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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禪, 禪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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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1 년 8 월 [통권 제100호]  /     /  작성일21-08-04 15:21  /   조회6,93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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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 선禪 선과 시 3. 소동파의 「정풍파定風波」

 

 

모처럼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입니다. 비가 쏟아져도 우리는 예정대로 운문사 산행(사진 1·2)에 나섭니다.  

 

법원 주차장에 스무 명 가까이 나왔습니다. 모두 4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빗길을 달려 운문사 주차장으로 갑니다. 운문사 주차장 앞에 있는 식당에 차를 세우고 출발합니다.

 

여기서부터 사리암 주차장까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걸어갑니다. 도로 위에는 빗물이 고이다 못해 개울처럼 흘러내립니다. 어쩌다 승용차가 지나가면 보트가 지나가듯 물이 좍 갈라집니다. 물안개 자욱한 운문사 솔숲 길을 질퍽거리며 걸어갑니다. 

 

산길은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솔바람길 옆으로는 불어난 운문천이 폭포처럼 흘러갑니다. 걷는 내내 폭우로 불어난 계곡물 소리가 들려옵니다. 물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경계를 넘어서게 해줍니다. 

물안개 자욱한 솔숲 풍경은 한 폭의 그림입니다. 

다리를 건너가면 그대로 그림 속으로 걸어가는 기분입니다. 

솔바람 길, 소나무 냄새가 피부로 스며듭니다. 앞에 가는 친구는 바짓가랑이를 등산 양말 속으로 집어넣고 다부지게 걷는군요. 걷는다는 것은 신체가 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일이지만,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산길을 걸어가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운치가 있는 일입니다. 산속에 있다는 것은 이미 속세로부터 멀리 있는 것인데 그 위로 또 비가 내려 속세를 이중으로 벗어나게 해줍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려서 깨끗한 산속 풍경을 빗물로 한 번 더 깨끗하게 씻어줍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젖은 나뭇잎이 빗소리를 반사해 산속 깊은 곳까지 자잘한 반향음反響音으로 가득합니다.

 

“나는 걸을 때만 명상할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내 머리는 다리와 함께 움직일 때만 움직인다.”(주1)

 

이렇게 말한 사람은 루소입니다. 산길을 걷노라면 경치 이상으로 많은 것들이 우리 안에서도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빗줄기는 모든 것의 표면 위를 끝없이 내리칩니다. 빗속에서도 우리는 호흡을 놓치지 않으며 천천히 한발 한발 자신의 존재를 만끽하며 걸어갑니다. 이렇게 빗속에서 산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정토에 있는 것처럼 즐겁게 합니다.

 

 

사진 1. 안개비 속의 소나무.

 

 

 

빗속을 계속 걷고 있노라면 우리처럼 빗속으로 걸어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빗속에 걸어갔을까요. 수많은 사람 중에 오직 한 사람, 천 년 전에 우리처럼 비를 맞으며 산 속으로 걸어갔던 한 사내를 생각합니다. 그의 이름은 소식蘇軾이고 동파東坡 거사居士는 호입니다. 

 

제갈공명이나 이태백처럼 그도 본명보다는 소동파(1037-1101)라는 호로 더 많이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부유한 지식인 가문에서 태어나 20세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서서 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1082년 3월 7일, 마흔여섯 살의 소동파는 수도 개봉에서 멀리 떨어진 후베이성의 황주에 있는 산길을 친구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자 우의도 우산도 없어 친구들은 갈팡질팡했지만 그는 혼자 초연하게 걸어갑니다. 

 

그는 비가 그친 다음 그때 심정을 「정풍파定風波」라는 노래로 읊었습니다. 「정풍파」는 사패명詞牌名입니다. 모든 사詞에는 악보가 있었는데 그 악보를 사패詞牌라고 합니다. 사詞는 원래 먼저 곡조가 있고, 그 후에 곡조에 따라 사구詞句를 채워 넣는 것입니다. 

 

정풍파定風波

 

숲을 지나다 나뭇잎 때리는 빗소리가 들려도 괘념치 말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천천히 지나간들 어떠하랴

죽장과 짚신이 말 탄 것보다 가벼운데 누구를 두려워하랴

도롱이 하나면 한평생 안개비 내려도 살아갈 수 있다네

 

차가운 봄바람에 취기가 날아가니 조금은 싸늘하구나

문득 산 능선에 걸린 석양이 반가운데

고개 돌려 방금 비바람 치던 곳을 돌아보네

돌아가리라, 비바람이 불든 맑게 개든 개의치 않고(주2)

 

큰 비가 내려 옷이 다 젖고 장대비가 나뭇잎을 때려도 소동파는 괘념치 않습니다. 오히려 비를 맞으면서도 노래를 흥얼거리며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경지는 비에 구속되지 않는 경계를 보여줍니다. 이 시의 경지는 참으로 출중합니다. 

