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일본 티베트학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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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1 년 8 월 [통권 제100호] / / 작성일21-08-04 15:47 / 조회4,629회 / 댓글0건본문
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8. 가와구치 에카이河口慧海 1866-1945
일본 고대말기, 신라의 의상을 존경하며 화엄교학을 연구한 둔세승遁世僧 묘에明惠는 석존에 대한 사모의 정이 깊어 『대당천축이정기大唐天竺里程記』를 통해 인도 순례를 꿈꾸었다. 그러나 병이 나는 바람에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는 늘 출가자로서 “마땅히 있어야할 자세”를 자신의 신념으로 삼았다. 불교의 모습, 교단의 모습, 승려의 모습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법의 원형을 추구하는 마음은 여기에서 나온다. 근대에 이르러 묘에의 정신을 계승한 사람이 바로 가와구치 에카이河口慧海(1866-1945. 사진 1·2·3)다.
그는 오사카의 사카이시界市에서 신심 깊은 정토진종의 집안에 태어났다. 어릴 때 백부의 죽음을 보고 삶의 무상을 느꼈다. 집안이 쇠락해지자 그를 데리러 온 할머니가 가져온 석가일대기의 서적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소년 시절 3년간 술과 고기와 여성교제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기도 했다.
사진 1. 가와구치 에카이
1885년 산속 깊은 절에서 단식 좌선을 하던 8일째 되던 날,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허망할 것이라고 느꼈다. 자신은 수행보다는 학문에 의해 진리를 깨달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산을 내려오다 술 마시며 시신을 화장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이 술을 권했지만 거부하고 피곤이 겹쳐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일어나보니 화장을 하던 사람들은 없고, 자신의 몸에는 볏짚이 덮여 있었다. 체온을 간직하도록 그들이 덮어준 것이다. 1888년 이노우에 엔료가 창설한 철학관에 들어가 힘들게 수학했다. 1890년에는 도쿄의 황벽종 오백나한사五百羅漢寺에 출가했다. 스승의 급작스러운 은퇴로 주지까지 맡게 되었다.
그러나 철학관 졸업과 동시에 사퇴했다. 종단의 부패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교토부의 우지시宇治市에 있는 황벽종 본산인 만복사萬福寺의 말사인 별봉원別峰院에 틀어박혀 한역 대장경을 줄곧 읽었다. 그러는 와중에 또 다시 종단에 부정이 횡행하는 현실에 눈감을 수 없었다. 정화운동의 선두에 나섰지만 쓴맛만 보았다. 산을 내려와 자신의 초심으로 돌아갔다.
사진 2. 65세의 가와구치 에카이. 사카이시 시립도서관 제공.
경전의 원전은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로 쓰였지만 인도에 가지 않으면 구하기가 어렵다. 인도는 불교가 소멸된 지 오래되어 아마도 원전 구하기는 어렵고, 가까운 네팔이나 티베트에는 남아 있을 것이다. 특히 티베트어역 경전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 스리랑카에서 돌아온 샤쿠코넨釋興然을 만났다. 그는 일본 최초의 상좌부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남방불교의 계율을 받고, 산스크리트어 및 팔리어에 능통했다. 그를 도우며 가르침을 받는 중에 ‘불교 일요학교’를 열고 찬불가나 연극 등을 가르쳤다. 드디어 줄곧 구상해왔던 티베트 구법행의 계획을 1897년에 발표했다.
근대에는 서양의 종교학 내지는 불교학 연구 방법을 도입하면서 비로소 인도불교의 원전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직접 원전 자료를 구하자는 탐사여행이 일어났다. 티베트 탐사는 그 일환이다. 티베트에 불교가 유입되고 번역된 대장경이 12종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12세기의 나르탕판과 18세기 델게판이 유명하다. 티베트판 대장경은 범어불전을 축어逐語적으로 번역하고 있어 원전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역에 포함되지 않은 내용을 볼 수 있어 원전 연구에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쇄국적인 티베트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서구의 침입을 경계하는 것도 한몫했다. 여러 사람들이 입국을 시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진3. 가와구치 에카이. 소학관의 디지털대사천 제공.
