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일곱 왕자 수행 근세 계맥·차선 시원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거연심우소요]
가락국 일곱 왕자 수행 근세 계맥·차선 시원


페이지 정보

정종섭  /  2021 년 8 월 [통권 제100호]  /     /  작성일21-08-04 15:38  /   조회5,348회  /   댓글0건

본문

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10. 하동 지리산 칠불사




地異靈山含龍舟 

七佛渡衆於影池 



 

봄날에 경남 하동군 화개마을로 가는 길이란 매화를 보러 가는 길이다. 요즘은 길을 따라 매화를 일부러 심어 매화 길을 만들어 놓고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지방자치단체가 생겨나고, 꽃 축제를 즐기는 수준에서 매화가 피어 있는 강 언덕길이나 산 아래 매화 밭을 찾아 가는 일이 흔하게 볼 수 있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가 멋쩍기도 하다. 매화구경으로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몰려들고 매실주를 마시고 매화꽃 사이에서 사진을 찍고 주차장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으니 매화가 사람에게 시달리는 시절이 되었다.  

 

 

사진 1. 칠불사. 

 

 

그러나 탐매의 의미는 이와 다르다. 매화는 한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고 이른 봄에 봄소식을 전하는 꽃이기에 불의不義와 위무威武에도 굴하지 않고 세상을 바로 세우려는 선비 지사들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리고 온갖 세파世波와 진애塵埃에도 물들지 않고 깨끗하고 청아한 품격을 지키는 지식인의 삶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천하의 지식을 궁구窮究하고 불의를 타파하고 올바른 세상과 나라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강한 정신의 소유자는 바로 매화와 같은 덕과 품성을 지닌 사람이다. 그리하여 중국 남송南宋의 시인 석호石湖 범성대范成大(1126-1193)는 「범촌매보范村梅譜」에서 천하제일天下第一의 꽃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조선 초기의 강희안姜希.(1418-1464)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소나무, 대나무, 연꽃, 매화를 최고로 평가하였다.

 

 

사진 2. 영지.

 

 

이런 의미에서 매처학자梅妻鶴子로 유명한 북송의 시인 임포林逋(967-1028)를 들 수 있다. 그는 매화와 학을 처와 자식으로 삼아 항주杭州 서호西湖 옆에 있는 고산孤山에 방학정放鶴亭을 짓고 은거하며 학문을 즐겼으니, 그 후 조선의 선비들도 이런 진정한 군자의 삶을 경모하고 그의 시를 찬탄하곤 했다. 유명한 그의 절창 ‘산원소매山園小梅’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진 3. 칠불사 아자방.

 

 

衆芳搖落獨暄姸 뭇 꽃들이 시들어진 때에 홀로 선연히 피어나

占盡風情向小園 작은 정원의 풍경과 정취를 모두 차지하였네. 

疏影橫斜水淸淺 성긴 매화가지 사이로 꽃 그림자 물위에 비스듬히 비추며 

暗香浮動月黃昏 달빛 으슴푸레한 저녁 하늘에 그윽한 향기 날려 보내네. 

霜禽欲下先偸眼 백학은 가지에 앉을 때 꽃을 먼저 훔쳐보고

粉蝶如知合斷魂 나비도 매화를 알고는 넋을 잃고 마는데 

幸有微吟可相狎 나는 복도 많아 가만히 노래하며 서로 희롱할 수 있으니

不須檀板共金樽 악기와 술이 없다 해도 아무 상관없도다.

 

이 시로 인하여 매화향기를 ‘암향暗香’이라고 하는 말도 생겨나고, 매화는 산림처사의 상징적인 꽃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어느 해인가 항주에 간 김에 그의 시를 상상하며 서호의 둘레 길을 따라 걸어봤지만, 관광객만 넘칠 뿐 고아한 임포 선생이 살다간 삶의 향기는 느끼기 어려워 다음 날 새벽 인적이 드문 시간에 혼자 호숫가를 천천히 걸어본 적이 있다.

