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 이야기]
‘돈오’ 처음 선에 도입 ‘지知’ 아닌 ‘견見’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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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1 년 9 월 [통권 제101호] / / 작성일21-09-06 11:48 / 조회9,451회 / 댓글0건본문
중국선 이야기 9
하택荷澤 신회神會의 선사상
동산법문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선사상이 중국불교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신수의 북종이라고 할 수 있다. 신수는 이른바 “양경兩京의 법주法主, 삼제三帝의 국사國師”로 칭해지며, 그의 사후에 제자인 보적普寂이 전국의 승가를 통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인의 또 다른 제자인 혜능의 남종을 선양하고자 평생을 걸쳐 노력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하택荷澤 신회神會(684-758)이다. 후대에 조사선이 주류를 형성하게 한 이는 바로 신회라고 평가할 만큼 선사상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근대에 발견된 돈황敦煌 사본 가운데 최초로 신회의 저술을 발굴하고, 그에 대한 교감校勘을 진행해 편찬한 호적胡適은 신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중국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성공한 혁명가, 인도선印度禪의 훼멸자, 중국선中國禪의 건립자, 가사전법袈裟傳法이라는 위사僞史의 제조자, 서천이십팔조西天二十八祖 위사의 최초 수립자, 『육조단경』의 가장 빠른 원료原料의 제공자, 역사를 조작하여 혁명의 무기로 사용한 최대의 성공자, --- 이것이 우리의 신회神會 선사이다.”(주1)
이러한 호적의 평가는 중국선을 논함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하여 『육조단경』은 신회의 어록으로부터 연원함이 밝혀졌다. 그러나 신회의 어록에 보이는 선사상은 『육조단경』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오히려 여러 부분에 있어 미진함을 보인다. 따라서 혜능의 『육조단경』을 논하기 전에 먼저 하택 신회의 이른바 ‘육조 현창운동’과 그의 선사상을 고찰하는 것이 중국선을 이해하는데 보다 합리적이라고 하겠다.
신회의 전기는 『송고승전』 등에 상당히 다양하게 실려 있는데, 속성은 고高이고, 호북湖北 양양襄陽 출신이며, 스승을 따라 유학의 오경五經을 전수받아 지극히 통하고 이해가 깊었고, 다음으로 노장老莊을 찾아 신령스럽게 부합하고 확연하였다고 한다.(주2)
그 후에 『후한서後漢書』에 실린 불교의 설을 열람하고서 본향의 국창사國昌寺에서 호원顥元의 문하로 출가했으며, 다양한 경전을 외워 암송하기를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게 하였고 한다.(주3) 그의 어록에 실려 있는 『대승돈교송大乘頓敎頌』의 서문에 “유치과幼稚科에 있을 때, 산을 유람하며 도를 찾았다.”(주4)라고 스스로 기술하는 바와 같이 어려서 출가했으며, 여러 곳을 참방하여 도를 물었다고 한다. 특히 신회는 “열반본적涅槃本寂의 뜻을 물었으나, 모두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주5)고 기술하고 있다.
후에 옥천사玉泉寺의 신수神秀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3년을 시봉했으며, 신수가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청으로 제도帝都로 간 이후에 조계曹溪의 혜능慧能 문하로 들어갔는데, 이때 신회는 13세 혹은 14세의 어린 나이였다. 혜능과 신회의 첫 만남에서의 대화는 여러 자료에서 조금씩 다르게 묘사하고 있으며, 후에 이를 근거로 신회를 ‘지해종도知解宗徒’로 평가하기도 한다.
혜능의 문하에서 몇 년을 수학한 이후, “신회는 북으로 유행하여 견문을 넓혔으며, 서경西京에서 계戒를 받았다.”(주6)라고 하는데, 이로부터 구족계를 받기 위해 북상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서경은 장안長安으로, 이 시기는 장안뿐만 아니라 동경東京인 낙양洛陽도 모두 신수의 제자인 보적을 중심으로 한 북종이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회는 이 시기에 북종의 사상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이후 경룡景龍 연간(707-709)에 신회는 다시 혜능 문하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혜능에게 인가를 받고 은밀히 법을 부촉 받았다고 한다.(주7)
혜능이 입적한 이후 신회는 몇 년간 조계에서 활동하다가 개원開元 8년(720)에 황명으로 남양(南陽, 현 하남성河南省 남양시南陽市)의 용흥사龍興寺에 주석하였다. 이로부터 신회는 중앙정부의 고관들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와 관련된 자료와 어록에는 호부상서 왕거王據, 예부시랑 소진蘇晉, 남양태수 왕필王弼, 낙양현령 서악徐鍔 등과 문답들이 보이는 것과 같다.
