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불교]
인연으로 나타나고 마음으로 그린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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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 2021 년 10 월 [통권 제102호] / / 작성일21-10-05 11:29 / 조회4,998회 / 댓글0건본문
과학과 불교 16 / 빛이나 전자는 파동인가? 입자인가
현대물리학의 등장
뉴턴역학이 물리 세계를 놀랍도록 완벽하게 기술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의 물리 이론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뉴턴역학에 의해 물리학의 궁극적 이론 체계가 완성됐다고 본 것이다. 당시의 이런 믿음은 이백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측정 기술이 발전하면서 측정 영역이 확대됐고, 이에 따라 뉴턴역학이 기술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뉴턴역학의 한계를 극복한 건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었다. 양자역학은 빛이나 원자, 원자를 구성하는 입자 등 미시(microscopic)세계의 물리적 성질을 기술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은 속도가 빠르거나 중력의 영향이 강한 대상을 다룬다. 20세기 초에 등장한 이 두 이론은 고전물리학이 풀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하면서 현대물리학의 시대를 열었다. 여기서는 양자역학을 살펴보겠다.
양자역학과 양자
양자역학은 미시세계에서의 동역학(dynamics)을 다루는 물리학의 기본 이론이며, 지금까지 인류가 알아낸 가장 정확한 과학이론이라고 알려져 있다. 양자역학은 입자 물리, 원자 물리, 고체 물리, 양자장(quantum field) 이론, 양자화학 등 거의 모든 물리학 분야의 기초가 된다. 최근에 관심을 끌고 있는 양자컴퓨터의 작동 원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필자의 연구 분야인 양자암호(quantum cryptography)와 양자통신을 아우르는 양자정보(quantum information)이론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먼저 양자量子(quantum)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양자란 상호작용을 하는 물리량을 의미한다. 우리말로는 ‘덩어리’ 혹은 ‘알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 양성자, 중성자, 소립자, 이들로 구성된 원자, 빛 알갱이인 광자光子(photon) 등이 모두 양자다. 우주가 이런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설에서 양자역학은 출발한다. 양자가 얼마나 미세한 것인지를 원자와 광자를 통해 알아보자.
탄소 2kg엔 10조 곱하기 10조 개의 탄소 원자가 들어 있다. 원자가 이렇게 작으므로 우리 감각기관을 통해 원자를 보거나 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30와트의 전구가 붉은빛을 발산한다면 1초 동안에 100억 곱하기 100억 개의 광자가 방출된다. 100억 곱하기 100억 원을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나눠 준다면 일인당 백억 원을 갖게 된다. 1초 동안 30와트의 전구 하나에서 방출되는 광자가 그렇게 많다. 광자 하나의 에너지가 그만큼 작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빛을 알갱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측정 행위가 대상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양자가 이렇게 작으므로, 양자의 세계에선 거시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기묘한 현상이 일어난다. 이는 모두 측정과 관련돼 있다. 거시세계의 측정에서는 측정 대상의 상태가 측정 때문에 달라져서는 안 된다. 이는 측정이 갖춰야 하는 기본 요건이다. 대상의 상태를 알려는 것이 측정인데, 측정으로 대상의 상태가 달라진다면 측정하는 의미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은행 잔고를 확인한다고 하자. 수수료를 받지 않는다면, 잔고를 확인한다는 사실 때문에 잔고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 수수료를 받더라도 수수료를 차감한 잔고가 얼마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잔고를 확인하는 의의가 있다. 그런데 이게 양자의 세계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인가? 측정 대상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전자와 컵의 위치를 측정하는 두 상황을 상상해 보자. 거시세계에서는 컵에서 반사된 빛을 보고 컵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경우, 컵을 본다고 해서 컵의 위치가 달라지지 않는다. 컵은 아주 작은 광자와의 충돌로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거시세계에서는 측정을 잘 하기만 하면, 측정 대상의 물리량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전자의 위치를 알기 위해 빛을 쪼인다면 상황이 전적으로 달라진다. 전자는 아주 가벼워서 광자와 충돌하고도 그 위치가 변한다. 전자의 위치를 알려고 빛을 쪼였는데, 바로 그 행위 때문에 전자는 다른 위치로 움직인다. 측정 행위가 대상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측정 행위가 측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자구름과 양자암호
태양 주위를 행성이 공전하고, 원자핵 주위를 전자가 돈다. 얼핏 보면 이 둘은 아주 비슷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행성과 달리 전자는 위치를 측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둘의 궤도는 전혀 다르다. 왜 그런가? 수만 년 후에 행성의 위치가 어딘지를 아는 것은 아주 큰 태양계 안에서도 언제나 가능하다. 지금까지의 관측 자료만 있으면 된다. 이와 달리 전자는 아주 작은 원자 안에 있지만,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위치를 측정하는 행위 자체가 위치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위치를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불확정성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양자역학은 측정 대상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을 포기한다. 전자의 위치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전자구름(electron cloud)처럼 확률 분포로만 표시된다.
