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독학해 언어 습득『대승기신론』 비판 근대 최고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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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1 년 7 월 [통권 제99호] / / 작성일21-07-05 11:29 / 조회4,663회 / 댓글0건본문
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7 | 여징呂澂 1896-1989
구양경무의 대표적 제자로 스승 사후 지나내학원을 맡아서 운영하고 그 자신 또한 저명한 불교사상가였던 인물이 여징(呂澂, 1896-1989, 사진 1)이다. 청일전쟁이 종결한 해에 태어나 천안문 사태가 있던 해에 세상을 떠났으니, 여징의 생애는 격동의 근대 시기 전체에 걸쳐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4살부터 불서를 읽기 시작했고, 1914년 18살 때 남경의 민국대학 경제학과에 다니면서 금릉각경처를 자주 찾았고 그곳에서 구양경무를 만났다.
구양경무가 금릉각경처 안에 불학연구부를 만들었을 때 여징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으로 불교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저명한 화가가 된 형을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가 미학을 공부하다, 일본의 중국 침략에 항의하면서 중국유학생들이 대거 귀국하는 때 중국으로 돌아왔다. 상해 미술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서양 미술이론과 미학 이론을 중국에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던 1918년 구양경무가 지나내학원 설립을 준비하면서 여징을 부르자 그는 남경으로 돌아갔고, 이후 스승인 구양경무를 도와 불교 발전과 연구로 인생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1922년 그는 구양경무를 도와 지나내학원을 설립하였고, 이후 본격적인 불교 연구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 때 여징은 지나내학원에서 강의와 교무부장을 담당하였고, 구양경무의 또 다른 제자 왕은양(王恩洋, 1897-1964)과 함께 유식학을 강의하였다. 그는 “학문을 강의하여 경전을 새긴다.”, 즉 불교를 강의하여 세상에 불교적 가치를 새기겠다는 자세로 임하였다고 한다.
경전 교감과 유식학 연구
여징은 전통적인 불교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동시에 일본에서 전개된 근대적 불교학의 내용을 소개하고 국외의 불교학 연구 성과를 수용하였다. 예컨대 일본 불교학자 후카우라 세이분의 『불교연구법』과 『불교성전개론』을 번역 소개하였다. 이렇게 근대적 불교학 방법론을 모색하는 여징의 작업은 양계초와 맥을 같이 하였고, 이 두 학자는 중국에서 근대적 불교학이 성립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징은 경전 교감이라는 전통적인 불교연구 방식을 고수했음에도 그의 학문적 연구와 논문들은 매우 근대적이었고, 이 점에서 그는 스승인 구양경무와 달랐다.
구양경무는 지나내학원에서 다양한 경전을 교감, 편찬하여 발간하였는데, 그의 교감 정신을 가장 잘 보여준 경전은 『장요藏要』라고 할 수 있다. 구양경무는 대장경 전체는 아니지만 대장경의 핵심적인 문헌을 추려서 정밀하게 교감하고 교감주를 달아 정본을 확정 간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장요』이다. 전체 3집으로 이루어진 『장요』는 73종, 400여 권의 불서를 포함하고 있으며, 제1집은 1929년, 제2집은 1935년, 제3집은 1985년 간행되었다. 이때의 교감 작업에 여징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많은 문헌의 다양한 판본들과 다양한 번역본을 대조하였다. 구양경무는 산스크리트 원본이나 티베트역본을 읽을 수 없었고, 따라서 이러한 교감 편찬 작업들은 여징이 주로 수행했다(사진 2).
이처럼 여징은 스승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경전 교감과 유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여징은 “나의 불교 지식은 구양경무에게 연원하지만, 내가 불교 연구에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것은 구체적인 연구 과정을 통하여서였다. 나는 『장요』 편찬 당시, 한문,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베트어 등 각종 판본의 불전을 섭렵하였는데, 이 때문에 나의 불교 연구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1924년 창간된 지나내학원의 학술잡지인 『내학內學』에 문헌학에 기반을 둔 교리의 변천과 전개를 연구한 논문들을 다수 발표했다. “『잡아함경』 간정기”, “『현양성교론』 대의”, “『장엄경론』과 유식고학”, “티베트 전승 『섭대승론』” 등 대단히 정교하고 깊이 있는 글들이었다. 여징은 유식학이 초기불교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생각하고, 유식학 연구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인명학의 부활
사진 2. 장요 전22권.
