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수]
윤회의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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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 2021 년 11 월 [통권 제103호] / / 작성일21-11-03 21:45 / 조회5,457회 / 댓글0건본문
법수法數 11 / 무아와 윤회③
붓다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붓다시대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으면, ‘누가 업業을 짓고, 누가 그 업의 과보果報를 받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다시 말해서 아뜨만 또는 영혼과 같은 ‘어떤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이 그런 기능을 담당하는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윤회의 주체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어떤 것’을 고안해 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보특가라설補特伽羅說, 식설識說, 상속설相續說이다.
1. 보특가라설補特伽羅說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의 내부에서 뿍갈라(puggala, Sk. pudgala, 補特伽羅)가 윤회의 주체 역할을 담당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부파불교 시대의 독자부犢子部(Vajjiputtikā, Sk. Vātsīputrīyā)에서 뿌드갈라(pudgala)가 윤회의 주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보특가라설補特伽羅說(puggalavāda, Sk. pudgalavāda)이라고 한다.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 의하면, 독자부에서는 “보특가라는 오온五蘊에 상즉하거나[卽蘊] 오온을 여읜 것[離卽]도 아니고, 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십팔계十八界에 의해 임시로 시설한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보특가라는 오온에 즉한 것도 아니고, 오온에 즉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 즉 ‘비즉비리온非卽非離蘊’이 윤회의 주체라고 주장했다. 만약 오온을 윤회의 주체라고 하면 붓다의 무아설에 위배되기 때문에 보특가라는 오온도 아니고 오온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궤변이다.
이러한 독자부의 주장에 대해 다른 부파에서는 불설佛說에 위배된다고 크게 반발했다. 특히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는 경량부經量部의 입장에서 보특가라설이 불설에 위배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가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의 「파집아품破執我品」을 저술한 목적도 바로 이 독자부의 보특가라설을 논파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독자부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은 보특가라를 윤회의 주체로 인정하게 되면,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아뜨만(ātman, 自我)과 조금도 차이가 없게 된다.
보특가라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라-숫따(Bhāra-sutta, 짐경)」(SN22:22)에서 붓다가 직접 뿍갈라(puggala)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면 붓다는 윤회의 주체라는 의미로 뿍갈라라는 용어를 사용했는가? 그렇지 않다. 붓다는 ‘뿍갈라’라는 용어를 윤회의 주체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바라-숫따(Bhāra-sutta, 짐경)」(SN22:22)와 한역 「중담경重擔經」에 나타나는 ‘뿍갈라(puggala)’와 ‘사부士夫’는 그냥 ‘사람’을 의미한다. 어떤 본질적인 실체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지 않았다. 뿍갈라, 개아個我, 인간, 사람 등은 “단지 오온에서 파생된(upādāya) 것으로, 세상에서 통용되는 인습적 표현(vohāra)이나 개념(paññati)일 뿐, 그 자체로 본질적인 실체는 아니다.”
이와 같이 짐꾼(bhārahāra)은 인습적으로 표현하는 어떤 ‘사람(puggala)’을 지칭한다. 결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짐을 나르는 어떤 본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부에서는 이 보특가라를 윤회의 주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학자들 중에서도 짐꾼(보특가라)을 사람이 죽을 때 짐을 내려놓고 다시 태어날 때 짐을 짊어지고 가는 어떤 실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오온 내에서뿐만 아니라 오온 밖이나 오온에서 멀리 벗어난 곳 어디에도 자아나 아뜨만이 없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기 때문이다.(SN Ⅲ, 132-133)
2. 식설識說
초기경전에 나타난 식(識, viññāṇa, Sk. vijñāna)은 오온의 식, 육식의 식, 십이지연기의 식 등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일반적으로 식識이라고 하면 여섯 감각기관[六根]이 그 대상인 여섯 감각대상[六境]과 접촉할 때 생기는 여섯 가지 앎[六識]을 말한다. 이 육식六識은 일종의 정신현상으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런데 십이연기에서 ‘행行을 조건으로 식識이 있다’고 할 때의 식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이른바 인식판단의 의식작용으로서의 식과 인식판단의 주체로서의 식이다. 후자의 경우는 식을 식체識體로 해석하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
