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불교사학자·문헌학자 대각국사 의천義天과 고려대장경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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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1 년 10 월 [통권 제102호] / / 작성일21-10-05 11:52 / 조회4,666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10 / 오야 도쿠조大屋德城 1882-1950
오야 도쿠조(大屋德城, 1882-1950)는 불교사학자이자 문헌학자로서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교장敎藏 편찬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고려속장조조고高麗續藏雕造攷』(1937)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고려의 불서 집성과 간행, 동아시아 차원의 불교 전적 유통과 그 영향을 고찰한 기념비적 저작이다. 오야는 일찍부터 해인사에 있는 고려대장경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고려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의 저본과 계통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선도적 연구를 시도했다. 무엇보다 의천의 교장 간행을 송과 요, 고려, 일본 등 당시 동아시아 불교문화권의 수많은 전적과 사료를 활용해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고려 불교의 높은 수준과 문화적 위상을 학술적으로 규명한 탁월한 업적을 냈다.
그는 1882년 7월 일본 후쿠오카현 미즈마군(현재 야나가와시)의 한 사찰에서 태어난, 정토진종 오타니파에 속하는 승려 출신 학자이다. 1906년 와세다대학 문학과 철학 전공으로 학부를 졸업한 후 『망월불교대사전』 편집에 참여했는데, 이 사전은 지금까지도 그 방대함과 엄밀성으로 유명하다. 또한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저명한 인도학자였던 막스 뮐러에게 불교학과 산스크리트를 배워 온 난조 분유(南条文雄)가 주도한『대일본불교전서』의 편찬에서도 역할을 담당했다. 이뿐 아니라 『불교대연표』, 『불가인명사서』의 제작에 관여하기도 했다.
사진 2. 고산지본 영인 신편제종교장총록.
1911년에는 정토진종의 종립대학인 오타니대학의 도서관장에 취임했고, 1913년부터는 도다이지(東大寺) 화엄종 권학원 강사, 호류지(法隆寺) 편찬 촉탁 등을 맡았다. 1918년 4월에는 임제종대학(현재 하나조노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22년 3월부터 약 두 달간 조선의 고도와 사적을 탐방하고 의천 관련 자료를 조사하는 한편 고려대장경 일부를 인출했다. 다음 해의 중국 방문 때도 3월 23일에 조선으로 와서 경성과 평양을 거쳐 4월 4일에 북경으로 갔다. 이후 5월 16일까지 한 달 반 동안 석굴 사원으로 유명한 운강과 용문 등을 답사하고 소주와 항주 일대까지 둘러보았다. 그 결과물로 나온 것이 『조선지나순례행』」(1930)이라는 책자이다. 1924년에는 천태종 히에이잔(比叡山) 전수원의 강사를 했고, 1931년 5월부터 1943년까지 오타니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연구 업적을 살펴보면, 1934년에 중국 및 한국 불서의 사본 등을 다수 보유한 가나자와(金澤)문고의 자료를 조사했고, 교장과 관련하여 고산지(高山寺)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영인했는데 17세기 일본의 사본 및 간본을 부록에 함께 넣어 자료적 가치를 높였다. 69세의 나이가 된 1947년에는 『고려속장조조고』의 연구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도쿄대학에서 문학박사를 받았다. 이 책은 의천의 교장에 대한 본격적인 첫 연구서로서, 의천의 입송과 전적 수집, 목록 편성과 불서의 판각 및 유통, 그리고 의천의 사상과 신앙, 『원종문류』와 『석원사림』의 편찬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었다. 그런데 오야의 원래 전공은 일본불교사 및 불교문헌학이었고 특히 일본 고대불교의 체계가 잡히던 나라시대 불교에 대한 성과를 많이 냈다. 주요 저서로는 『일본불교사 연구』 3권, 『불교사의 제문제』,『불교 고판경의 연구』 등이 있다. 1908년 이후 15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고 저서도 34종이나 되는데 『저작선집』 10권으로 묶였다.
오야는 1922년 3월 19일부터 5월 13일까지 조선에 와서 문헌 조사와 유적 답사를 수행했다. 그의 체류 목적은 일본 나라조의 근원을 찾기 위해 한반도 고대 왕조의 수도를 둘러보고, 교장 연구를 위해 의천 관련 사료를 수집하는 한편 해인사 경판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부여, 평양, 경주, 개성 등 삼국과 고려의 고도를 탐방했고, 각종 자료를 수소문하고 학자들의 자문을 얻었으며 고려대장경이 있는 해인사에 가서 주요 경판을 종이에 찍기도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전 원종 종무원장이었던 해인사 주지 이회광을 만나 허락을 얻고 총독부에 해인사장판 인출 허가를 신청했다. 『조선해인사경판고』(1930)에 의하면 당시 오야는 4월 27일부터 5월 1일까지 대장경 보유판과 사간판으로 전해져 온『구사론송소초』, 『사분률상집기』, 『대각국사문집』 등 쉽게 구하기 어려운 중요 문헌을 구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여러 곳을 다니고 또 많은 자료를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은 총독부 당국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학무국 고적과장이자 뒤에 경성제대 교수가 된 조선사 연구자 오다 쇼고(小田省吾)의 주선으로 총독부 박물관의 실무 협력을 얻어서 대각국사 묘지명을 탁본했고, 총독부 참사관 분실에서 규장각 장서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여기서 1915년 데라우치 총독이 다이쇼 천황에게 진상하기 위해 3부를 찍은<고려대장경>인출본, 해인사 사간판본을 열람하고 기초 조사를 한 후 해인사에 가서 주요 경론을 인출한 것이다. 그는 이 밖에도 이왕가박물관을 비롯해 각종 고서의 소장 기관과 소장자를 찾아서 불서를 조사하고 열람했다.