여징은 1926년 『인명강요因明綱要』를 간행하였는데, 종宗·인因·유喩 삼지작법 등 인명학의 기본적인 개념과 이론을 설명하였다. 삼지작법은 주장, 근거, 예증이라는 논리 방식의 세 부분을 말한다. 그리고 계속해 인명한 연구에 몰두하였고, 1928년 집중적으로 인명학 연구 성과를 발표하였다. 『내학』에 티베트어 역본으로 남은 디그나가(陳那, Dignāga, 480-540)의 대표작인 『집량론본』과 『집량론석』을 편역한 『집량론석약초集量論釋略抄』를 실었다. 이들 책은 당대에 의정(義淨, 635-713)이 번역한 적이 있었지만 그 한역본은 오래전에 일실되어 전해오지 않았는데, 근대에 여징이 다시 한역한 것이다. 인명에 관한 그의 저서로 『인명입정리론강해因明入正理論講解』(사진 3)도 유명하다. 여징의 이러한 작업은 인명학이 부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티베트불전 연구와 그 영향
중국 근대의 불교연구는 한문 불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 불전 연구는 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반면에 티베트 불전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는 중국불교 전통 속에 티베트불교가 이미 존속했고 티베트가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서구 문헌학이 수입되는 과정에서 티베트불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도 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징 역시 근대불교학의 한 부분으로서 티베트불교를 연구하였다. 티베트불교가 근대 시기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밀교의 부흥과 관련이 있다. 근대시기 밀교에 대한 관심은 1920년대에 특히 고조되었다. 당시 불교부흥 운동을 주도하였던 양문회는 당대唐代 유행하였던 밀교가 송대 이후에 단절되었고 그 전통은 일본에서 지속되었던 점을 지적하며 밀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진3. <인명입정리론강해>, 북경: 중화서방, 2007
에스토니아 출신 불교 문헌학자인 스탈홀스타인은 1917년 중국에 도착해 1937년 사망할 때까지 중국에 체류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산스크리트어를 강의하고 산스크리트불전과 티베트불전을 연구하였다. 그가 중국에서 발표한 티베트불전 연구는 중국 근대불교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여징의 친구이기도 한 최초의 중국인 제자인 황수인(黃樹因, 1898-1923)은 산스크리트와 팔리어뿐 아니라 티베트어를 공부하였다. 그는 여징이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를 공부할 필요성을 깨닫고 한문불전을 넘어 티베트불전 연구에 뛰어드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여징은 “매년 겨울과 여름방학에 황수인은 남경으로 돌아와 우리에게 북경에서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를 배우는 상황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 이 두 언어를 독학으로라도 배우리라 결심하였다.”고 하였다. 스탈홀스타인과 그의 몇몇 제자들은 서구 불교문헌학의 영향 아래 티베트불전을 연구하였지만, 이들과 달리 여징은 전통적인 교감학과 서구 불교문헌학의 간접적인 영향 아래 티베트불전 연구를 진행하였다. 티베트불전 연구를 계기로 티베트불교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시도하였고, 1933년에는 『티베트불학원론西藏佛學原論』(사진 4)을 간행하였다.
“나는 황수인에게 부탁해 산스크리트어 사전과 티베트어 사전을 구해 시간이 나는대로 독학하였다. 황수인이 북경에서 돌아올 때면 그에게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5년 정도 지나자 나는 사전을 가지고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 원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장요』 편찬을 위해 불전 교감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한편으로는 교감을 하고 한편으로는 배우면서 최후에는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 자료를 이용해 한문 장경과 대조, 교감하여, 예전에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위경僞經 논의
여징은 『대승기신론』의 진여, 본각 개념으로 중국불교의 특징을 설명하였다. 구양경무와 마찬가지로 여징에게도 진여는 생성 소멸되지 않는 절대적인 실체이고, 진여와 정지正智는 서로 차원이 다른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견해는 진여의 절대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기신론』의 관점대로라면 깨끗한 진여와 더러운 현상이 상호 융합된다고 보는 것이고, 이러한 관점에서는 더러운 현상을 없애고 새롭게 변화할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기에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근대의 더러운 현실 세계를 보면 볼수록 ‘완전하고 깨끗한 절대적인 진여’라는 분명한 목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여징은 1962년 발표한 “『기신론』과 선禪”이라는 글에서 “천 몇 백 년 동안 마명이 짓고 진제가 번역하였다고 알려진 『대승기신론』은 수당시대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내역이 모호한 책이다.”고 판정했다. “수당시대 형성된 선종, 천태종, 화엄종 등의 사상 구조와 발전은 모두 『기신론』의 진심본각설眞心本覺說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징이 보기에 『기신론』이야말로 중국불교에 핵심적인 이론을 제공하였고, 그 핵심 개념이 바로 ‘진심본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징은 이러한 입장에 서면 인간과 세계를 모두 참모습으로 보게 되고 현실 세계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초래하게 되므로, 오히려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진심본각설을 주장하는 『기신론』이 위역魏譯 『능가경』을 표준으로 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산스크리트어 『능가경』과의 대조를 통하여 위역 『능가경』에 결정적인 오역이 있음을 확인하였고, 그 오역에 기반을 두고 『기신론』 등 중국 찬술문헌이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여징은 이러한 입장에서 “진여와 여래장을 하나로 보고”, “진여와 정지正智를 구분하지 않은” 『기신론』의 오류들을 지적하였다. 이는 스승인 구양경무와 동료 왕은양과 동일한 입장에 선 주장이었다. 여징은 특히 중국불교의 주요한 전통이 불전 번역 과정에서 발생한 오역에서 기인했음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여징은 『인왕경』, 『범망경』, 『원각경』, 『점찰경』, 『능엄경』, 『기신론』 등 중국불교는 물론 동아시아불교의 가장 중요한 불전들이 모두 위경僞經이며 진심본각설에 근거를 둔 사상임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불설이 아니라 위경이므로 진정한 불교 정신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위경들은 “문장과 어휘는 정교하지만 뜻은 모호하여,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중국 사람의 성향과 잘 맞아서 크게 유행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여징의 논의는 진심본각설에 근거를 둔 중국불교를 비판하고 유식학에 바탕을 둔 초기불교의 순수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유식학에 근거할 때 오히려 불교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고 진정한 근대의 변혁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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