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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
윤회란 해탈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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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  2021 년 9 월 [통권 제101호]  /     /  작성일21-09-06 11:31  /   조회5,71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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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法數 9 / 무아와 윤회 ①

 

동아시아불교 전통에서는 불교의 중요한 교리를 법수法數로 분류하고, 그 뜻을 설명해왔다. 오늘날 불교사전의 표제어가 바로 법수에 해당된다.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 법수의 순서에 따라 불교교리를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편집부로부터 ‘무아와 윤회의 문제’에 대해 먼저 연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왜냐하면 불교신자들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4회에 걸쳐 ‘무아와 윤회의 문제’에 대해 연재하기로 했다. 이번호에서는 「불교 이전의 윤회사상」을 먼저 다루고, 그 다음 「불교의 윤회사상」, 「윤회의 주체」, 「업과 재생의 관계」에 대해 순서대로 살펴볼 생각이다. 

 

초기불교에서부터 후기불교에 이르기까지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무아와 윤회의 문제이다. 흔히 무아설과 윤회설은 상호 모순적이며 서로 충돌한다고 알려져 있다. 무아설(無我說, anatt.v.da)은 인도의 다른 종교·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의 고유한 사상이다. 한편 불교에서는 윤회(輪廻, sa.s.ra)를 중요한 교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 즉 고정 불변하는 실체적인 아뜨만(.tman, 自我)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당장 문제가 제기된다. “무엇이 윤회하고 누가 과보를 받으며 누가 열반을 성취하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회의 의미와 기원에 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윤회輪廻라는 용어는 산스끄리뜨 상사라sa.s.ra를 번역한 말이다. sa.s.ra는 sa.과 s.ra의 합성어이다. sa.은 ‘함께’라는 뜻이고, s.ra는 ‘달리다, 빨리 움직이다, 흐르다, 건너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sa.s.ra는 글자 그대로 ‘함께 흐르는 것’ 또는 ‘함께 흘러감’이라는 뜻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철학 가운데 짜르와까(C.rv.ka, 唯物論)를 제외한 모든 종교와 철학은 윤회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인도의 종교·철학은 모두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나름대로 수행과 해탈의 사상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경미 작作, 야생 백합. 

 

인도의 종교·철학에서 말하는 윤회란 어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지은 자신의 업業을 가진 영혼이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자신이 지은 업이 다시 태어날 세계, 종류, 계급, 성性, 모습 등을 결정짓는다고 한다. 그러나 업이 남김없이 소멸되면 윤회는 끝난다. 즉 지은 바 업이 없으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이것을 ‘해탈(解脫, mokkha, Sk. mok.a)’이라고 한다.

 

그런데 힌두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로 아뜨만(.tman, 自我)을 내세우고, 자이나교에서는 지와(j.va, 영혼)를 내세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와 같은 윤회의 주체를 내세우지 않는다. 또 힌두교에서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상태’를 해탈이라고 하고, 자이나교에서는 ‘영혼이 모든 업에서 벗어나 우주의 정상에 올라가 그곳에서 영원한 안락을 누리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일체의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난 열반의 상태를 해탈이라고 한다. 이처럼 인도의 종교·철학에서 똑같이 윤회와 해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인도에서 윤회사상은 어떻게 태동하게 되었는가? 인도의 가장 오래된 문헌인 『베다Veda』에는 아직 윤회사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베다 시대(B.C. 1,500-1,000)의 사람들은 내세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장수長壽나 다산多産과 같은 현세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삶의 전부였다. 브라흐마나(Br.hma.a, 梵書) 시대(B.C. 1,000-800)에는 사후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은 이미 사후에 생존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후에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제사祭祀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빠니샤드(Upani.ad. 奧義書) 시대(B.C. 800-500)에는 제사보다는 철학적 사색에 몰두했다. 따라서 『우빠니샤드』는 이전의 『베다』와 『브라흐마나』와는 사상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즉 『브라흐마나』에서는 제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우빠니샤드』에서는 제사를 저급한 수준으로 여겼다. 『우빠니샤드』 사상의 두 중심 축軸은 아뜨만(.tman, 我)과 브라흐만(brahman, 梵)이다. 『우빠니샤드』에서는 개인적 영혼.tman과 우주적 영혼brahman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을 체계화시켰다. 여기서 새로운 주제인 업(業, karman)과 윤회(輪廻, sa.s.ra)의 사상이 나오게 되었다.

