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동경불교유학생회의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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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 2021 년 10 월 [통권 제102호] / / 작성일21-10-05 10:52 / 조회4,627회 / 댓글0건본문
근대불교잡지 산책 10
『금강저金剛杵』(통권 26호, 1924.5-1943.1)
『금강저金剛杵』는 일본 동경에 유학한 불교유학생의 모임에서 약 20년 동안 꾸준히 회지로 발간한 잡지다. 역사, 사회적으로 오랫동안 숨죽여 있던 불교계를 개혁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전국 사찰에서 선발하여 보낸 유학생들의 국내 교정에 대한 관심사, 학술 탐구의 성과, 문학적 관심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종합 잡지이자, 선발된 유학생으로서 가졌던 사명감과 현실에서 겪는 고군분투가 담겨 있으며, 새로 유학 오거나 졸업하여 귀국한 선후배들의 연보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청년들의 잡지다. 창간호는 등사판으로, 2호-14호까지는 석판으로, 15호부터 26호까지는 활판으로 인쇄하여 출간하였다.(사진 1-1, 1-2)
발행 정보
일본 동경불교유학생회의 출범과 『금강저』의 발행 경과는 박윤진의 「금강저 속간에 제하야」(19호)와 강유문의 「동경조선불교유학생연혁일별」(21호), 김진원의 「금강저 속간에 제하야」(22호) 등을 참고로 재구성할 수 있다.
『금강저』는 1924년 5월 1일 동경에서 창간되었다. 1~14호까지는 현재 전하지 않으며, 부전 잡지의 내용은 21호의 부록으로 실린 목차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1-1. 금강저 표지(15호).
창간호에 동참한 ‘동인同人’으로는 이지영, 김상철, 이덕진, 주영방, 강재원, 이영재, 김태흡, 김정원, 유이청 등이다. 이지영(이용조), 이영재, 김태흡은 이후의 발행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대표적인 유학생들이다. 처음에는 별다른 기금 없이 각자의 ‘주머니 돈’을 모아 간행하였기 때문에 재정적 형편은 매우 열악하였다. 발행을 주도한 유학생들 스스로는 『금강저』를 “무산자無産者의 표본적標本的 잡지, 역경아域境兒의 대표적 잡지, 선천적先天的 빈혈아貧血兒의 잡지”라고 절규했다(박윤진의 글, 19호, p.46)는 것을 보면 경제적인 제약으로 인한 어려움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1-2 금강저 표지(19호, 한용운 표제).
창간의 목적은 ‘혼탁한 세상에서 일체의 사악을 금강저로 물리쳐 없애고 불타의 정법을 옹호하여 널리 확산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세상에 진리와 선을 추구하며 불법의 바른 실현을 거스르는 반동적 행위와 흑막에 가려져 있는 죄상을 폭로하고 격파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었다. 현실적으로 보면 조선불교계에 만연해 있는 여러 반동적인 요소, 예를 들어 부정과 부패, 시대를 거스르는 교계의 여러 제도와 억압들, 여러 인사들의 퇴행적 행태를 여과 없이 비판하겠다는 다짐을 보여주었다.
『금강저』 창간호는 본국의 불교계에 끼친 영향이 매우 컸고 많은 관심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권상로가 발행한 『불교』의 창간호(1924.7)에는 『금강저』의 수준을 보고 자괴감에 『불교』를 무료로 배부한다는 기사가 수록될 정도였다. 유학생들의 자비로 출판하던 『금강저』는 3호부터는 고국의 각 사찰에서 동정금이 쇄도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을 정도로 『금강저』가 국내 불교계에 준 반향은 실로 컸다. 그러나 이후 자금 마련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발행인을 포함한 발행의 주체들은 자금의 모연에 상당한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종 등장하는 발간의 모연을 위한 국내 사찰 답사 기록, 모연금 수집 상황의 기사와 광고 등이 이를 반영한다. 그럼에도 1년에 4호가 발행된 것이 최대치였으며 점차 횟수가 줄어 1년에 1회 혹은 정간한 해도 없지 않았다. 여기에 30년대 후반 전시체제로 진입하고, 내선일체정책을 강화한 일제의 정책과 정치 상황에 따라 유학생의 잡지도 지속적으로 간행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사진2)
국내 교정에 대한 관심과 비판
일본에 유학한 불교 청년들은 학술 연찬 이외에 조선 불교의 발전과 교정의 동향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들이 주로 제기한 조선 불교계의 현실은 교육을 포함한 교정 전반에 걸친 문제, 개별 사찰의 비리, 31본산 대표 임원의 공명하지 않은 행태 등이다. 국내의 불교 대표기관의 회합 소식과 일본 방문단 소식, 31본사 주지들의 행위에 대한 평가 등이 거의 실시간으로 잡지에 전해졌다. 교육, 재정, 사찰 운영 등 매우 현실적인 사안들이 잡지 앞부분의 논설에 제시되어 있고, 짤막한 단신들은 후반부 「업경대」란을 통해 제시되었다. 김태흡 등 유학생 선배로서 국내에서 활동하는 몇몇 인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상당히 격하게 표출되는 경향이 있다.