 

 

사진 4. 부휴 선사 부도와 선원.

 

매화를 정말 사랑한 사람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선생이다. 그의 높고 깊은 학문은 말하지 않더라도 세속에서 벗어나 산림처사로 매화와 함께하며 인간 완성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 퇴계선생이다. 퇴계선생은 생전에 매화를 읊은 시만 무려 107수를 남겼고, 임종 시에도 서울에 두고 온 매화가 생각이 나서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사진 5. 부도.

 

아무튼 봄날에 섬진강변을 따라 매화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길을 걸으며 달까지 강에 비치고 매화향기가 은은히 물안개 위로 퍼지는 초저녁 밤의 정취에 빠져들면 그야말로 심춘탐매尋春探梅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송담松潭(1927- ) 대화상은 매화를 두고 의미심장한 게송을 읊었다. ‘尋春莫須向東去, 西園寒梅已破雪’, 즉 ‘봄을 찾으러 반드시 동쪽으로 갈 필요가 없느니라. 이미 서쪽 정원에 추운 겨울을 이겨낸 매화가 눈을 뚫고 나와 있으니.’ 속세의 인간들은 봄이 되면 모두 매화를 보러 간다고 너도 나도 동쪽으로 가기에 매화를 보고 싶은 자네도 덩달아 동쪽으로 가려고 할지 모르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네 집 서쪽 마당 정원에 이미 겨우내 북풍한설을 이겨낸 매화나무 한 가지가 쌓인 눈을 뚫고 꽃이 피워내고 있으니 말이다. 

 

 

사진 6. 조능 선사 판석 부도.

 

 

그렇다. 봄이라고 하여 굳이 매화를 보러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곳으로 갈 필요가 있을까? 차실에 꽂아둔 일지매에도 꽃이 있거늘. 굳이 방안에 꽃이 없어도 좋다. 심안心眼으로 이미 매화를 보면 된다. 달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왜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쳐다보고 있느냐 하는 말이다.

 

칠불사七佛寺(사진 1)는 지리산 반야봉般若峰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쌍계사雙磎寺와는 그리 멀지 않다. 칠불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가락국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101년에 가야산에서 이곳으로 와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수도생활을 한 다음 모두 동시에 성불하였다는 전설이 있기도 하고, 「칠불선원사적기」에는 신라 지마왕祗摩王(112-134) 8년인 119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일곱 왕자 이야기는 이렇다. 가락국 수로왕에게 아들이 10명 있었다. 한 사람은 태자가 되고 두 사람은 어머니인 허 황후의 성씨를 잇게 하였다. 나머지 7사람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외삼촌인 장유 보옥長遊寶玉 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일곱 왕자는 가야산, 수도산修道山, 와룡산臥龍山, 구등산九等山 등을 거쳐 칠불사에 정착하여 불철주야로 정진하여 모두 성불하였다. 이들이 수행 정진하는 동안 수로왕과 허 황후는 아들들이 보고 싶어 칠불사에 찾아와 만나기를 청했으나 속세와 인연을 끊은 아들들은 부모를 만나지 않고 다만 절 앞의 연못에 그림자를 비추어주었다고 하여 그 연못이 지금도 영지影池로 전해오고 있다(사진 2). 

 

 

사진 7. 대웅전.

 

 

당시 김수로왕이 머물었던 마을은 범왕촌梵王村으로 불리어 오늘날 범왕리凡王里라는 명칭으로 남아 있고 허 황후가 머문 곳은 대비촌大妃村이라고 하여 현재 대비리大比里라는 마을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수로왕은 6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려 태평성세를 이루었으며, 힘을 기울여 이곳에 대가람을 창건하고 불법을 크게 흥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에 아직 불교가 전해지기도 전이고, 더구나 한반도에는 불교가 전파되기 전이라, 이러한 설화가 사실이라면 한반도로 불교가 전해진 때와 그때 말하는 불교의 내용은 무엇인지 흥미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관한 연구는 전문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기다려봄이 좋을 것 같다.