이렇게 중앙 고관들의 확고한 지지기반을 확보한 후에, 신회는 개원 18년(730) 정월 15일, 신회는 활대(滑臺, 현 하남성河南省 활현滑縣) 대운사大雲寺에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어 공개적으로 조계 혜능이 달마선의 진정한 계승인임을 알렸다. 이는 독고패獨孤沛가 기록한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의 제목으로 전해오는데, 서문에 보이는 “제자는 신회 화상의 법회에서 화상과 숭원崇遠 법사法師가 여러 이치들을 두고 논쟁하는 것을 보고 이 책을 지었는데, 개원 18년(730), 19년, 20년 동안 그 의론이 확정되지 않아 책을 완성시킬 수 없었다. 의론하는 바가 모두 다르니, 이제 개원 21년에 논쟁한 내용을 발췌해 한 권으로 묶는다.”(주8)는 기술을 통해, 무차대회는 3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거행됐었음을 알 수 있다.
무차대회에서 논한 것을 모두 언급할 수 는 없지만, 신수의 북종은 “마음을 모아 정에 들고[凝心入定], 마음에 머물러 깨끗함을 간하며[住心看淨], 마음을 일으켜 밖을 비추며[起心外照], 마음을 포섭해 안으로 증득함[攝心內證]”을 추구하는 법으로, 이는 결코 ‘돈오’를 표방하는 남종의 종지라고 할 수 없음을 논증하고 있으며, 둘째는 달마 대사는 항상 법을 부촉하며 가사袈裟를 전했는데, 북종의 신수는 ‘전법가사’가 없으므로 정통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셋째는 바로 ‘서천팔대설西天八代說’이다. 즉 “여래-가섭-아난-말전지末田地-사나바사舍那婆斯-우바굴優婆.-수바밀須婆蜜-승가라차僧伽羅叉-보리달마”(주9)로 계승되는 법맥도 알지 못하니 신수는 정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회의 무차대회는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천보天寶 4년(745)에 병부시랑 송정宋鼎이 신회를 동경인 낙양으로 청하여 하택사荷澤寺에 머물게 하였고, 그에 따라 후세에 ‘하택 신회’라고 칭하게 되었다. 낙양에서도 북종에 대한 비판과 혜능의 남종 선양을 지속하였는데, 스스로 『현종기顯宗記』를 찬술하여 남종의 정통성을 밝혔고, 유명한 시인 왕유王維를 청해 「육조능선사비명六祖能禪師碑銘」을 찬술하였으며, 송정에게도 「당조계능대사비唐曹溪能大師碑」를 찬술하게 하였고, 하택사 안에 일선당一禪堂을 짓고서 혜능의 조상造像을 봉안하였으며, 벽에 달마로부터 혜능에 이르는 조사상을 그리고 이를 ‘육엽도六葉圖’라 하였고, 태위 방관房琯은 「육엽도서六葉圖序」를 찬술하였다. 이에 대하여 종밀은 『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혜능 화상이 열반에 든 뒤 북종의 점교漸敎가 성행하여 돈교頓敎 전파에 장애가 되었다. …… 천보 연간 초에 하택 화상이 낙양에 들어와 돈교를 크게 일으키자 그때서야 신수 문하는 방출傍出이며 법문은 점수漸修임이 드러났다. 이와 같이 돈頓·점漸의 두 종파가 동시에 유행하자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선별키 위해 남·북으로 표시하였는데, 남종·북종의 명칭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주10)
이와 같이 신회는 지속적으로 북종을 비판하고 남종을 선양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북종에서의 반격이 시작되어 천보 12년(753)에 조어사 노혁盧.은 신회를 무고하여 현종玄宗은 익양(.陽, 현 하남성河南省 연천현演川縣)으로 좌천시켰고, 다시 무당군(武當郡, 현 호북성湖北省 균현均縣)에 이주시켰으며, 천보 13년에 다시 양주(襄州, 현 호북성湖北省 양양시襄陽市)로 이주시켰고, 같은 해 7월 다시 형주(荊州, 현 호북성湖北省 형주시荊州市)의 개원사開元寺로 이주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사安史의 난(755년 12월-763)이 발생하여 현종은 성도成都로 피난하였고, 국가의 재정이 궁핍 되자 신회 선사를 청하여 계단을 설치하여 도승度僧하게 하고 향수전香水錢이라는 세금을 납부하게 하여 군비에 조달하였는데, 이는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숙종肅宗은 신회를 궁으로 청하여 설법을 들었으며, 전란으로 소실된 하택사를 재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회는 건원乾元 원년758에 형주荊州 개원사開元寺에서 입적하였다. 사후에 낙양 보응사寶應寺에 탑을 세우고 명칭을 ‘반야般若’라 하였으며, 시호諡號를 ‘진종眞宗’이라 하였다. 30여년 후에 덕종德宗은 정원貞元 12년(796)에 “황태자에게 칙령으로 여러 선사들을 모이게 하여, 선문 종지宗旨의 모범을 정하였으며, 전법傳法의 방傍과 정正을 가리게 하였고, 칙명으로 하택 대사를 제7조로 삼았다.”