사진2- 졸업기념 사진(26호).
총 26호가 간행된 『금강저』 중 현전하는 15호~26호를 시기별로 구분하면 총 4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제1기는 1920년대 후반, 제2기는 1930년대 전반, 제3기는 1930년대 후반, 제4기는 1940년대이다. 시기마다 잡지에는 서로 다른 불교계의 현안이 등장한다.(사진3)
제1기에 해당하는 잡지는 20년대 후반에 간행된 15호~17호이다. 15호는 『금강저』의 창간호부터 깊게 관여한 이영재가 스리랑카 유학 중 사망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추도문이 다수 수록된 추도 특집호이다. 16호에는 학인대회 개최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한 두 편의 논설이 있다. 오관수의 「학인대회學人大會를 보고」는 1928년 3월에 청년회 일로 귀국한 필자가 서울 각황사에서 개최된 ‘반만년 이래에 처음 되는’ 조선불교학인대회를 관람하고 그 의의를 소개한 글이다.
17호에는 ‘근近 이천 년 만에 처음’으로 1929년 1월 3일 각황사에서 개최된 조선불교승려대회과 관련한 논설 세 편(금강자의 「승려대회에 대한 각관各觀」, 이용조의 「승려대회를 듯고」, 한양화죽의 「승려대회를 발기한 제형들의게」)이 수록되었다. 이들은 이번 대회가 몇몇 승려 개인의 야비한 명예욕에서 발기되고 별다른 계획 없이 진행된 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홍보, 조직, 예산, 회기 등 체계적인 준비 과정이 필요함을 주창하였다.
이렇듯 『금강저』는 1928~29년에 개최된 조선불교학인대회, 조선불교승려대회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하였으며, 1922년 4월 강제 휴교한 중앙학림의 후신으로 1928년 개교한 중앙불교전수학교의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사진3- 교정 관련 논설(24호, p.4).
제2기 즉 1930년대 초반에 간행된 19호~21호는 발행 기관이 기존의 재일본조선불교청년회에서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동경동맹으로 바뀌었다. 19호에는 국내 불교계의 교정통일운동에 대한 언급과 주지 역할론에 대한 두 편의 논설(「교정통일운동의 전망」, 「주지론」)이 게재되었고, 20호에는 조선불교도의 실천 운동을 제창하는 논설이, 21호에는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이사회에서 중앙불교전문학교 폐교를 결의한 것에 대한 반대의 성명서가 게재되었다.
30년대 초의 『금강저』에는 청년운동의 파생으로 불교계에서 구성한 불교청년총동맹의 활동과 종헌운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실시간적으로 담겨 있다.
제3기에 해당하는 30년대 후반에는 다시 불청운동의 기운이 잠잠해지는 가운데 발행 기관이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동경동맹에서 조선불교동경유학생회로 다시 바뀌었다. 이 시기에는 귀국한 유학생이 많아지면서 선배 유학생의 행태에 대한 비판도 수위가 높다. 22호 「업경대」란에는 심전개발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유학생 선배 김태흡을 비판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고, 23호에는 ‘괴지怪誌 『불교시보』’의 기사와 그 발행인인 김태흡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24호에는 중앙포교소가 그곳의 포교사인 김태흡의 개인 소굴로 변했다는 비판을 하면서 『금강저』 창간 시에 “강호 이역에서 냉수의 신자맹信字盟을 하던 당시를 회고하여 자중자애”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상은 이 시기 『불교시보』를 발행하며 일제의 정책에 부합하는 차원에서 심전개발운동을 전개한 김태흡에 대한 청년들의 목소리를 이국에서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국내 불교 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수위의 비판이다.
제4기 즉 1940년대에 간행된 24~25호에는 31본산 주지회의 기사에 대한 논평, 총본사 인가에 대한 보고 등 교정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보여주다가, 종간호인 26호(1943.1)는 내선일체운동, 창씨 개명, 조선어 사용금지 정책 등으로 잡지의 표기가 완전히 일본어로 바뀌었고 친일적 논설도 게재되었다.