측정 행위가 대상의 상태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양자암호가 그렇다. 두 사람이 양자통신을 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주고받는 양자를 가로채서 통신 내용을 도청하려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측정에 필요한 정보를 완벽하게 알지 못하면, 양자를 가로채더라도 측정으로 정보를 알아낼 수가 없다. 더구나 측정을 시도하면 양자 상태가 달라지므로, 도청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이 흔적을 감지하여 도청된다는 사실을 실시간적으로 알 수 있으므로, 완벽하게 안전한 양자암호통신이 가능해진다.
이중성
측정과 관련되는 문제로,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duality)을 살펴보자. 빛은 간섭과 회절을 하므로, 전통적으로 파동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흑체복사, 광전효과, 컴프턴 효과처럼 빛을 입자라고 해야만 설명되는 현상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러므로 양자역학은 빛을 입자라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이전에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는 특정한 상황에서는 회절 무늬를 나타내면서 파동처럼 행동한다. 그러면 빛이나 전자는 파동인가 아니면 입자인가?
고전물리학에서 입자인 전자는 파동일 수 없고, 파동인 빛은 입자일 수 없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입자와 파동은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입자라고 여겨졌던 전자가 파동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파동으로 여겨졌던 빛이 입자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어떤 상황 혹은 어떤 맥락에서 측정하느냐에 따라 때로는 입자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때로는 파동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이를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wave-particle duality)이라고 한다.
상식의 세계와 양자의 세계
광전효과란 빛을 쪼이면 전류가 흐르는 현상이다. 원자에 갇혀 있던 전자가 빛 에너지를 받아서 원자를 탈출하고, 이 자유전자가 움직이면서 전류가 나타난다. 만약 빛이 파동이라면, 아주 오랫동안 빛 에너지를 모아야 전자가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빛을 쬐고 10억 분의 1초가 지나기 전에 전자가 튀어나온다. 빛 에너지가 파동처럼 공간에 퍼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입자처럼 한 점에 모여 있다가 고스란히 전자에 전달된다는 것이다.
광전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 순간 빛이 입자처럼 행동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빛은 그보다 아주 조금 전엔 파동처럼 행동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 입자로 행동한다고 해서 그 빛이 입자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입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순간 입자처럼 행동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상식적 세계관을 벗어난다.
상식적 세계관은 잔고 확인과 같다. 백만 원의 잔고를 확인한다는 것은 확인 전에 백만 원이 계좌에 있었다는 것이다. 잔고 확인도 일종의 측정이다. 이처럼 거시세계에서 측정은 측정 이전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이 명백한 일이 양자역학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입자로 측정되더라도 조금 전에도 입자라고 할 수는 없다. 측정하기 전에 입자여서 입자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자이기 때문에 입자처럼 행동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그 맥락에서 입자로 행동했을 뿐이다. 파동이기 때문에 파동처럼 행동한 것이 아니다. 단지 어떤 맥락에서 파동으로 행동했을 뿐이다.
인연으로 나타나고 마음으로 그린 세계
이게 미시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인가? 아니다. 사실은 거시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효과가 작아서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무시하거나 지나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이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만들어 낸 개념 체계를 동원하여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서울은 인천에서 보면 동쪽에 있고 속초에서 보면 서쪽에 있다. 어디에서 보는 지가 관건일 뿐, 서울은 동쪽도 아니고 서쪽도 아니다. 서울은 동쪽이나 서쪽이었던 적이 없다. 빛은 입자였던 적도 없고 파동이었던 적도 없다. 다만, 나에게 입자나 파동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입자나 파동이라는 것은 물리학이 만들어 낸, 궁극적으로는 우리 마음이 지어낸 개념이다. 그 개념을 빛과 전자에 뒤집어씌운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지만, 입자와 파동이라는 개념으로는 양자 한 알도 잡아낼 수 없다. 박남수의 <새>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 보자.
(····)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총으로 새를 잡을 수 있겠는가?
도봉산을 서울에서 보면 남도봉이 보이고 의정부에서 보면 북도봉이 보인다. 남도봉과 북도봉만 있는 게 아니라, 인연 따라 무수한 도봉이 나타난다. 도봉은 남도봉도 아니고 북도봉이 아니어서, 우리는 한 번도 도봉을 잡아 본 적이 없다. 남도봉과 북도봉이 나타날 뿐이다.
인연으로 나타나고 마음으로 그려, 남도봉이라 하고 북도봉이라 한다. 동풍이 불면 동파랑이 일고 서풍이 불면 서파랑이 인다.
이경미 작.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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