 조성하였다. 그때 초한草閑 화상이 시주를 얻어 금당을 중건하였고, 관음전은 도의 화상이, 명부전은 석일釋一 화상이, 응향전凝香殿은 국헌國軒 화상이, 향적전香積殿과 국사전國師殿은 학열學悅 화상이, 열반당은 신특信特 화상이, 국사전 정문과 사천왕각 및 식당은 비구니 총지摠持 화상과 신원信遠 화상이, 팔상전은 지총志聰 화상이, 종각은 영원靈遠 화상이 각기 분담하여 중건하고 중수하였다. 그와 동시에 도인 화상은 청련암靑蓮庵을 창건하고, 탁근卓根 화상은 서운암瑞雲庵을 창건하였다. 1725년 영조(英祖, 1724-1776) 1년에는 성희性熙 화상과 관신寬信 화상이 명부전을 이건하고 단청하였으며, 성희 화상은 괘불을 중수하였다. 모두 유정 대사의 위 글에서 전하는 내용이다. 이 당시에 보경사는 사세가 가장 컸다고 한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였음에도 사정이 이러하였다.
영산전 앞마당에는 그 유명한 ‘원진 국사비圓眞國師碑’가 비각의 보호를 받으며 서있다(사진 6). 이 비는 귀부龜趺에 비신碑身만 있고 이수螭首는 없다. 거북의 등에 있는 육각형의 모든 무늬에는 왕王자가 새겨져 있다. 비신의 상부는 양쪽 끝이 45도 각도로 접혀진 형태라서 이런 비의 형식을 ‘귀접이 형식’ 즉 ‘규수형圭首形’이라고 한다. 이 비는 일제 강점기이후로 계속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9년에 와서야 비각을 세워 보호하기에 이르렀다. 팔상전 뒤로 절의 담 사이로 난 문을 지나 산으로 200미터 정도 서서히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자연석으로 된 5개의 석축과 계단을 지나게 되는데 맨 위에 보경사 승탑인 ‘원진국사 부도圓眞國師浮屠’가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다.
원진 국사 부도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 승탑인데, 탑신석, 옥개석, 기단부 평면 모두 팔각형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세워진 승탑의 대부분이 이러한 팔각원당형 승탑이다. 화려하고 장중하며 위엄이 있는 구조이다. 송광사松廣寺의 16국사 승탑도 마찬가지인데, 원진 국사도 송광사에서 수행한 적이 있음을 고려해보면 동일한 형태의 부도로 이해할 수 있다. 송광사의 16국사의 부도에 비하여 탑신이 길어 키가 훨씬 큰 점이 다를 뿐이다(사진 7-1·7-2). 원진 국사비와 원진 국사 부도는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보경사의 중심이 되는 사역에 있는 당우들이 원래의 보경사의 당우들이고 그 외에 동암, 무문관, 설법전, 전시관 등 많은 당우들은 근래에 와서 추가로 지어진 것들이다.
조선시대 암자로 지어진 서운암은 사인思印 화상이 만든 동종銅鐘과 조선시대 조성된 후불탱화와 신중탱화神衆幁畵가 있어 유명하지만, 15세기에서 19세기 초반까지 보경사와 서운암에 주석한 고승인 동봉東峯, 청심당淸心堂, 심진당心眞堂 등의 10기가 넘는 부도들이 담장으로 둘러진 영역에 잘 가꾸어져 적막 가운데 경건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사진 8). 보경사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원진 국사에 대한 기록은 현재로서는 당시 대사성大司成이었던 이공로(李公老, ?-1224)가 비문을 지은 이 원진 국사비가 유일하다. 원진 국사 승형 화상은 상주에서 태어나 일찍 고아가 되어 7세에 운문사雲門寺로 가 불문에 들어가고 13세에 문경 봉암사에서 동순洞純 화상을 은사로 하여 득도하고, 김제 금산사金山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1197년(명종 27)에 스승이 입적하자 승과僧科를 포기하고 수행에 전념하였는데, 명종이 일찍부터 신동으로 소문난 그의 뛰어난 도행을 듣고 초선初選을 치르게 하여 승과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천하를 주유하며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로 가 보조 국사 지눌知訥 화상을 참방하고, 청평산에서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의 유적을 찾다가 김부철金富轍이 지은 ‘문수원기文殊院記’에서 『수능엄경首楞嚴經』이 불교의 핵심이라는 내용을 읽고 크게 느끼는 바 있어 『능엄경楞嚴經』을 으뜸으로 삼아 능엄선楞嚴禪을 주창하였다.
부처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서로 자기들의 종취宗趣만 옳다고 대립하는 때에 일심一心을 기본으로 하여 선과 교 어느 쪽에도 치우지지 않고 그 깨달음을 얻어 천하에 불법을 떨쳤다. 1210년(희종 6)에 연법사演法寺 법회의 법주가 되어 선풍을 떨쳤고, 이후 삼중대사三重大師와 선사禪師를 거쳐 1215년(고종 2)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어 왕명에 따라 보경사에 주석하였다. 1220년 희종의 넷째아들인 경지鏡智 선사의 은사가 되었고, 1221년 『능엄경』을 설한 뒤 팔공산 염불사念佛寺로 옮겨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돌아가실 때 삭발 목욕을 하고 승상繩床에 앉아 범패梵唄를 읊게 했는데, 이때 시자가 임종게臨終偈를 청하니 “이 어리석은 놈아, 내가 평생 하나의 게송도 지은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무슨 게송을 지어달라는 말이냐!”라고 하고 승상繩床을 세 번 내리치고는 조요히 입적하였다. 국사로 추증되었고, 시호가 원진이다. 비문의 글씨는 보문각寶文閣 교감校勘인 김효인金孝印이 썼다. 비는 원진 국사가 입적한 지 3년 후에 세워졌다.