윤회설은 내생에 다시 태어난다는 재생사상을 바탕으로 몇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즉 재생의 주체인 아뜨만(.tman, 我), 재생의 원인인 까르만(karman, 業), 아뜨만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인 브라흐만(brahman, 梵)이다.

 

아뜨만의 개념도 『베다』와 『브라흐마나』에서 말하는 것과 『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베다』와 『브라흐마나』에서 말하는 아뜨만은 불변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육체의 소멸과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이고, 제사의 결과가 다하면 소멸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아뜨만은 실체적이고 영속적인 성질을 가진 ‘개체의 영혼’을 의미했다.

 

까르만karman은 어근 k.(to do)에서 파생된 명사로, ‘일·행동·행위’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업業이라고 번역한다. 까르만의 개념은 “자기가 행동하고 자기가 그 결과를 받는다[自業自得].”는 것이다. 이 사상은 재생신앙을 하나의 진정한 이론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업설業說은 인간의 행복과 불행, 그리고 인간사회의 불평등한 원인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업설로 인해 윤회사상이 더욱 확고해졌다고 볼 수 있다. 즉 윤회사상은 업설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까르만 사상의 출현은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크게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들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한편 아뜨만[我]이 개체적인 영혼이라면 브라흐만[梵]은 우주적인 영혼이다. 브라흐만은 “태초에 혼자 존재했던 최초의 원리이고 모든 현상 속에 내재한 유일한 실체實體이다. 또한 경험적인 현실세계를 유지하는 힘이고 모든 것, 존재하는 것, 유일한 실재이고 변하는 모든 것 가운데 변하지 않는 근본이다.

 

브라흐만의 개념은 『베다』와 『브라흐마나』를 거쳐 『우빠니샤드』에서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우빠니샤드 시대에 이르러 브라흐만은 아뜨만과 함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우빠니샤드』의 사상가들은 모든 존재가 ‘그것’에서 나와서 ‘그것’ 덕택으로 살다가 죽은 후에 ‘그것’으로 되돌아가는 ‘어떤 것’이 브라흐만이라고 생각했다. 즉 브라흐만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그러나 모든 것 자체가 브라흐만은 아니다. 땅·물·불·바람 등 그것들 자체는 브라흐만이 아니다. 브라흐만은 모든 것 속에서 그것의 본질로서 내재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브라흐만은 모든 존재와 사물을 연결시켜 주고 그것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존재이다.

 

만일 브라흐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주의 질서는 유지될 수 없다. 태양과 달은 운행을 멈추고 하늘과 땅은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우빠니샤드』의 사상가들은 브라흐만을 정의하는 데 열중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정의定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다neti, 아니다neti.”와 같이 부정사를 되풀이해서 그것을 설명하기도 했다.

한편 윤회사상을 논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 해탈이다. 해탈이 윤회의 구성 요소는 아니지만, 윤회에서 벗어난 궁극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목샤mok.a는 ‘놓아주다, 해방하다, …에서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지닌 어근 ‘muc’에서 파생된 명사다. 그런데 『베다』에서 말하는 해탈은 ‘일찍 죽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즉 지상에서 100년까지 사는 것이었다. 『브라흐마나』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저승에서 다시 죽지 않는 것’, 즉 ‘신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제사를 지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빠니샤드』에서는 윤회사상의 출현과 함께 해탈의 의미가 바뀌었다. 해탈이란 ‘윤회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제 해탈을 위한 제사祭祀는 효력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오히려 해탈을 방해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우빠니샤드』에서는 두 종류의 해탈이 나타난다. 브라흐마나 시대의 제사신앙을 바탕으로 한 해탈과 새로운 사상인 까르만과 윤회설이 결합된 해탈이다. 후자의 해탈은 구원을 위한 새로운 경지로서 개체적 영혼인 아뜨만과 우주적 영혼인 브라흐만의 만남 또는 두 실체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것이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이다. 다시 말해서 『우빠니샤드』에서는 아뜨만과 브라흐만이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보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이 불교 성립 이전에 인도의 종교와 철학에 널리 퍼져 있던 윤회사상의 핵심이다. 붓다는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던 이러한 윤회사상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되, 『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윤회의 구성 요소인 아뜨만과 브라흐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까르만도 새롭게 재해석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붓다는 자신의 고유한 사상인 무아설에 위배되지 않는 독자적인 윤회사상을 정립해 나갔던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불교의 윤회사상」에서 윤회의 의미와 삼계·육도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윤회의 주체에 대해서도 검토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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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에서 학사와 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샤카무니 붓다』, 『잡아함경 강의』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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