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건축 이야기]
부속 건물처럼 한쪽 편에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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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화 / 2021 년 6 월 [통권 제98호] / / 작성일21-06-04 16:51 / 조회6,081회 / 댓글0건본문
불교건축 이야기 6 / 관룡사 약사전
사진 3. 관룡사 항공사진(『한국의 전통사찰』).
창녕 관룡사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1507년에 지어진 약사전이지만 실제로 주불전은 대웅전이다. 이처럼 약사전이 더 유명한 이유는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건물이 전국적으로 손에 꼽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관룡사를 가보면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약사전과 대웅전의 관계인데, 약사전의 위치가 좀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한쪽 구석에 치우쳐있기 때문이다.(사진 1. 1929년 스기야마의 관룡사 배치 스케치)
보통 약사전 하면 서방극락정토와 비견되는 동방유리광정토를 상징하므로 주불전인 경우는 드물더라도 주불전의 옆에 놓이거나 별도로 대등한 수준의 영역이 갖출 수 있는 ‘넘버2’의 지위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관룡사 약사전은 마치 생활에 필요한 부속 건물처럼 문루의 한쪽 켠에 배치되어 있다.
사진 1. 1929년 관룡사 배치도(『건축잡지』).
즉, 대웅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동중정형四棟中庭形 배치의 남서편에 약사전과 삼층탑으로만 구성된 작은 영역이 꼭 뒤늦게 겹쳐진 것처럼 대웅전 영역을 파고들어 있는 모습이다. 이와 비교적 유사한 사례를 찾는다면 송광사 약사전을 들 수 있지만 그렇다고 관룡사 약사전만큼 물위에 떠있는 기름방울처럼 덩그러니 놓이진 않았다.
약사전 영역은 언제 생겼을까
관룡사의 창건이야 그 시작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지만 현재 중심사역은 약사전과 그 앞의 탑을 제외하고는 임진왜란 직후 중건된 대웅전을 중심으로 갖추어졌다. 대웅전은 상량문에 의하면 1401년에 창건되었으나 왜란의 피해를 입어 1617년 중건되었고, 그 후 좌우의 요사와 맞은편의 원음각까지 갖춘 전형적인 산중소찰山中小刹의 사동중정형 배치를 갖추고 있다.
특이한 것은 대웅전과 약사전은 같은 대지에 놓여 있지만 배치축이 서로 다르다. 사찰이나 궁궐과 같이 무리를 이루는 건축에서 배치의 정연함은 효율적이면서도 위계가 있는 공간사용을 위한 중요한 요소인데, 관룡사에서 대웅전과 약사전은 나란하지도, 교차되지도 않으면서 어정쩡하게 살짝 틀어진 배치축을 하고 있다.(사진 2. 1991년 관룡사 배치도(국문연))
사진 2. 1991년 관룡사배치도(국문연).
물론 이처럼 배치축을 달리하는 두 개 이상의 불전을 가진 사찰들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평행하듯 혹은 직교하듯 때론 한 쪽을 바라보듯 배치되어 있어도 왜 그렇게 배치되어 있는지 이해가 되는 것이 보통인데 관룡사의 경우처럼 특별히 설명하기 힘든 배치경향을 가진 사찰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또한 약사전 앞에는 약사전과 나란하게 작은 석탑이 있는데, 석탑 앞에서부터 바로 경사가 급해지기 때문에 약사전 앞쪽으로 건물이 들어서는 것은 불가능해 사역이 약사전 앞쪽에서 뒤쪽으로 옮겨진 것도 아니다.(사진 3. 관룡사 항공사진(『한국의 전통사찰』)
이와 같은 지형조건으로 보아 관룡사의 중심사역은 적어도 조선초기부터는 현재의 위치였으며, 약사전도 1507년부터는 지금처럼 대웅전 영역의 앞쪽에 조그만 하게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4. 약사전의 약사불과 대좌(문화재청).
약사전에 봉안된 불상은 연구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고려 초에 조성된 불상이라고 하는데, 약사불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전형적인 특징인 약상자[藥函]를 들고 있지 않다. 물론 약상자를 들고 있지 않더라도 약사불일 수는 있는데, 지금 있는 대좌에는 “大曆七年(772)”이라고 쓰여 있어 불상과도 시기차이가 많이 차이가 난다.(사진 4. 약사전의 약사불과 대좌(문화재청)
이외에도 확인해야할 것은 약사전 앞의 석탑이다. 이 탑은 규모가 2m 정도에 불과한 작은 탑으로 기단을 하나의 큰 돌로 사용하고 있는 등 여러모로 고려 후기 이후에 조성된 탑이다.
