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 이야기]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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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1 년 10 월 [통권 제102호] / / 작성일21-10-05 13:52 / 조회9,488회 / 댓글0건본문
중국선 이야기 10 / 육조혜능六朝慧能의 선사상 ①
당조唐朝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문명을 구가하였지만, 안사安史의 난(755-763)으로부터 점차 쇠락해져 갔다. 사마광司馬光이 찬술한 『자치통감資治通鉴』에 “안사의 난을 겪은 몇 년 동안 천하의 호구戶口가 10에 8, 9가 사라지고, 많은 주현州縣들이 번진藩鎭에 점거당하여 공부貢賦가 들어오지 않아 조정朝廷의 부고府庫가 고갈되었다. 중국에 어려운 일이 많은 까닭에 야만족들이 매년 변경邊境을 침범하였다.”(주1)라고 기술하는 바와 같이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의 양경을 중심으로 한 지역들이 거의 초토화되어 인구의 70%가 감소하였고, 나아가 더욱이 황권이 약화되면서 번진의 최고 권력자인 절도사가 세금의 상공上供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어 당조는 점차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황권과 지식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상을 희구하게 하였다. 이와 관련된 논술은 짧은 지면에 가능하지 않지만, 유학에서는 ‘고문古文운동’을 비롯하여 ‘유불儒佛 융합’의 사조思潮가 발생하였으며, 불교에서도 ‘제종諸宗 융합’, 유불도의 ‘삼교합일三敎合一’ 등의 흐름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육조혜능 대사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하택신회荷澤神會의 공로에 의하여 중국 불교는 육조혜능을 중심으로 하는 남종선南宗禪이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실상 도신道信-홍인弘忍의 동산법문은 앞에서 고찰한 신수의 북종으로부터 제도불교의 주류를 차지하였고, 또한 파촉巴蜀의 성도成都 지역에서는 지선 계열로부터 무상의 정중종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불교에서 상당한 교세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회의 입적 이후에 황권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혜능이 ‘육조’로서 승인되고, 남종선이 정종正宗으로 인정받은 후에는 완벽하게 불교의 주류로 자리매김하였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종전宗典을 필요로 할 것이고, 그 종전의 내용은 기존의 불교, 혹은 선법禪法과는 차별된 사상이 담겨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출현한 것이 바로 『육조단경』이라고 하겠다. 사실상 『육조단경』의 제목에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육조’는 바로 혜능이 중국선의 정종임을 알려주는 것이고, ‘단壇’은 ‘계단戒壇’을 의미하며, 또한 ‘경經’은 ‘부처님의 말씀[佛語]’을 의미한다. 따라서 『육조단경』의 제목으로부터 의미를 확장시키면, 인도로부터 발생하여 전래된 불교가 드디어 중국인으로서의 ‘불佛’이 나타나 계戒를 수여하며, 새로운 교의敎義 체계로써 민중을 제도한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경』의 제목에서 ‘경’으로부터 본다면 반드시 새로운 교의 체계가 존재할 것이고, ‘단’으로부터는 새로운 ‘계’가 설해질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혜능의 제자인 남양혜충南陽慧忠(?-775)이 “저 『단경』을 개환改換하여 비천한 논리를 더하여 섞어서 성의聖意를 깎아 버리고 후학들을 미혹하여 어지럽게 하니, 어찌 언교言敎를 이루었다고 하겠는가! 괴롭다! 나의 종宗이 손상되었도다.”(주2)라고 한탄하는 것으로 보아 혜충의 시대에 이미 『단경』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 사상에 대한 개환도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사실상 현존하는 『단경』은 20여 종의 판본이 존재하고, 그와 관련된 연구는 이미 상당히 상세하게 진행되어 있다. 이와 관련한 언급은 생략하겠지만, 현존 판본 가운데 돈황본 『단경』이 최고본이고, 종보본宗寶本이 최후의 판본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돈황본도 학자에 따라서는 당말唐末 혹은 오대五代 시기의 필사본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명확하게 혜능조사의 온전한 법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현재 『단경』의 최고본과 최후의 판본을 통해 그 사상을 파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에 따라 돈황본과 종보본을 통해서 『단경』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돈황본의 온전한 제목은 『남종돈교최상대승마하반야바라밀경육조혜능대사어소주대범사시법단경南宗頓敎最上大乘摩訶般若波羅蜜經六祖惠能大師於韶州大梵寺施法壇經』이다. 이를 분석하자면, ‘남종’은 ‘돈교’이며, ‘대승’ 가운데 ‘최상’의 경전은 바로 ‘마하반야바라밀경’이고, 그를 ‘육조혜능 대사’가 ‘소주 대범사’에서 ‘법’과 ‘단’을 베푼 ‘경전’이라는 의미이다. 간략히 말한다면, ‘반야경’을 대범사에서 강의하고, 계단을 시설하여 계를 수여한 ‘경전’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단경』에서 논하는 사상은 바로 반야경, 엄밀하게 논하자면 『금강경』에 입각하여 법을 시설하고, 그러한 사상에 입각한 계, 즉 ‘무상계無相戒’를 수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 불교의 사상적 전개는 반야법을 통하여 불성론佛性論을 전개하는 특성을 가진다. 다시 말하여 ‘불성’과 ‘반야’는 바로 중국 불교뿐만 아니라 중국선을 모두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두 축이다. 또한 중국 불교의 흐름은 사상적으로 천태종天台宗과 화엄종華嚴宗, 선종禪宗이 대표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종파들의 명확한 사상적 차별은 바로 ‘불성’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천태종에서는 ‘성구론性具論’, 화엄종에서는 ‘성기론性起論’, 선종에서는 ‘명심견성明心見性’ 혹은 ‘돈오견성頓悟見性’으로 ‘불성’에 대한 이해를 나눌 수 있다. 그 가운데 선종에서는 바로 『단경』으로부터 ‘돈오견성’의 기치가 세워졌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까닭에 『단경』을 선종 성립의 표지라고 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단경』의 사상을 논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불성’에 대한 이해를 출발로 해야 할 것이다. 『단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불성’을 언급하고 있다.