 

신라 효공왕孝恭王(897-912) 대에 이르러서는 현재 김해 지역을 말하는 금관 지역 출신의 담공曇空 선사가 이 절에 와서 벽안당碧眼堂이라는 선실을 아자형의 2중 온돌방으로 축조하였으니, 이것이 유명한 아자방亞字房이다. 아자방은 방 내부구조를 한자의 ‘아亞’자 모양으로 만들어 양 벽면으로는 앉아서 좌선坐禪을 하는 자리로 만들고 가운데는 내려와 행선行禪을 할 수 있게 만든 온돌방 구조이다(사진 3). 여기서는 장좌불와長坐不臥, 일일일식一日一食, 묵언默言의 세 규칙을 철칙으로 삼았다. 한 번 불을 지피면 여러 날 온기가 유지되는 특별한 기법으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아자방의 구조가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이라면, 효공왕 당시에 좌선수행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화두 참선법이 없었기 때문에 수행자들은 경전을 공부하고 아자방에서는 벽을 보고 앉아 묵언 참선수행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에 관해서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인다.

 

아자방은 동국 제일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문수 동자의 화현 설화 등 많은 설화와 함께 그 이후 이곳에서 뛰어난 수행자들이 무수히 나왔다고 한다. 고려 시대의 청명淸明 대선사와 조선시대 중종 때의 추월秋月 조능祖能(1506-1544) 선사 등이 대표적이다. 조능 선사는 벽송壁松 지엄智嚴(1454-1534) 조사의 제자인데, 평생을 눕지 않고 밤중에는 돌을 짊어지고 인근 쌍계사에 가서 육조六祖 정상頂上 탑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힘든 수행을 하여 결국 조사관祖師關을 뚫었다고 한다. 

 

 

사진 8. 운상선원.

 

 

1534년 즉 중종 29년에는 서산西山 휴정休靜(1520-1604) 대사가 칠불암에 와 대웅전의 기와를 다시 잇고 낙성식을 하였으며, 광해군(1608-1622) 시절에는 서산 대사의 제자인 부휴浮休 선수善修(1543-1615) 대사가 오랫동안 이 절에 머물며 수행하고 당우를 보수하다가 73세로 입적했다. 칠불사 대웅전에서 뒤쪽 언덕길을 따라 선방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부휴 대사의 부도가 있다(사진 4). 부휴 대사는 부용 영관 선사의 제자이지만 나이로는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1544-1610) 대사와 비슷하여 두 대사 사이에 많은 소통이 있었고, 임진왜란에도 사명대사의 천거로 승장僧將이 되어 싸웠다.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고는 72세에 송광사에서 칠불암으로 와 주석하다가 곧 입적하였다. 문도들은 스승을 화장하여 영골靈骨을 해인사, 송광사, 칠불사, 백장사에 나누어 네 곳에 부도를 세웠다. 현재 해인사 국일암國一庵 부도원에도 부휴 선사의 부도탑이 있는 것은 이런 일로 말미암는다. 

 