몇몇 초기경전에서는 식을 윤회의 주체로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식識과 명색名色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식이 모태母胎에 들어가지 않으면 명색이 생기지 않는다고 설한다. 「마하딴하카야-숫따(Mahātaṇhākhaya-sutta, 愛盡大經)」(MN38)에서는 “비구들이여, 세 가지가 만나서 수태가 이루어진다. 여기 어머니와 아버지가 교합하더라도 어머니의 경수經水가 없고, 간답바(gandhabba)가 없으면 수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간답바(gandhabba, Sk. gandharva, 乾達婆)는 윤회의 주체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붓다는 십이연기를 태생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해석한 것은 부파불교 시대였다. 따라서 십이연기를 태생학적으로 설명한 경들은 후대 경전 편찬 과정에서 삽입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부파불교에서는 의도적으로 무아설(無我說, anattāvāda)을 유아설(有我說, attavāda)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설일체유부의 명근(命根, jīvitindriya), 대중부의 근본식根本識, 독자부와 정량부의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 상좌부의 유분식(有分識, bhavaṅga), 경량부의 종자(種子, bīja), 화지부의 궁생사온窮生死蘊 등이 그것이다.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식識을 윤회의 주체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러나 붓다는 색・수・상・행과 분리된 별도의 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빠야-숫따(Upaya-sutta, 속박경)」(SN22:53)에서 붓다는 색・수・상・행과 분리된 별도의 식의 오고 감, 사라짐과 발생, 증장, 성장, 풍부는 가능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마하딴하카야-숫따(Mahātaṇhākhaya-sutta, 愛盡大經)」(MN38)에 의하면, 사띠(Sāti)라는 비구가 “오온 가운데 의식[識]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달리고 윤회한다.”는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을 일으켰다. 그러자 붓다는 그를 크게 꾸짖고, 식은 조건에 따라 일어나기도 하고, 조건에 따라 사라지기도 한다, 식은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고 일러주었다. 요컨대 붓다는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지 않았다. 만약 식을 윤회의 주체로 인정한다면,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붓다의 교설이 거짓이 되고 만다.
3. 상속설相續說
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윤회와 그 과보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바로 상속설(相續說, santāna, Sk. saṃtāna)이다. 상속설에 의하면, “어떠한 영혼도, 어떠한 정신적 육체적 요소도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상속은 실체적인 존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존재가 죽어도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 상속이다. 불교에서 아뜨만과 같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윤회와 그 과보를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이 상속이론 때문이다. 발레 뿌쌩은 이 상속개념(saṃtati)으로 말미암아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교리(즉 무아설)는 윤회신앙과 양립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불교철학에서 ‘마음의 흐름(mindstream)’ 즉 심상속(心相續, citta-santāna)은 감각적 인상과 정신현상의 순간적인 연속으로, 이 생生에서 다른 생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심상속은 글자 그대로 마음의 흐름이나 자각의 연속된 순간의 흐름이다. 이것은 ‘자아自我’가 없는 상황에서 인격의 연속성을 제공한다. 마음의 흐름은 한 촛불에서 다른 촛불로 전해질 수 있는 촛불의 불꽃과 유사하게 하나의 삶에서 다른 삶으로 연속성을 제공한다. 붓다에 의하면, 우리의 생활은 결코 한 시기의 존재인 것이 아니고, 업業의 힘에 의해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상속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 업의 성질에 따라 다양한 경우 및 다양한 상태의 유정有情으로서 삶을 받기에 이른다. 이것을 ‘업에 의한 윤회’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우유의 비유로 윤회의 주체 없이도 윤회와 그 과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우유에서 제호로 변하면서 계속된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다른 변화로 넘어가는 것은 없다. 낙은 더 이상 우유가 아니고, 생소 역시 낙이 아니다. 이들 사이에 동일성은 없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우유 없이 낙은 없고 낙 없이 생소는 없다. 역시 생소 없이 숙소는 존재할 수 없다. 동일한 조건을 갖추어 준다 해도 물이나 기름과 같은 다른 어떤 것으로는 낙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우유의 질質이 좋으면 낙의 질도 좋게 된다. 우유의 질이 좋지 않으면 낙의 질도 좋지 않게 된다. 낙은 그전 상태인 우유와 다른 것이지만 낙의 질은 우유의 질에 좌우된다.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존재에게도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주체主體 같은 것은 없지만 생은 계속되고, 한 생에서 만들어진 업은 다른 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붓다는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Paramārthaśūnyatā-sūtra)」에서 “눈[眼]이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도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은 진실이 아니건만 생겨나고, 그렇게 생겼다가는 다시 다 소멸한다. 업보業報(kammavipāka)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다.”라고 했다.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는 이 「제일의공경」을 인용하여 『청정도론』에서 “괴로움은 있지만 괴로워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는 발견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는 인정하지 않지만, 업과 과보는 물론 윤회도 있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 불교의 윤회설이다. 인도의 다른 종교와 철학에서는 아뜨만(ātman, 自我) 또는 지와(jīva, 영혼)와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와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즉 ‘무아・윤회’를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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