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프랑스 유학한 선각자 학․정계의 명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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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1 년 7 월 [통권 제99호] / / 작성일21-07-05 11:18 / 조회4,953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7 | 김법린
김법린(金法麟, 1899-1964)은 일제강점기 때 프랑스에 유학 가서 서구 근대불교학을 배워온 승려 지식인이자 민의원과 문교부 장관을 지낸 정치인이자 교육자였다. 그의 필명은 철아鐵啞, 호는 범산梵山이었고 독립운동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세기의 끝머리인 1899년 8월 23일 경상북도 영천 신녕면의 김령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다니던 열두 살 때 한일합방이 되고 얼마 후 부친의 임종을 보자 1913년에 영천 은해사에서 출가했고 법명은 법윤法允이었다(사진 1).
다음 해 동래 범어사로 옮겨가 구족계를 받았고, 이후 강원에서 사집과와 사교과를 배웠으며, 범어사에서 세운 신식학교인 명정학교의 과정을 마쳤다. 범어사는 사찰의 재산을 늘리고 원만한 재정 운영을 돕기 위한 신앙공동체인 사찰계 운영이 매우 활발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전반까지 약 60여 건의 사찰계가 확인되는데 이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였다. 따라서 토지와 재산이 많은 부찰로 거듭날 수 있었고 일본에도 유학승을 많이 보냈다. 한편 1910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통합종단 원종의 종정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비밀리에 연합조약을 체결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한용운, 백용성, 박한영, 진진응 등이 주도하여 조선불교의 독자성을 내세운 임제종 건립 운동이 일어났다. 임제종의 종무원은 범어사에 두어졌고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의 삼보사찰도 가담했다.
결국 임제종은 총독부의 인가를 받지 못했지만 1912년 서울 인사동에 임제종 중앙포교원(범어사 교당)이 설립되었다. 범어사는 명정학교 졸업생 가운데 재능 있는 학승을 선발해 보냈는데 김법린도 이때 서울에 올라왔다. 1917년에는 휘문의숙에 입학했고, 1930년대 초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원안을 작성한 국어학자 권덕규에게 배우게 되는데 뒤에 조선어학회 활동을 하게 된 것도 그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일이다. 김법린은 얼마 후 불교중앙학림으로 편입하여 1920년에 졸업했다. 불교계에서 설립한 근대적 교육기관은 1906년 명진학교로 시작하여, 1910년 불교사범학교에 이어 1915년 불교중앙학림으로 학제와 교명이 바뀌었다. 불교중앙학림은 1922년 당국에 의해 폐지되었고,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다시 문을 연 후 1940년 혜화전문학교, 해방 후인 1946년에는 동국대학으로 이어졌다.
불교중앙학림 재학 시절에는 특강을 하러 온 만해 한용운을 만나게 되는데, 불교의 전면적 개혁을 주창한 『조선불교유신론』(1913)을 쓴 한용운은 1918년 9월부터 《유심》이라는 계몽지를 발간하는 등 불교계의 민족주의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백용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의 불교계 대표로 들어갔다. 거사를 하루 앞둔 2월 28일 밤 한용운은 김법린을 비롯한 중앙학림 학생 몇몇을 불러 내일의 계획을 알려주고 적극적 활동을 독려했다고 한다. 김법린은 동료들과 인사동의 범어사 포교당에 가서 방법을 논의했고 다음 날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그는 3월 4일 범어사로 내려가 선언식을 거행하고 동래에서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1919년 4월에는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몇몇 동지들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임시정부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로 들어와 불교계에 임정의 소식을 알렸고, 독립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기록들을 모아 임정에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당시 불교계는 임시정부의 활동을 위한 자금 모집에 힘을 모았는데, 재정 상황이 좋았던 범어사와 통도사가 큰 몫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함께 의용승군을 조직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김법린이 이를 위해 활동하다가 일제의 검속이 강화되자 중국으로 돌아갔다.
1920년 4월 중국 난징의 금릉대학에 입학하여 중국어와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 유학을 가려 했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는 청년 인재들을 선발하여 프랑스로 유학 보내는 장학회가 있었고 그곳의 지원을 받아 급기야 1921년 2월 프랑스 유학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이름을 김법린으로 개명하고, 범어사에서 보내준 여비와 프랑스·일본어 사전만 들고 갔다. 파리에서는 청소부와 병원의 막일 등을 하며 프랑스어를 배웠고 고등학교와 파리대 부설 외국인학교에서 공부했다. 1923년 11월에는 파리 대학(소르본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1926년 졸업 후 은행에 근무하면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21개국 170여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세계 피압박민족 대회가 열렸다. 그는 이때 독일의 이미륵 등과 함께 조선 대표로 참가하여 일제의 폭압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고 아시아민족회 조선 측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조선대표단은 한국의 정세와 식민지 치하의 문제들을 담은 책자를 배포했고 독립 확보를 위한 결의안을 제출했다. 또 12월에 브뤼셀에서 열린 반제국주의연맹 총회에도 최린과 함께 참석하여 한국의 상황을 널리 알렸다.