1826년 순조純祖 26년에는 대은大隱(1780-1841) 선사가 영암 도갑사에서 스승인 금담金潭 장로와 함께 칠불사에 와서 아자방에서 『범망경梵網經』에 의지하여 용맹기도를 하던 중 부처님의 이마에서 5색 광명이 나와 대은 율사의 정수리에 비추는 가피를 받아 드디어 서상수계瑞祥受戒가 이루어져 스승인 금담 장로가 제자인 대은 율사에게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이로써 자장 이후 끊어졌던 해동계맥이 다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고, 금당 율사에 이어 초의草衣 선사禪師에게로 그 맥이 이어져갔다. 이러한 맥은 범해, 선곡, 용성龍城, 동산, 석암, 고산 스님으로 이어져 해동계맥의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칠불사 부도 밭에 백암당, 추월 조능, 무가당, 제월 통광 네 화상의 부도가 있다(사진 5). 이 가운데 평평한 판석으로 되어 있는 것이 추월 조능 화상의 부도이다. 이것이 부도가 된 것은 조능 화상이 정진 수도 중 앉은 채로 입적을 하였는데, 제자들이 그대로 좌탈한 스승을 바로 화장하기가 그러하여 일단 옹기에 넣어 묻어 두고 3년 후에 다시 탈골이 되면 화장을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 위에 판석을 덮어 두었다. 그런데 3년 후 제자들이 그 판석을 치우려고 할 때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일체 접근할 수 없게 하여 지금까지 그대로 있어 사실상 그 판석이 부도로 되어 있는 셈이다(사진 6). 칠불사에는 조능 선사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기 스님들 사이에 전해온다. 그 후 칠불사의 명성은 천하에 높았으니, 다승茶僧 초의 선사도 이곳에서 『다신전茶神傳』을 저술했고, 용성, 석우石牛, 금오金烏 선사들도 이곳 선방에서 수행하였다.

 

 

사진 9. 차밭.

 

 

1907년 의병 봉기 때 퇴락하였던 당우들을 서기룡徐起龍 화상이 중수하였으나, 1949년 여수·순천 사건으로 이 절이 완전히 불타 버렸다. 1965년 이후 제월霽月 통광通光(1940-2013) 화상이 버려진 폐사지를 보고 중창 복원을 기약하며 발원하였다. 문수성전에서 천일기도를 한 끝에 몽중가피夢中加被를 받아 신심이 깊은 단월들이 참가하고 정부가 협조하여 큰 불사를 일으켜 장장 15여년에 걸친 불사로 칠불사를 복원하였다. 1978년 이후 문수전文殊殿과 보광전普光殿 등이 중창되었으며, 1982년 아자방亞字房 건물이 복원되었다. 칠불사는 문수 보살이 살아 그 모습을 나타내어 수행자들에게 가피를 준다고 하는 신앙이 있어 문수도량이라고 불린다. 칠불사 넓은 마당에서 높은 축대위에 우뚝 서 있는 공중누각인 보설루普說樓에는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라는 큰 현판이 걸려 있다. 대중을 상대로 설법하는 공간이다. 

 

칠불사 대웅전(사진 7)에서 서북쪽으로 올라가면 운상선원雲上禪院이 있는데, 지금도 수좌들이 참선 수행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공간이다. 칠불사 골짜기에 구름이 운해雲海를 이루면 이 선원이 구름위에 있는 모습이어서 운상선원으로 이름 지었지만, 이곳을 신라의 옥보고玉寶高의 전설이 있다고 하여 옥보대玉寶臺라고 불리기도 했다(사진 8).

 

칠불사의 대웅전 문수전 등 당우들의 현판과 주련은 서예가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1927-2007) 선생이 썼다. 칠불사로 들어오는 입구에 서 있는 일주문에는 ‘지리산칠불사智異山七佛寺’라는 쓴 큰 현판이 걸려 있다. 통광 대선사의 글씨다. 선사는 이 글씨를 남겨 놓고 아자방에서 입적했다.

 

칠불사는 서산 대사 휴정休靜(1520-1604)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서산 대사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선백인 부용芙蓉 영관靈觀(1485-1571) 선사에게 배우다가 출가하여 30세에 명종이 보우 화상의 청에 따라 선교양종을 복구하여 승과를 부활할 때 제1회 시험에서 최상급으로 합격하여 그 후 승직의 최고인 판선종사判禪宗事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37세에 이러한 직이 선승의 본분이 아님을 깨닫고 그 직을 반납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반년을 수행한 후 지리산으로 와서 6년간 정진하였다. 이때 칠불사 원통암圓通庵과 칠불사 아래에 있는 내은적암內隱寂庵에도 주석했다.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는 내은적암에서 서산 대사는 『선가귀감禪家龜鑑』을 저술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1546-1589) 사건 때에는 서산 대사를 모함한 인간들도 있었으나 오히려 선조가 그 높은 인품을 확인하고 묵죽도墨竹圖를 그리고 시를 써 하사했다.