경전에서 다만 스스로 부처에 귀의함을 말하고, 남의 부처에 귀의함을 말하지 않았다. ‘자성’에 귀의하지 않으면 귀의할 바가 없다.(주3)
부처[佛]는 자성自性이니, 결코 자신自身의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성’에 어리석으면 부처도 바로 중생이요, ‘자성’을 깨달으면 중생이 바로 부처이다.(주4)
여기에서 명확하게 ‘불佛’을 ‘자성’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중국 반야학을 통관해야 명확하게 납득할 수 있는 과정이 숨어 있다. 본래 ‘반야’란 우리가 인식하는 제법에 스스로의 존재성이 없음을 명확하게 앎이지만, 점차 반야의 지혜를 통하여 ‘자성’을 찾으라는 논리로 전환된다. 이는 마치 ‘무아無我’를 설하면서 참다운 ‘진아眞我’를 찾으라는 논리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실제로 중국선에서 이러한 과정은 바로 하택신회의 어록에서 상세히 엿볼 수 있다.(주5) 신회는 ‘자성’을 지극히 강조하였으며, 나아가 그러한 ‘자불성自佛性’에 대하여 ‘견見’할 것을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다.(주6)
이와 같이 『단경』에서는 ‘불’을 ‘자성’으로 규정하고서 또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자심自心’이 중생임을 알고 ‘자심’이 ‘불성佛性’임을 보아라.(주7)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자심’이 중생임을 알아서 ‘자심’으로부터 불성을 보도록 가르친다.(주8)
너희들은 마땅히 불지견佛知見이란 다만 너희의 ‘자심’으로 그 밖에 다시 다른 부처는 없다는 것을 믿어라. …… 나 또한 모든 사람에게 권하기를, ‘자심’에서 항상 불지견佛知見을 열라고 한다.(주9)
여기에서는 ‘불성’을 다시 ‘자심自心’으로 귀결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불지견’ 역시 ‘자심’에서 현현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단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세상 사람들의 성품[世人性]’은 본래 스스로 청정한 것으로 만법이 ‘자성’에 있다.(주10)
‘세상 사람들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청정한 것으로 만법은 ‘자성’을 따라 생한다.(주11)
이로부터 자신의 영역으로부터 우리가 늘 접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의 ‘성품’으로 ‘자성’을 확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용문의 문장으로만 본다면 ‘자성’으로부터 만법이 현현한 것이므로 세상 사람들의 성품이 청정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여기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단경』은 유가儒家, 보다 구체적으로 논하자면 『맹자孟子』의 이론을 차용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맹자는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자신’을 반성해 보아 성실하면 즐거움이 더없이 크고, 힘써 너그럽게 행하면 인仁을 구하는 길이 더없이 가깝다.”(주12)라고 하여 이른바 ‘만물비아萬物備我’의 입장을 보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에 비추어 반성한다면, 즉 ‘반구저기反求諸己’한다면(주13) ‘성현聖賢’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틀은 형식적으로는 제법의 담지체擔持體로서의 ‘자성’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사상이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가의 이론을 차용함으로써 ‘불성’의 ‘인성화’를 도모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로부터 기존의 불교나 선에서는 ‘불성’을 ‘인성’을 초월한 보다 상위 개념으로 논해 왔다면, 『단경』에서는 우리가 늘 접하는 세상 사람들의 성품의 시야로부터 ‘불성’으로서 ‘자성’을 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불성’이 설정되어야 지금 이 자리가 바로 진리가 현현하고 있다는 ‘당하즉시當下卽是’와 ‘본래현성本來現成’이 가능할 수 있는 측면도 존재한다. 『단경』에서는 이와 같이 ‘불성佛性’을 ‘자성自性’, ‘자심自心’, ‘세인성世人性’으로 확대시키면서 그에 대한 깨달음, 즉 ‘돈오(頓悟)’를 명확하게 제창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이어 『단경』의 ‘돈오’를 고찰하고자 한다.