(주11)고 한다. 따라서 신회 선사가 ‘7조’가 되었으니, 당연히 혜능은 ‘6조’로 인정된 것이며, 평생의 노력이 원만한 회향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신회의 선사상은 어떤가? 신회의 선사상을 모두 논하기에는 짧은 지면에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종을 공격한 가장 중요한 근거는 ‘돈오’에 있다고 하겠다. 신회의 ‘돈오’에 한정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신회는 ‘돈오’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사事는 모름지기 이지理智가 함께 아우러짐을 ‘돈오’라 한다. 계위階位와 점법漸法의 해석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이 돈오의 뜻이다. ‘자기 마음[自心]’이 본래 공적한 것을 돈오라 한다. 마음이 얻을 바가 없는 것을 돈오라 한다. ‘마음에 접근한 것이 도[卽心是道]’라는 것을 돈오라 한다. 마음이 머무를 바가 없는 것을 돈오라 한다. 법에 대하여 깨닫는 마음이 있고, 마음이 얻은 바가 없는 것을 돈오라 한다. 일체법이 일체법임을 아는 것을 돈오라 한다. 공空을 듣고 ‘공’에 집착하지 않으며, 불공不空도 취하지 않는 것이 돈오이다. ‘나[我]’를 듣고 ‘나’에 집착하지 않으며, ‘무아無我’를 취하지도 않는 것이 돈오이다. 생사生死를 버리지 않고 열반涅槃에 드는 것이 돈오이다.”(주12)
“무릇 도를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불성佛性을 돈견頓見하여 점차 인연因緣을 닦아 이 생生을 여의지 않고도 해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비유하자면 어머니가 자식을 돈생頓生하여 젖을 먹여 점차 성장토록 키우면 그 아들의 지혜는 자연히 느는 것과 같다. 돈오하여 불성을 보는 것[見佛性]도 이와 같아서 지혜가 점차 늘게 된다.”(주13)
이로부터 신회가 설하는 ‘돈오’에 대한 설명 가운데 “모름지기 이지理智가 함께 어우러짐을 돈오라 함[理智兼釋, 謂之頓悟]”, “스스로 그러한 것이 돈오의 뜻[自然是頓悟義]” 등의 구절은 바로 도생道生이 제창한 돈오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신회의 돈오는 도생이 제창한 돈오와 다르게 철저하지 못하다. 돈오의 대표적 구절은 ‘이지겸석理智兼釋’인데, ‘이理’는 ‘소(所, 대상)’를 의미하고, ‘지智’는 ‘능(能, 주체)’에 해당되며, 그것이 함께 희석[兼釋]되는 상태를 ‘돈오’라고 한다.
다시 말해 설탕이 물에 희석되면 설탕물이 되듯이 주체와 대상이 ‘불이不二’의 상태가 되어야 만이 비로소 ‘돈오’라고 칭할 수 있다. 따라서 신회가 말하는 “점차 인연을 닦음”과 “지혜가 점차 늘어남”은 ‘돈오’와는 괴리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회는 도생과는 다르게 ‘돈오’의 개념을 설정하였다고 한 것으로 이해할 여지는 있다. 이는 종밀이 “하택은 먼저 돈오하고, 그 깨달음에 의지해 닦는다고 하였다.”(주14)라고 신회의 돈오를 평가는 점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선에 ‘돈오’를 처음으로 도입한 이는 분명하게 신회이고, 비록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자불성自佛性’으로부터 ‘자성自性’의 개념을 이끌고, 또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제창한 이도 바로 신회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종밀은 신회의 선사상적 특질을 ‘지知’라는 한 글자로 표현하고, 그를 “온갖 묘함으로 들어가는 문[衆妙之門]”(주15)으로 파악하여 개괄함에 따라서 후대에 있어 신회 선사를 ‘지해종도知解宗徒’라고 비하되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데, 어록을 통관하면 신회가 강조하는 것은 ‘견見’이지 결코 ‘지’가 아님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하택 신회 선사는 앞에서 언급한 호적의 평가와 같이 중국선, 엄밀하게 말하자면 조사선을 건립한 공로가 있다고 하겠다. 비록 그가 제창한 ‘서천팔조’나 ‘가사袈裟 전법傳法’ 등이 조작된 것이라 할지라도, 나아가 ‘돈오’의 개념에 철저하지 못한 혐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평생을 목숨을 걸고 혜능의 남종선을 선양하기 위해 바쳤던 노력은 분명하게 평가해야만 할 것이다.