 

葉自豪端出 잎은 붓끝에서 나왔고,

根非地面生 뿌리는 땅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月來難見影 달은 떴지만 그림자를 볼 수 없고,

風動未聞聲 바람은 불어도 그 소리는 들을 수 없구나.

 

이 시를 받은 서산 대사가 화답한 시가 절창이다.

 

瀟湘一枝竹 소상강의 대나무 한 가지

聖主筆頭生 임금의 붓끝에서 생겨나 

山僧香執處 산승이 향 피우는 곳에서

葉葉帶秋聲 잎마다 가을 소리를 띠고 있구나. 

 

선조와 서산 대사는 이에 서로 신뢰가 쌓여 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전쟁에서 서산대사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의 자리에 임명하자 이를 거절하지 않은 그는 전국의 의승군義僧軍을 조직하여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신명을 다하여 왜적들과 싸웠다. 그의 뛰어난 고제高弟 사명 대사, 기허騎虛 대사 영규靈圭(?-1592), 뇌묵雷默 대사 처영處英(?-?) 등의 눈부신 활약은 이미 정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전쟁 중에도 당파를 갈라 모함하고 전공을 허위로 꾸미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장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짓을 한 인간들도 있었음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평소 공자와 맹자를 방패삼아 들고 나와 사익을 추구하던 자들이었다. 

 

이순신李舜臣(1545 .1598) 장군은 부하들이 죽어가는 전장에서 이런 나라꼴에 한탄을 거듭하다가 백성을 위해 혈성血誠으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전시 수상으로 나라를 건진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 오죽했으면 전쟁 중에도 이런 인간들의 비열함과 권모술수에 질려 다시는 출사하지 않겠다고 하고 후세를 위해 『징비록懲毖錄』을 남겼겠는가! 그가 남긴 『징비록』을 읽어 보면, ‘이것이 나라인가’ 하는 한탄이 절로 나오고, 백성이 죽고 부하들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장수가 먼저 달아나는 일이 다반사이고 그러면서도 서로 공을 다투고 남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인간 군상을 보면, 정말 구역질이 나온다. 

 


사진 10. 석간수.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연구하여 이러한 인간 군상들의 이름을 지워지지 않게 기록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공훈록功勳錄에 올라간 인물들의 공훈이 사실인지 그리고 그의 공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남의 공을 가로챈 것인지도 당시 사람들의 문집이나 일기 등을 세밀히 연구하여 옳고 그름을 바로 잡을 필요도 있다고 본다. 이런 국난을 당하고 그 이후에는 청나라의 침공을 받아 인조가 항복하는 수모를 겪고 또다시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일을 겪었다. 그 후 세월이 지나고 나라가 여러 차례 위기에 처하고 결국에는 나라가 일본에게 망하기까지 했음에도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득실거리고 있다! 

 