주)
(주1. [北宋]司馬光, 『資治通鑑』 卷226, 「唐紀四二」 “安史之亂, 數年間, 天下戶口什亡八九, 州縣多爲籓鎮所據, 貢賦不入, 朝廷府庫耗竭. 中國多故, 戎狄每歲犯邊.”
(주2. [宋]道原纂, 『景德傳燈錄』 卷28(大正藏51, 437c-438a), “把他壇經改換, 添糅鄙潭, 譚削除聖意, 惑亂後徒, 豈成言敎! 苦哉! 吾宗喪矣.”
(주3.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9c), “經中只言自歸依佛, 不言歸依他佛. 自性不歸, 無所依處.”
(주4. 앞의 책(大正藏48, 341c), “佛是自性, 莫向身外求. 自性迷, 佛即是衆生; 自性悟, 衆生即是佛.”
(주5. 『南陽和尙問答難徵義』(石井本), 楊曾文, 『神會和尙禪話語錄』(中華書局, 1996.), p.69. “지금 비춘다[照]는 것은 거울이 맑기 때문에 ‘자성自性’의 비춤이 있는 것이다. 만약 중생의 마음이 깨끗하여 자연自然히 대지혜의 광명이 있으면, 세계를 남김없이 비출 것이다.[今言照者, 以鏡明故, 有自性照. 若以衆生心淨, 自然有大智慧光, 照無餘世界.]”, 앞의 책, p.99. “다만 본래의 ‘자성自性’이 공정함을 깨닫는다면, 다시 관觀이 일어나지 않으니 바로 종통宗通이다.[但了本自性空寂, 更不復起觀, 卽是宗通.]”, 앞의 책, p.81. “무념無念을 보는 것은 ‘자성自性’을 깨닫는 것이다. ‘자성自性’을 깨닫는 것은 얻는 바가 없음[無所得]이다.[見無念者, 謂了自性. 了自性者, 謂無所得。以其無所得, 卽如來禪.]”
(주6. 『南陽和上頓敎解脫禪門直了性壇語』, 앞의 책, p.7. “지식들아, 자신 가운데 불성이 있는데[自身中有佛性], 요연하게 볼 수 없으니 어떤 연유인가? 비유컨대 이곳에 각각의 집을 생각하여 주택, 의복, 침구 및 일체의 물건들이 갖추어 있음을 알고 더욱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지知’라고 하고, ‘견見’이라고 하지 않는다. 만약 행하여 집에 이르러 위에서 말한 물건들을 본다면, 즉 ‘견見’이라고 하지 ‘지知’라고 하지 않는다. 이제 깨달으려는 자들이 다른 말에 의지하여 자신[身] 가운데 불성이 있는 것을 안다면 요연了然하게 볼 수 없는 것이다.[知識, 自身中有佛性, 未能了了見. 何以故? 喩如此處, 各各思量家中住宅、衣服、臥具及一切等物, 具知有, 更不生疑. 此名爲知, 不名爲見. 若行到宅中, 見如上所說之物, 卽名爲見, 不名爲知. 今所覺者, 具依他說, 知身中有佛性, 未能了了見.]”, p.10, “무엇이 심원深遠한가? ‘견성하지 못함[不見性]’으로 심원하다고 말한다. 만약 ‘견성’하여 깨달았다면 바로 심원함이 없을 것이다. 각각 지극한 마음으로 지식으로 하여금 돈오해탈頓悟解脫하게 하라.[云何深遠? 以不見性, 故言深遠. 若了見性, 卽無深遠. 各各至心, 令知識得頓悟解脫.]”
(주7.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41c), “識自心衆生, 見自心佛性.”
(주8.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61c), “吾今教汝, 識自心眾生, 見自心佛性.”
(주9. 앞의 책(大正藏48, 355c), “佛知見者, 只汝自心, 更無別佛. 吾亦勸一切人, 於自心中, 常開佛之知見.”
(주10.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9a), “世人性本自淨, 萬法在自性.”
(주11.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4b), “世人性自本清淨, 萬法從自性生.”
(주12. 『孟子』, 「盡心(上)」, “萬物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 強恕而行, 求仁莫近焉.”
(주13. 『孟子』, 「離婁章句(上)」, “남을 사랑하는데도 (나와) 친하지 않으면 그 인仁을 반성해야 하고, 사람을 다스리는데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그 지智를 반성해야 하며, 예禮를 다했는데 예로 답하지 않으면 그 공경을 반성해야 하고, (일을) 행하고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반성하여 찾아야 한다. 자신이 바르면 천하도 바르게 돌아간다.[愛人不親, 反其仁, 治人不治, 反其智, 禮人不答, 反其敬, 行有不得者, 皆反求諸己, 其身正, 而天下歸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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