조국에서 교육과 학술 활동을 펼치려고 돌아온 1920년대 후반에는 유학생들에 의해 근대화에 앞서간 일본 불교계의 상황뿐 아니라 서구 근대불교학의 최신성과가 소개되고 있었다. 프랑스의 김법린뿐 아니라 독일의 백성욱, 일본에 다녀온 강유문, 김경주, 김태흡, 허영호 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김법린은 「구미학계와 불전 연구」(1928), 「불란서의 불교학」(1932) 등의 글을 《불교》 잡지에 발표하여 최신 학문 동향을 알렸다. 그는 조선의 불교학계가 세계의 학술 사조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함을 주장했다. 프랑스 불교학의 경우 인도학, 중국학, 티벳학으로 나누어 그 성과를 정리했고, 언어학과 역사학 등의 비판·분석적 방법, 원전 교정과 주석 위주 문헌학 연구를 통해 종학의 교의 전통과 신화적 전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학술뿐 아니라 불교계의 개혁과 정치적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귀국한 직후인 1928년 조선불교 청년회에 들어갔고 다음 해에는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에 참가하여 종헌 제정에 앞장섰다. 그러다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1930년 일본으로 가서 도쿄에 있는 조동종 종립대학인 고마자와 대학에서 불교를 공부했고 조선불교 청년총동맹 조직을 주도했으며 만당의 도쿄 지부를 만들었다. 만당은 1930년 범어사 출신 승려들이 주동해 조직한 비밀 결사로 사찰령 체제의 타파, 정교분립과 자율적 교정을 추구하며 불교 개혁과 대중화 달성을 목적으로 했다. 만당에는 중앙불전의 학생들도 있었고 만해 한용운이 조직을 이끌었는데 1933년에 자진 해산했다. 김법린은 1932년에 일본에서 돌아와 다솔사, 해인사, 범어사의 강원에서 불교 교학과 영어, 역사 등을 가르쳤고 1937년 중앙불전에서 원전 중심의 강의를 했다.
그는 사찰의 재산 관리처분권과 본말사 주지 임면권을 총독부가 갖는 사찰령 체제에 대한 비판의 글을 잡지에 기고했다. 「정교분립에 대해서」(1932)에서 그의 현실 인식과 불교 혁신의 방향성을 읽을 수 있다. 김법린은 먼저 교정(교단 조직 운영)의 통일은 긴급한 과제임에도 교계의 의식 박약과 당국의 정치적 간섭으로 인해 중앙 조직이 만들어지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이어서 일본의 제도에서 나온 본·말사를 둔 본산 체제가 교정의 통일운동에 어떤 분산 작용을 하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그는 외적 질서는 정치가 유지하되 종교는 내적 생명을 향상하는데 주안점을 두므로 정교분리의 방향이 옳다고 전제하고, 신을 내세운 종교가 정치를 간섭하는 교권 지상의 교국주의, 정치가 종교를 간섭하고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는 전제정치의 국교주의는 배격했다. 다만 과도기에는 국가에서 신교의 자유권을 인정하면서도 특정 종교와 종파만 공인하는 경우가 있지만, 결국 종교 신앙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하고 모든 종교에 균등하게 자주권을 부여하는 근대적 정교 분리주의가 옳으며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당시의 사찰령이야말로 시대착오적 정치 간섭이며 한국불교의 자주권을 부정하는 차별적 행태라고 낙인찍었다. 사찰령 체제의 현실에서 본산 주지의 폐해, 중앙 통일기관의 부재, 사찰 재산처분권의 정치적 귀속 등 많은 문제가 발생했고 이에 불교가 더 후퇴하고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진단한 것이다.
이후 1938년에 만당의 활동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고초를 겪었고 1942년에는 민족의식 고취를 빌미로 당국이 탄압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다. 그러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자 김법린은 조선불교 혁신회를 조직하고 전국 승려대회 개최를 주동했으며 불교 중앙총무위원을 맡았다. 당시 불교계는 교헌 제정, 교구제와 교도제 실시, 재산통합, 일제 잔재의 청산 등을 내세웠지만 미군정청 하에서 좌우 대립이 격화되는 등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김법린은 미군정청 장관인 하지 중장을 만나 국내에 소재한 일본 불교 종파의 사찰을 한국 불교계가 인수할 것을 협의하기도 했다.
그는 동국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해 4년제 대학이 된 동국대의 제도적 안착에도 기여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와중이던 1952년에는 교육 분야의 능력을 인정받아 문교부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1953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제3대 민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교육행정가이자 정치가로도 활약했다. 1959년에 원자력원장에 취임했고, 1963년에는 모교 동국대학교의 총장이 되었지만 이듬 해에 세상을 떠났다.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처럼 김법린은 당시에 찾기 힘든 프랑스 유학생 출신의 선각자였고, 학계와 정계에서 동시에 활동한 불교계에서 보기 드문 명망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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