사진 8. 서운암 부도원.
이 시절에는 왕자들까지 삭발하고 출가를 하여 진리를 찾아 나섰다.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 화상도 그러하다. 도대체 무엇을 찾아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세간의 길로 나선 것인가? 『능엄경』은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세존과 아난阿難의 문답으로 시작하여 깨달음의 본질과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과 여래장如來藏 사상에 대하여 상세히 설해 놓은 경이다.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가장 쉬운 길이 관음신앙이라면서 능엄다라니楞嚴陀羅尼를 설한 다음, 보살의 수행 단계와 중생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번뇌에 대하여 그 원인과 종류를 밝혀 놓은 것인데, 지금도 우리나라 선종에서 소의所依경전으로 중요시 하고 있다. 그러나 『능엄경』에 대하여는 인도에서 유출을 엄격히 금지했던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중국에서 후대에 만들어진 위경僞經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여래장사상은 이미 신라시대 원광 법사와 원효 대사에 의하여 상당히 연구되고 전파되었는데, 고려시대에도 그러한 사상이 계속 이어져 온 것인지 아니면 신라시대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는 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보경사에 주지로 주석하고 있으신 철산鐵山 화상은 좌선과 노동으로 일상의 생활을 일관하고 있다. 늘 좌선을 하고, 그 외 시간에는 차를 만들거나 장을 담그는 등 노동을 한다. 참선과 노동은 결사의 기본이고, ‘백장청규百丈淸規’의 핵심이다. 철산 화상과 수행자들이 직접 만든 차와 된장, 식초 등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사진 9). 그는 오로지 좌선수행을 중시하여 스님들이 무문관無門關 수행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새로 조성하고 신도들에게도 참선 수행과 노동을 강조하신다.
존재의 무와 만물과 인간의 삶도 궁극에는 공空한 것이라는 것, 『대승기신론』에서 밝혀져 있듯이, 인식의 층위를 정확히 알고 모든 것이 마음으로 귀결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일심一心 사상을 받아들이면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하게 살다가게 된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라는 것인가. 이를 깨달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에 의해 행동하기 위해 좌선 수행을 하는 것인가? 그러나 참선은 오로지 이를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만이 스스로 느낄 수 있고, 깨달은 사람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상태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그 경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불교에서 참선 수행이 명상이나 어지러운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것이거나 호흡을 통하여 생명을 연장하고 평온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닌 것이라면, 우리는 원래의 문제로 돌아간다. 이 세상 인간이 어떻게 하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공동체가 지속가능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인간의 원래 문제로 돌아가 생각해본다. 이에 관해서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 왔지만,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오랜 역사 속에서 실제 온갖 현실적인 삶을 살아오면서 도달된 일응의 결론에 도달하였는데, 그것이 오늘날에는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모든 나라가 채택하고 있다. 아직도 종교전쟁을 치르고 독재자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들에서는 인간이 죽음과 고통의 질곡 속에서 하지 않아야 할 고생을 하고 있지만. 그 결론적 내용의 요체는 이렇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이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타인을 지배할 수 없다. 인간의 공동체는 국가로 만들어져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국가는 공동체의 주인인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모든 자유와 평등을 보호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국가의 제도와 권능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고, 그 일을 하기 위해 권한을 부여받은 자는 사익을 개입시키지 말고 오로지 객관적이고 기능적으로 헌법이 정한 역할만 충실히 해야 한다. 권력은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욕망이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되면 안 된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그 권능을 부여받은 자가 남용할 수 없게 이를 철저히 통제하여야 하고, 그 통제제도를 법으로 엄격하게 정하여 운용하여야 한다. 공동체 내에서 약한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동의 부담으로 그 약한 사람이 정상적으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내세의 존재나 내세의 삶에 대해서는 헌법은 말하지 않는다. 이는 개인이 각자 알아서 판단할 성질의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현재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무가 아니며 유이고, 인간은 감성, 오성, 이성이 작용하는 생물학적 유기체이며, 유기체가 원하는 바는 다른 유기체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고 다른 존재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으로 달성할 수 있게 한다. 그러면 이 지구상에 사는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자유로이 영위하면서 현세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세포활동이 끝나면 자연의 법리에 따라 사라지게 된다. 이것을 실현하는 것에 힘써라.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지금까지 연구하고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을 궁구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 60대 중반에서 이 문제를 계속 연구하고 그 실현을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미답未踏의 참선參禪 수행으로 들어가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여전히 자문해본다. 청하곡의 계곡 길을 한참 걸은 후에 들린 승방에서 스님이 내어주시는 차를 마셨다. 특별히 할 이야기는 없었다. 차만 편하게 마시고 승방을 나서는 길에 철산 화상은 빙그레 웃으시며 ‘언젠가는 선방에 한번 들어가시면 좋은데 ….’라고 하시는 말씀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사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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