가와구치의 계획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곳에 가면 살해될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부족한 비용은 여기저기서 보시 받았다. 계율을 지키는 사람은 어디에 가더라도 아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석존의 말씀을 굳게 그는 믿었다. 계획을 발표한 해 6월 드디어 오사카를 출발하여 고베에서 일본 우편선을 타고 한 달 만에 캘커타에 도착하여 다르마 팔라가 불적지 부흥을 위해 세운 마하보디협회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사무원 찬드라 보스를 만나 자문을 구했다. 다르질링에 가서 티베트 어학자를 만나 공부하도록 주선했다. 이후 1년 2개월 동안 학교를 다니며 티베트인과 다를 바 없는 회화 능력을 길렀다. 1899년 1월 붓다가야를 거쳐 네팔,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를 향했다. 고산병, 맹수와의 조우, 신분발각의 위험 등 숱한 어려움을 겪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어려움이 맞닥뜨리거나 결정을 해야 할 때 좌선삼매에 들어가서 생각하고 결정했다. 어느 사원에서는 자신이 범한 살도음의 대역죄를 진심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한 때 어린아이가 병에 걸려 죽어가는 상태에서 이를 회복시켜주기도 하여 그 집안의 신세를 지기도 했다. 드디어 3개월에 걸친 험로의 여행 끝에 최후의 목적지인 라사에 도착했다. 포탈라궁을 지나 티베트 최고의 죠캉 대사원 앞에 섰다. 수학승으로서 세라 대학에 입학했다. 어릴 때 외가 쪽의 의업에 관한 서적을 익혀둔 덕분에 병자들을 고쳐 천하의 명의로 이름이 났다. 달라이 라마 법왕에게도 알려져 초청을 받았다. 이로 인해 박사 대우를 받게 되었다.
사진4. 사카이시의 가와구치 에카이 동상.
그러나 중국인이라고 위장한 것이 발각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1902년 1년 2개월의 체재를 마치고 티베트를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주에 걸쳐 다르질링으로 돌아왔다. 캘커타에서 이노우에 엔료를 비롯하여 정토진종 본원사파 법주 오오타니 코즈이, 승려이면서 불교학자인 후지이 센쇼를 만났다. 귀국을 종용받았지만 1903년 다시 네팔을 향했다. 총리, 국왕, 법왕을 만나고 다음에 올 때는 일본의 한역대장경과 네팔의 범문대장경을 교환하기로 약속했다. 1903년 5월에 고베로 귀환했다. 여러 신문사 및 잡지사에서 취재가 쇄도했다. 도쿄 시사신보나 오사카 매일신문사는 그의 여행기를 게재했다. 또한 그가 가져온 서적, 물품은 도쿄미술관에 전시되었다. 또한 물품도록, 여행기 등이 출판되었다.
그는 다시 티베트·네팔 행을 계획했다. 목적은 티베트어 및 범어 대장경을 구해 일본의 대장경과 비교 대조하여 일본어 대장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많은 관료들과 재야인사들이 후원했다. 1905년 2월에 카트만두에 도착하여 약속한 한역대장경을 국왕에게 바치고 범어경전을 받았다. 1913년에는 다시 티베트를 향했다. 영국의 감시를 받았지만 순조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다음 해 1월 판첸 라마를 만나 대장경을 올리고, 8월에 라사에 도착, 옛 친구들을 만났다. 법왕을 만나 사본인 티베트 대장경(사진 4)을 받았다. 1년 정도 머물고 다시 귀국했다. 다시 신문에 여행기를 게재하여 세상에 알렸다.