오야는 이름난 조선인 학자들과도 만나 자문을 구하고 책을 얻어 보았다. 1922년 3월 29일에는 경성에서 최남선과 이능화를 만나 조선의 불서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얻었고, 최남선의 자택에서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등을 직접 보기도 했다. 1937년 봄에도 조선에 들러 최남선이 소장한 『백운화상어록』을 접했고, 국문학자 이병기의 집에서 고려판 『천태사교의』 1첩을 열람하여 『고려속장조조고』에 내용 일부를 수록했다. 당시 오야는 오타니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연보에는 이때 경성제대에서 강사를 한 것으로 나온다. 아마도 조사와 연구를 위해 경성에 짧은 기간 머물면서 틈을 내 강의를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그는 장서가로 유명한 오세창, 유경종 등도 만났고,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도서관에서 불서를 조사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에 있던 일본인 학자들과도 교류하며 친분을 쌓았다. 1935년에는 에다 도시오(江田俊雄)와 송광사에 가서 불교 전적을 조사했고, 한국 고대사를 전공한 경성제대 교수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 조선사편찬위원회의 간사이자 조선사 편수관을 지내고 뒤에 만주 건국대학 교수가 된 이나바 이와사치(稻葉岩吉) 등을 만나 귀중본 희귀 서적에 대한 정보를 교류했다. 당시 에다와 스에마츠는 한국 무속 연구자인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 고마자와대학 교수를 하다가 경성제대 교수가 된 불교학자 사토 다이슌(佐藤泰舜) 등과 함께 경성제대 종교학연구실 중심으로 조선불교사학회를 꾸리고 있었다.
한국 불교와 관련이 있는 오야 도쿠조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면, 먼저 고산지본을 영인한 『신편제종교장총록』(1936), 그리고 다음 해에 나온 연구서 『고려속장조조고』를 들 수 있다. 교장은 의천이 동아시아 찬술 불교 주석서를 집성하여 간행한 것으로 『신편제종교장총록』은 교장의 목록집이라 할 수 있다. 오야는 교토 북서쪽 산속에 자리 잡은 고산지에 소장된 현존 최고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영인하고 처음으로 본격적 연구를 수행했는데, 송과 요, 고려와 일본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세계의 불교 주석서 유통 양상과 교장의 현존 여부 등 선구적인 성과를 낸 것으로 평가된다.
11세기 후반에 활동한 의천은 송에서 동아시아 찬술 논소 3천여 권을 수집해 왔고 요의 주석서와 고려에 현존하던 장소들을 모아 교장을 간행했다. 교장은 경·율·논 삼장으로 이루어진 대장경과는 달리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주석서만 따로 모은 것으로 어찌 보면 대장경 해설서의 성격을 갖는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역대 논소만을 집성하여 간행한 것은 의천이 처음이었고, 이는 고려 불교의 교학 이해 수준이 상당했음을 잘 보여준다. 의천은 개경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대규모 간행사업을 벌였는데, 유식학 분야의 책들이 많아서 법상종 승려들도 작업에 참여했다. 이때 만들어진 교장의 목록집인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에는 모두 1,010종 4,850여 권의 서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애용되고 있던 불교 장소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오야는 교장 연구에 앞서 해인사 고려대장경 보유판을 비롯한 사간판에 대해 조사하고 서지학적 검토를 했다. 해인사의 보유판과 사간판에는 선종 전등사서인 『조당집』처럼 세계 유일본도 들어 있다. 그는 고려대장경의 명칭, 조조 횟수, 구조본과 신조본의 차이, 대장경의 계통 분석 등을 검토했고, 또 의천의 사상과 신앙, 선종에 대한 인식 등을 다룬 논고도 썼는데 이를 통해 그가 고려 불교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볼 수 있다. 오야가 교장을 비롯한 고려시대 간행 불서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일본의 경론 간행을 연구하면서 속장(교장)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장경을 거쳐 의천의 교장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했는데, 교장을 대장경의 뒤를 이었다는 뜻의 속장이라고 칭했고, 의천의 속장 간행 사업을 동아시아 불교 사상의 위업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처럼 의천이 대대적으로 간행한 교장의 불교문헌학 및 불교사적 가치와 의의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드러낸 것은 오야 도쿠조의 학문적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고려 불교의 위상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고, 이후 한국 불교 연구의 초석을 닦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만 그 또한 한국 불교에 대한 타율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일본 불교 우위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등 식민지라는 시대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또한 문헌학을 넘어 고려 및 한국 불교사에 대한 거시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단편적 사료만을 이용해 고려 불교를 표피적으로 이해한 점도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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