 

시인은 도롱이를 걸쳤습니다. 도롱이는 농민들의 우비 같은 것입니다. 안개비 자욱한데, 시인은 자유롭고도 평범한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말로는 평범하다지만 사실은 전혀 평범하지 않습니다.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다가 필화사건을 겪고 그곳으로 유배된 지 3년째였으니 그의 인생에 먹구름만 가득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이 시의 자아는 초월적 자아이고, “누구를 두려워하랴[誰.]”, 두 글자에는 호방한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하단의 시는 하나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술이 깬 후, 조금은 싸늘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소동파는 고개를 돌려 비바람 쳤던 곳을 돌아봅니다. 소동파의 이 “돌아보다[回首]”는 어떤 예술적 경지를 만나게 합니다. 

 

소동파는 매우 평범한 동사 “돌아가리라[歸去]”를 사용하여 자신의 시 속에 예술적 경지를 들여놓았습니다. “비바람이 불든 맑게 개든 개의치 않겠다”는 구절은 사실적 묘사이면서도 시적 우언寓言이 담긴 서술입니다. 날씨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굴곡 많은 인생에 대한 은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를 듣고 나면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 시를 불교 사상을 대표하는 가장 좋은 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진실로 그러합니다. 비바람이 불든 맑게 개든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경지입니다. 그 경지야말로 마음의 고향이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돌아가리라”는 소동파의 말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모의 정이자, 본래 성품으로 돌아가려는 의지입니다.

 

 


사진 2. 비 오는 날의 운문사와 호거산

 

 

소동파의 「정풍파」는 실로 빗속으로 걷는 일에 천근의 무게를 더해줍니다. 이런 시를 읽으면서 어떻게 그 경계를 우리들 현재의 삶으로 가져올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우리는 그 시절보다 훨씬 더 속되고 물질화된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요. 「정풍파」를 읊조릴 때마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소동파의 심정이 됩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 시를 읽고 좋아한다면 그때마다 「정풍파」는 되살아납니다. 그렇게 해서 좋은 시는 불멸의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우리를 본다면 비에 흠뻑 젖은 꾀죄죄한 노인들로 보겠지만 우리가 마음속으로 소동파의 「정풍파」를 흥얼거린다면 날씨나 불운에 울지 않는 훌륭한 인생이 거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솔바람길을 따라 사리암 주차장까지 올라 왔습니다. 사리암에는 올라가지 않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아쉽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돌아섭니다. 바짓가랑이를 타고 빗물이 흘러들어 걸으면 신발 속에서 찰박찰박 물소리가 납니다. 

 

나이가 들고 몸의 기능이 떨어지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도 그만큼 좁아집니다. 흰머리, 주름살, 뻑뻑한 관절, 아쉬워하고 슬퍼하면서도 생각하는 노쇠한 몸. 

 

문득 연약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의지할 데 없는 사람만이 천국을 본다는 말을 생각해냅니다.(주3) 오늘 하루,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우리는 평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고 단순하게 만들어주던 길, 삶의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우중산행입니다. 

 

 

주)

(주1) 장자크 루소, 『고백록』, 1770.

(주2) 東坡全集』 「定風波·三月七日」, “莫聽穿林打葉聲, 何妨吟嘯且徐行. 竹杖芒鞋輕勝馬, 誰怕? 一蓑煙雨任平生. 料峭春風吹酒醒, 微冷, 山頭斜照卻相迎. 回首向來蕭瑟處, 歸去, 也無風雨也無晴.”

(주3) 소노 아야코, 『나다운 일상을 산다』(2019), “『바이블』에 나오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히브리어인 ‘아나윔’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됐다고 하는데, 그것은 학대받는 사람, 고통 받는 사람, 가련한 사람, 가난한 사람, 온화한 사람, 겸손한 사람, 약한 사람 등의 뜻이다. 다시 말해서 아나윔은 국가, 부, 건강, 신분 등 모든 긍지를 빼앗기고 그 은혜를 받지 못했으며 신밖에 의지할 데가 없게 된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들만이 천국을 본다고 한다. 이것은 엄청난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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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1976년 시). 전 대구시인협회 회장. 대구대학교 사범대 겸임교수, 전 영신중학교 교장.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저서로 『보물찾기』(시와시학사, 2000), 『납작바위』(시와반시사, 2012), 『글쓰기 노트』(집현전, 2018) 등이 있다.
jtsu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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