당시에는 서구만이 아니라 일본도 가세하여 서역 탐험이 유행하여 많은 불전, 고경, 불상, 회화, 각종 유물 등이 유입되었다. 영국의 오렐 스타인, 프랑스의 폴 펠리오, 미국의 랭던 워너, 일본의 오타니 코즈이 등은 이 방면에 잘 알려진 사람들이다. 말이 탐험이지 문화재의 약탈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 가와구치는 나름의 불교적 가르침에 서고자 했던 셈이다. 1915년에는 철학관에서 이름이 바뀐 도요東洋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불교 원전연구를 비롯하여 여행기 집필, 티베트학 수립, 인재 양성 등에 힘을 쏟았다. 특히 티베트어·일본어사전인 『장화사전藏和.典』 편집에 정열을 쏟았지만 그의 생애에 완성하지 못했다.
예전부터의 생각 위에 티베트불교를 접하면서 재가불교의 부흥에도 노력했다. 1921년 석가모니불의 불교를 선양해야 된다며 아예 승려의 자격을 내려놓고 환속했다. 그리고 『재가불교』를 집필했다. 그가 17년 동안 구법행을 통해 인도, 네팔, 티베트에서 수집한 불교미술자료 818점, 민속자료 413점, 표본 255점 등은 전부 합해 1486점이다. 1954-5년에 그이 유족이 도호쿠東北 대학에 기증했다. 동양·일본미술사 연구실에 보관되어 있다. 서장西藏 여행기를 비롯한 그의 저술은 전집 24권으로 출판되었다.
가와구치의 계율에 대한 굳은 신념은 후에 『정진불교正眞佛敎』(1936)라는 논으로 확립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2천4백 년 전 인도에서 출생한 석가모니불이 창립하신 실행적 교법”이 정진불교라고 한다. 무엇을 실행했는가. 해탈자유를 위한 정법이다. 이를 통해 자신의 고환苦患을 멸하고, 가족 국가 세계를 평화 안락한 정토로 만드는 실천을 했다. 이를 바르게 실행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정진불교다. 자타 일체의 고통을 멸하는 근거가 되는 계율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타는 계율이 법신이며, 불체佛體임을 직간접으로 보여주었다. 계행이 없으면 법신도 불체도 없으며 불교도 없다.
사진 4. 델게판·라싸판 티베트대장경.
그는 계율이야말로 불교의 맥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그가 젊어서부터 실천했던 계율 수지가 자신의 평생을 일관되게 이끌었던 것이다. 불교인들, 특히 출가자들이 갖은 유혹에 넘어가고, 마침내 불교 교단이 위태로운 것은 계율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어느 시대나 기성교단의 쇠퇴는 이 계율정신의 쇠퇴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일본의 현실에서 본 것은 결혼과 육식이 완전히 풀린 모습이었다. 사원에 있으면서 5계마저 지키는 사람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출가라고도 재가라고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그는 재가불교의 역사를 따져본 후, 이를 ‘가행加行 승가’와 ‘실행實行 승가’로 나누고 있다. 전자는 재가불교도로서 불타와 정법과 승가의 감화를 받아 귀의하는 자를 말한다. 후자는 5계를 서수誓受하고 실천하는 우바새, 우바이를 말한다. 각자의 직업도 가진 채로 귀의삼보 위에 5계를 견지하는 자인 것이다. 이러한 길을 걷는 불교도는 경험지經驗智와 수행지修行智에 의해 만나는 사람들을 화도化度할 수 있다. 이들이야말로 실제로 보살위에 오른 사람들이다.
인도, 네팔, 티베트 등을 순례하며 그는 근대 불교의 활로를 찾았다. 원전에 대한 강렬한 열망은 결국 불교의 미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쩌면 대승 최고의 발전 단계에 놓인 티베트 불교는 그 열망을 충족시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출가와 재가의 벽이 무너지고, 세계 구제를 위한 불교 역할의 요구가 증대되는 현실에서 가와구치의 혜안은 더욱 빛을 발한다. 이미 불교는 스스로 진화하여 그러한 길을 가고 있다. 불교가 인류 구제의 마지막 등불임은 그 누구도 의심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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