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다도]
차 모임의 의미는? 어떻게 수행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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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룡 / 2021 년 7 월 [통권 제99호] / / 작성일21-07-05 10:27 / 조회5,588회 / 댓글0건본문
한국의 茶道 7 | 지운 스님 2
지난 호에는 필자의 세 번째 차 스승인 지운 스님과의 인연, 차명상이란, 그리고 그것을 공부하는 마음의 자세 등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였다. 이번 호부터는 실제로 차 수행에 대해 무엇을 배웠는지에 대해 『찻잔 속에 달이 뜨네』를 교재(주1)로 하여 차선 1기에서 배운 내용과 한국차학회 특별 강연(주2)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 드릴까 한다.
차 마심의 형식에 생명 불어넣기
스님께서는 우리에게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차의 전통 가운데 선禪의 경지에 이르는 차선茶禪이 있다고 하였다. 선은 어떤 지역적인 것이나 문화의 한 흐름으로만 인식되는 것이 아니며, 불교의 전유물은 더욱 아니라고 하였다. 선은 고정된 틀을 무너트리는 그 무엇으로, 삶의 궁극을 깨닫게 하는 마음 수양이다. 한 잔의 차를 마심에서도 그것이 선이 된다면 그 차향과 차 맛에서 삶의 진실한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 차 마심으로 사상이나 학문적 견해의 차이, 문화적 차이로 인한 반목과 질시와 투쟁과 같은 단단한 벽을 허물고 이것이 하나의 생명살림이 될 수 있다면, 이때의 차는 궁극적 선이며 한 맛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사진 1. 일본 향도香道를 체험 중인 지운 스님.
차와 선이 한 맛으로 삶을 풍요롭게 한다면 차 마심을 한갓 풍류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차를 마시기 위해 환경을 고르고, 엄숙하고 경건하게 차를 마신다 할지라도 형식에 치우쳐 있다면 공허한 몸놀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진정한 차 맛이란 형식에 가려 찾을 수 없게 되고, 방편을 떠난 형식에의 치우침은 하나의 허식에 불과할 뿐이다.
차를 마시기 위해 조용한 방을 선택하고 여럿이 모여서도 잡담을 금하며 조신한 품위로 차를 마시며 맛을 음미하는 것이 차 마시는 목적은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차 마심의 형식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다. 삶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 ‘살림’의 혁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니, 생명을 불어 넣는 것, 그것이 바로 수행이다.
즉, 차를 통해서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그것은 수행이라 할 수 있다. 앉아서 선禪을 하면 ‘좌선坐禪’이요, 걸으면서 선하는 것이 ‘행선行禪’이라면 차를 마시면서 선하는 것은 ‘차선茶禪’이다.
차를 통해 선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행차行茶를 통해 몸과 마음이 고요해진다면 ‘행차선行茶禪’이요, 차의 색향미를 통해서 몸과 마음이 고요해진다면 ‘색향미차선色香味茶禪’이 된다. 그리고 차공양을 올려서 몸과 마음이 고요해진다면 ‘공양차선供養茶禪’이 되며, 차의 한 맛을 통해서 몸과 마음이 고요해진다면 ‘일미차선一味茶禪’이 된다.
차선 수행의 4단계
차선의 수행단계는 경鏡 환幻 공空 화華의 네 가지 단계에 비유된다.
1. 경鏡이란 몸과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리는 관觀에 비유된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 비춘다. 거울에 나타나는 세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분리되어 있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듯이, 고정 · 분리 · 유무 등의 잘못된 견해를 떠나 정견正見이 세워져 마음거울에 의지하여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2. 환幻이란 곧 마음의 현상임을 거울 같은 관을 통해 이해한다. 환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보고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시간적으로 변화하는 무상無常이며, 무상이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주는 괴로움이며, 괴로움의 주체나 실체를 찾을 수 없어 무아無我이며 공임을 환을 통해 명확히 보고 환인 줄 알고 이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3. 공空이란 허공을 말하며, 허공은 공성空性의 비유이며 깨달음의 내용이다. 환을 거울 같이 관하여 무아, 공을 깨치고 체득하는 것이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호수에 나타난 사물은 선명하며 그것이 가고 옴이 없고 실체가 없어 환이자 공이며 일미一味임을 알아, 경계선이 사라진 각성覺性이며 이를 아는 것이 지혜이다.
4. 화華란 깨달음의 표현이며 진리 자체를 비유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표현인 꽃은 원인과 조건의 만남이 연기이며 이 만남은 늘 새로운 현상을 발현하여, 모든 것은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이 늘 창조되는 것이니 깨친 이는 습관성 업에서 벗어나 창조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창조한 것에 집착하고 고뇌하는 것이 중생인 것이다.