동경불교유학생들이 학술 연찬 이외에 국내 불교계의 움직임과 교정의 발전 방안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높인 이유는, 대부분의 유학생이 귀국하면 바로 자신들의 출신 사찰로 돌아가야 했던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 주지에 대한 반감과 비판은 이들 유학생의 미래와 직결된 문제로서 매우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유학 시절 개혁의 목소리를 목청 높여 외치던 선배들이 귀국하여 본사로 돌아가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현실에 대한 고민과 불만도 없지 않았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젊은 유학생 승려들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술 논문 성과
『금강저』에는 일본 유학생이 입국하여 귀국하는 모든 경과가 일지처럼 기록되어 있다. 유학생들의 자체 학술발표회도 마찬가지여서, 「우리 뉴-스」란에는 유학생들의 학부와 졸업논문 제목이 소개되어 있으며, 일부 유학생의 졸업논문이 본문에 게재된 경우도 많다.
『금강저』에 수록된 학술 논문을 앞서 구분한 4기로 나누어 제시하면 일정한 경향성이 도출된다.
제1기, 즉 1920년대 후반에 간행된 15~17호에는 석존과 불타의 본질론, 자연과학 및 사회주의와 종교의 관계를 고찰한 논설이 주목된다. 현해탄을 건너와 새롭게 얻은 불교 교리와 교주에 대한 지식에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가미한 글이 많고, 당대의 시대사조인 사회주의, 자연과학의 지식을 종교와 접맥시킨 논의도 있다. 이외에 최범술의 「불타의 계에 대하여」는 계의 우리말 표현(갈음ㅅ결)을 제언한 언어학적 논설이다.
사진4- 박한영의 서신(20호, p.34).
제2기, 즉 1930년대 초에 간행된 19~21호에는 소속 대학의 졸업 논문으로 제출된 논문이나 학술적으로 비중 있는 논설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는 중앙불전을 졸업한 유학생이 일본의 대학에서 수학하여 논문을 제출하기 시작한 시기에 해당한다.
19호에는 허영호의 「상좌대중 이부의 분열에 대하야」, 최범술의 「화엄교학육상원융론에 대하야」가 수록되었다. 20호는 허영호의 「고구려의 원음 추정에 대하여」, 강유문의 「대위국묘청론」, 장도환의 「정업원과 부인운동과의 역사적 의의」, 박윤진의 「인도 아육왕과 조선 세조대왕에 대하야」 등 불교사 논문이 수록되었다. 학술 논문은 아니지만 박한영의 「연담과 인악의 관계」는 “교정 박한영 노사가 서신으로 강유문 군을 통해서 대정대학大正大學 석정石井 교수에게 공답供答한 것인데, 불교학도에 참고가 되겠기로 본지에 게재한다”는 설명을 부기하였다. 조선 후기부터 이어진 사기私記의 전통을 영호남의 계통으로 살펴본 간명한 해설인데, 사기의 존재에 대해서 이 정도의 통찰력을 가지고 설명한 논설은 지금까지 불교잡지에 등장하지 않은 것이다. (사진4) 21호에는 박윤진의 「뫼 어원의 연구」, 박성희 「운동이 각 기관에 밋치는 영향」이 수록되었다.
사진5- 조명기의 학술논문(22호, p.18).
제3기, 즉 1930년대 말에 간행된 22~23호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 사상가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적 접근이 주목된다. 조명기의 원효 십문화쟁론 연구(22호), 석천륜(차상윤)의 사명당과 일본 선사의 교류 연구(22호), 오송제의 송대 천태종과 고려 체관의 고찰(23호), 문록선의 고려 균여 저술의 분석(23호)이 주목된다. 이외에 서양철학에 대한 두 편의 논문(23호, 김삼도의 소크라테스 소개, W.Y.C의 베르그송 소개)이 있다.(사진5)
제4기, 즉 1940년대에 간행된 24~26호에도 학술적으로 비중 있는 논문이 소개되었다. 불교사 분야에는 김덕수의 고려 체관 천태학 고찰(24호), 정두석의 한일불교 관련 논문(25호), 홍영진의 신라 선종사 고찰(26호)이 주목된다. 종교학 분야에는 종교심리학, 종교사회학으로 관심이 확장되었고, 기타 중국의 양명학, 『주역』, 게르만 민족의 고대 종교 등 관심이 다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학술 논문은 국내의 중앙불전 졸업생의 논문과 함께 근대 불교학의 방향과 내용을 구성하는 주요 인자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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