불교에서 선도 악도 없다고 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옳은 것이다. 선과 악은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고 국가를 형성하면서 인간이 다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서 이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이 필요하여 여기서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선과 악은 분명히 구별하여야 한다. 한 개인의 마음 세계에서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신정국가를 제외한 모든 문명국가의 헌법에는 마음의 자유 즉 양심의 자유로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의 주관적 내면적 가치판단의 영역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영역으로 들어가는 순간에는 여기에는 규범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과 악은 분명히 구별하고 악에 대해서는 응징을 하여야 한다. 그래야 사회와 국가가 유지되고 모든 인간이 존엄한 존재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초의草衣 의순意恂(1786-1866) 화상은 1828년 여름에 칠불사에 갔는데 당시 칠불선원의 승려들은 차나무의 잎을 언제 따는지 어떻게 차를 만들고 우려내는지를 잘 몰라 좋은 재료를 가지고 수준 낮은 차를 만들어 마시고 있는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곳 아자방亞字房에 머물며 중국 청나라 때 백과사전식으로 편찬된 『만보전서萬寶全書』의 ‘채다론採茶論’의 내용 중 차나무 잎을 따는 시기, 차를 만들고 보관하는 방법, 차를 품질을 식별하는 방법, 물과 불을 조절하는 방법, 차를 끓이는 방법, 차를 마시는 방법 등 차생활의 실제에 있어 중요한 항목들을 가려내어 붓으로 직접 베껴 쓴 다음 이를 『다신전茶神傳』이라고 이름 붙이고 1830년에 발문을 붙여 완성하였다. 초의 화상이 초록하여 쓴 ‘채다론’은 원래 모환문毛煥文이 쓴 「다경채요茶經採要」이고, 이 글의 원래 저술은 명나라 장원張源이 쓴 「다록茶錄」이다. 

 

그리고 이는 그 후 1837년에 초의 선사가 정조正祖(1776-1800)의 부마인 해거海居 도인道人 홍현주洪顯周(1793-1865)의 요청을 받아 저술한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함에 있어 기초적인 자료가 되었다. 「동다송」은 차의 역사부터 차의 품종과 생산지 그리고 품질과 효능 등을 평하며 조선에 나는 우리나라 자생 차인 동차東茶의 덕성과 우수성에 관하여 모두 31수의 송頌으로 지은 것이다. 단순한 송을 지은 것이 아니라 중국 저작물에 나오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심혈을 기울여 문학적인 가치도 높게 저술한 것이다. 

 

「동다송」을 보면 단테Alighieri Dante(1265-1321)의 『신곡新曲, Divina Commedia』이 떠오른다. 『신곡』이 문학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용을 보면, 당시 중세 이탈리아 피렌체의 정치 상황, 정치적인 인물과 행위에 대한 평가, 철학과 종교의 문제, 국가관과 인간관 등을 바탕으로 하여 이를 리듬이 있는 운문으로 써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켜 놓은 것이다. 「동다송」은 칠불사에 머물 때 쓴 것은 아니지만, 초의 선사가 『다신전茶神傳』을 편찬할 필요성을 느낄 만큼 차도의 틀을 바로 세우려고 한 만큼 칠불사에서는 이후 이 맥을 이어 ‘다선일여茶禪一如’ 실천하였다. 

 

칠불사에는 초의 선사의 진영을 모시고 그 업적을 기리며 불가의 다법茶法을 알리고 모임을 하는 공간으로 선다원禪茶院이 있다. 당대의 선교 양兩대사인 통광 대선사는 전란으로 사라진 칠불사를 중창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되살려놓았을 뿐 아니라 초의 선사의 선맥과 차도를 이어 「동다송」과 『다신전』을 번역하여 강론도 하였다. 탄허呑虛(1913-1983) 대종사의 수제자인 통광 화상에게서 법을 받은 도응道應 화상은 이러한 맥을 그대로 이어갈 뿐 아니라 특히 칠불사가 선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선방 수좌들을 지극 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지금도 칠불사에는 자생차가 자라는 차밭을 가꾸고 있다(사진 9). 더 일품인 것은 칠불사의 석간수石間水가 명수라 찻물로는 더 없이 좋은 물이다(사진 10). 명차名茶에 명천名泉이라 했던가, 차가 좋아도 물이 좋지 않으면 차신茶神을 살려낼 수 없으니 칠불사에는 이 모두가 두루 갖추어져 있고, 선다불이禪茶不二의 다법茶法 역시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차가 좋고 물이 좋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담茶談에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면 말이다. 도응 스님이 주시는 차 한 잔을 마시고 일어서는데 결국 차와 물만 축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정종섭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