‘차 모임’의 상호 수용 통찰
행차를 할 때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차 모임의 상호 수용 통찰을 통해 행차선을 이루는 것이다. 차 모임은 상호관계성이며 상호관계성은 수용과 열림을 의미한다. 이는 차 모임을 가지며 차를 나누어 마시는 있는 그대로의 열린 모임이고, 그 자체가 수행이며 선이다. 차를 주고받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개체로 완전히 나누어져 있는 것 같지만, 차를 나누어 마실 때에는 서로 하나가 된다. 개개인은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이기도 하다. 부분과 전체는 관계망(그물)으로 이루어지기에 살아있는 관계성을 갖는다. 서로의 마음이 맞지 않아도 차 모임을 갖고 함께 차를 마심으로써 그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너와 나의 열림이며 상호 수용인 연기緣起의 드러남이다. 동시에 무아無我로서 깨어 있음이 된다.
관계란 개개인이 무아無我이면서 동시에 관계 속에서 너와 나가 살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성은 차 모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이러한 관계 속에 있다. 단지 우리가 이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일체 동작을 스스로 자각自覺
행차를 할 때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두 번째 방법은 일체 동작을 스스로 자각하는 행차선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를 스스로 안다는 것은 자각한다는 뜻이며 알아차린다는 뜻이다.
차 모임이 상호 수용이며 상호 열림임을 알아차리게 되면 대립과 감정의 질곡이 사라진 평온의 상태가 된다. 알아차림은 생각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생각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거기에는 자아가 들어 있다. ‘나’라는 생각은 곧 ‘너’를 만들어낸다. 너와 나는 서로 상호관계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개체로 인식되면서 대립과 투쟁의 대상으로 상호 단절이 일어난다. 이것은 생명살림이 아니라 생명죽임이 된다. 상호 수용과 열림[緣起]은 생각에 가려져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봄은 생각이 아니다. 생각이 아니므로 무아이다. 알아차림이 되면 모임의 상호열림이 일어나 불편한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진5. 연꽃
알아차린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차를 따르고 찻잔을 조심스럽게 놓는 등 일체동작들을 스스로 자각하면서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알아차림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 그것은 바로 주의집중이며 자기 비움이며 상대방에 끄달려 가지 않음이며 마음챙김이며 깨어있음이다. 이때는 상대를 주관적 시각으로 고정시키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등의 번뇌는 일체 용납이 되지 않고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차각茶角이 차를 정성스럽게 우려내어 손님에게 차 공양을 올리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다. 차공양 받는 손님 또한 그 순간에는 빈 마음이 된다. 이렇게 알아차림의 자기비움은 곧 대립을 벗어난 상호 수용과 열림의 현현이다.
진흙에서 연꽃 피우는 행차선
행차行茶하는 순간순간이 알아차림으로 깨어있으니 시끄러운 번뇌도 사라지게 되고 마음은 적정 그대로의 선禪이 된다. 이것이 바로 행차로 마음을 깨우는 선, 즉 행차선行茶禪인 것이다. 행차선을 하는 차 모임을 갖는 것은 때 묻은 마음을 닦아내고 정화하는 것이니, 진흙에 연꽃을 피우는 수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임을 자주 가지면 서로 간의 반목과 경쟁심, 의심, 갈등, 미움, 질투, 불만족, 공허함 등을 없앨 수가 있다.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과정을 이렇게 알아차림으로 행하면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착하지 않은 심리가 소멸되어 한 송이의 차꽃에서 또는 한 잔의 차 속에서 너와 나, 우리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나타나는 우주의 전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차 마시는 것이 그대로 우주의 몸짓이요, 생명살림의 아름다운 춤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차 마시는 의미를 이해한다면 이러한 차 마심은 차 마시는 행위 자체가 수행의 방편이며 차 마시는 그 자리가 선禪이 됨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찻잔의 찻물이 비추는 것이 거울에 비유되고, 찻물에 비추는 현상이 환영幻影에 비유되고, 찻물색은 투명한 허공에 비유되고, 명상 찻잔의 꽃모양과 문양이 연꽃에 비유되어 마음이 꽃처럼 열리고 깨어나는 것이다. 끝으로 지운 스님의 시 ‘연꽃 무아차無我茶’ 를 송하며 차 한 잔 음미해 보시기 바란다.
연꽃 무아차
잘난 마음
어긋난 마음
상처받는 마음
닫힌 마음
서로 모여
정성어린 차 주고받으니
빈 마음 되어
너 나 열림이니
진흙에 핀 연꽃처럼
무아無我로서 깨어나네.
주)
주1) 지운, 『찻잔 속에 달이 뜨네』 도서출판 법공양(2000. 4).
주2) 지운 스님께서 한국차학회 1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2004. 10. 22)에서 ‘몸과 마음을 깨우는 차선茶禪’을 주제로 특별 강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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