이처럼 약사전 영역은 8세기 대좌, 고려 초 불상, 고려 후기 석탑, 1507년의 약사전으로 구성되어 있어 처음부터 약사전 영역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까지도 기존의 석조물들을 다시 모으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여 새롭게 공간을 구성하였다는 것은 적어도 그 당시에는 약사전이 그만큼 필요했다는 반증 아닐까?(사진 5. 약사전과 삼층석탑)
극락전과 약사전의 차이
삼세불三世佛의 구성을 보면 약사불은 아미타불과 비견될 만큼 중요한 부처님이다. 그러나 전각의 수에 있어서 극락전은 대웅전만큼 많지만 약사전은 턱없이 부족하고 건물의 규모도 작으며, 배치된 곳도 외곽인 경우가 많다.
사진 5. 약사전과 삼층석탑.
이처럼 약사전이 있는 사찰은 극락전에 비해 현저히 적은데, 관룡사·전등사·통도사·고양 흥국사·남양주 흥국사·정양사·실상사·송광사·기림사 정도가 언뜻 떠오른다. 이중에 전등사는 원래 약사전이 아니었지만 19세기에 들어 약사전으로 사용된 경우에 해당한다. 극락전에 대칭되는 약사전의 배치는 실제 통도사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없다. 이처럼 극락전에 비해 약사전의 조영 사례가 적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건물이야 현판을 바꾸어 다는 경우가 많으니 정말 약사전이 극락전에 비해 적은 수가 지어졌다는 것을 파악하는 방법으로는 불상의 조성 경향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확인을 한다고 해도 약사불이 조선시대에 주존主尊이나 독존獨尊으로 봉안된 사례는 아미타불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이렇게 큰 수적 차이를 보이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우선 ‘아마타(우)-석가모니(중앙)-약사(좌)’로 구성된 삼세불의 구성이 가장 일반적인 조합이었기 때문에 굳이 약사불을 별도로 조성하지 않았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아미타불은 삼세불의 보처補處로도 조성되었지만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을 보처로 하는 주불로도 많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극락전의 수가 많은 것이다.
칠성신앙은 약사신앙의 대체제
그렇다면 약사불과 아미타불의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 사실 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다. 약사불은 병을 치유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등의 현세구복적 신앙을 대표하지만 아미타불은 극락왕생을 보장하는 내세신앙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사진 6. 양산 신흥사 대광전 약사여래삼존벽화.
피할 수 없는 끔찍한 전쟁이나 가뭄과 같은 천재지변에서 비롯된 수많은 죽음을 경험한 백성은 현세구복도 중요하지만 결국 확실한 내세를 보장하는 아미타불에 대한 바람이 더욱 강렬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바람은 비단 조선시대만이 아닌 전시대, 전지역에 걸쳐 아미타신앙을 단연 최고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대부분 부처님을 봉안할 때는 독존보다는 삼존三尊 또는 오존五尊 혹은 드물지만 칠존七尊으로 봉안하기도 하는데 왜 이럴까? 아마도 신도의 입장에서 한 분 보다는 두 분, 두 분보다는 세 분께 의탁하는 것이 안정감이 크지 않을까? 그리고 불상을 봉안하는 사찰의 입장에서도 다양한 능력을 가진 불보살들을 두루 내세워야 빈틈없이 확실하게 원하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특히 좌우보처가 보살인 삼존불 형식에서 보처는 주불의 신앙적 보완을 위해 갖추는 것인데, 실제 대승불교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보살의 역할이기도 하다. 즉, 약사불의 현세구복적 역할은 중앙의 여래보다는 좌우보처인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의 임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06 양산 신흥사 대광전 약사여래삼존벽화)
그런데 약사삼존불의 경우 좌우보처는 치성광여래의 좌우보처와 같다. 치성광여래란 북두칠성을 말하는 것으로 도교에서 유래된 전형적인 방편신앙의 일종으로 조선시대 내내 성행하였지만 후기로 갈수록 더욱 선호하던 신앙이다.
북두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약사경』에도 약사여래가 과거 보살일 때 현세구복의 성격이 강한 12가지의 큰 서원을 세웠다고 나온다. 약사여래와 치성광여래는 모두 치병과 장수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특히 인간의 수명은 북두칠성이 관장한다는 인식때문에 오래살고 싶다는 구체적인 바람이 있는 사람은 약사여래보다 치성광여래가 더 특화되고 전문적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07 도봉사 치성광여래삼존도(문화재청))
이처럼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은 약사신앙과 칠성신앙의 관계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약사신앙이 유행하는데 칠성신앙이 걸림돌이 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오히려 관룡사는 이미 오래된 고불古佛이 봉안된 약사전이 미리 자리 잡고 있어서, 일반적인 경향과는 반대로 칠성각이 들어설 기회가 좀처럼 주워 지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 된다.
19세기 말 고양 흥국사처럼 약사전이 주불전인데도 부불전으로 칠성각이 들어서는 경우를 보면 칠성신앙이 극성을 이루면서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더라도 두 전각을 동시에 건립되는 사례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관룡사도 1930년을 앞두고서야 칠성각이 들어선 것으로 보이는데, 이미 다른 사찰에 비해서는 많이 늦은 편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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