주)
(주1) 胡適校定, 『神會和尙語錄的第三個敦煌寫本』(補遺編25, 211a)
(주2) [宋]贊寧, 『宋高僧傳』卷8(大正藏50, 756c), “從師傳授五經, 克通幽., 次尋莊老靈府廓然.”
(주3) 앞의 책. “本府國昌寺顥元法師下出家. 其諷誦群經, 易同反掌.”
(주4) 胡適校定, 『新校定的敦煌寫本神會和尙遺著兩種』(補遺編25, 167a), “在幼稚科, 遊山訪道.”
(주5) 앞의 책. “問以涅槃本寂之義, 皆久而不對.”
(주6) [唐]宗密撰, 『圓覺經大疏釋義.』卷3(卍續藏9, 532b), “神會北遊, 廣其聞見, 於西京受戒.”
(주7) 敦煌本, 『六祖壇經』(大正藏48, 344a), “상좌 법해法海가 앞으로 가서 ‘대사! 대사께서 입적하신 후, 의법依法은 마땅히 어떤 사람에게 부촉됩니까?’라고 하자, 대사가 말씀하였다. ‘법은 곧 부촉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묻지 말라. 내가 입멸한 후 20여 년, 사법邪法이 어지럽게 일어나, 나의 종지宗旨를 미혹시킬 때, 한 사람이 나와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교의 옳고 그름을 정할 것이니, (옳은 것은) 바로 나의 정법正法이다.’[上座法海向前言: 大師, 大師去後, 衣法當付何人? 大師言: 法卽付了, 汝不須問, 吾滅後二十餘年, 邪法.亂, 惑我宗旨, 有人出來, 不惜身命, 定佛敎是非, 卽是吾正法.]”
(주8) [唐]獨孤沛, 『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 胡適校定, 『新校定的敦煌寫本神會和尙遺著兩種』(補遺編25, 42a), “弟子於會和上法席下見和上與崇遠法師諸論義, 便修, 從開元十八,十九,▩年, 其論本.不定, 爲修未成. 言論不同, 今取▩載一本爲定.”
(주9) 앞의 책(補遺編25, 76a), “菩提達摩西國承僧伽羅叉, 僧伽羅叉承須婆蜜, 須婆蜜承優婆., 優婆.承舍那婆斯, 舍那婆斯承末田地, 末田地承阿難, 阿難承迦葉, 迦葉承如來付. 唐國以菩提達摩而爲首, 西國以菩提達摩爲第八代.”
(주10) [唐]裴相國問宗密答, 『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卍續藏63, 31c), “能和尙滅度後, 北宗漸敎大行, 因成頓門弘傳之障. …… 天寶初, 荷澤入洛, 大播斯門, 方顯秀門下師承是傍, 法門是漸. 旣二宗雙行, 時人欲揀其異, 故標南北之名, 自此而始.”
(주11) [唐]宗密撰, 『圓覺經大疏.』卷三下(卍續藏9, 532c), “.皇太子集諸禪師楷定禪門宗旨, 搜求傳法傍正, 遂有.下, 立荷澤大師爲第七祖.”
(주12) 『南陽和尙問答難徵義』(石井本), 楊曾文編校, 『神會和尙禪話錄』(中華書局, 1996年版, p.80), “事須理智兼釋, 謂之頓悟; .不由階漸而解, 自然是頓悟義; 自心從本以來空寂者, 是頓悟; 卽心無所得者爲頓悟; 卽心是道爲頓悟; 卽心無所住爲頓悟; 存法悟心, 心無所得, 是頓悟; 知一切法是一切法, 爲頓悟; 聞說空, 不着空, 卽不取不空, 是頓悟; 聞說我不着我, 卽不取無我, 是頓悟; 不捨生死而入涅槃, 是頓悟.”
(주13) 『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 楊曾文編校, 『神會和尙禪話錄』(p.30), “夫學道者, 須頓見佛性, 漸修因緣, 不離是生, 而得解脫. 譬如其母, 頓生其子, 與乳, 漸漸養育, 其子智慧自然增長. 頓悟見佛性者, 亦復如是, 智慧自然漸漸增長.”
(주14) 『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卍續藏63, 35c), “荷澤則必先頓悟, 依悟而修.”
(주15) 宗密, 『禪源諸詮集都序』(大正藏48, 403a), “知之一字, 衆妙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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