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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선·차·음의 성지 눈푸른 납자들의 정진이 이어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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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1 년 12 월 [통권 제104호]  /     /  작성일21-12-03 12:08  /   조회4,62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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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14 | 하동 삼신산 쌍계사 ① 

 

쌍계사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삼신산三神山에 자리 잡고 있다. 지리산智異山(知異山)에 있는데, 쌍계총림 종합안내도에도 ‘삼신산 쌍계사’로 되어 있다. 지리산이나 방장산方丈山이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부르는 것은 중국의 전설에 의한 것이다. 발해만 동쪽에 선인들이 살고 불로불사不老不死의 과일나무가 사는 금강산인 봉래산蓬萊山, 지리산인 방장산, 한라산인 영주산瀛洲山이 있는데, 진시황秦始皇(B.C. 259-210)이나 한무제漢武帝(B.C. 141-87)도 불로장생약을 구하러 이곳으로 동남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보냈다는 전설이다. 지리산도 이 삼신산에 해당하여 이렇게 불렀다. 산은 가만히 있는데 인간들이 이름을 갖다 붙였다. 

 

 

사진 1. 외청교와 일주문.

 

 

쌍계사는 723년 신라 성덕왕 23년에 의상義湘(625-702) 대사의 제자인 삼법三法(?-739) 화상이 육조혜능六祖慧能 대사의 두골을 중국에서 모셔와 지금의 쌍계사 금당이 있는 곳에 묻고 당우를 세운 후 옥천사玉泉寺라고 이름하였다. 그런 후 세월이 지나 통일신라시대 진감선사眞鑑禪師(774-850)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후에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 절터에 가람을 짓고 주위에 중국에서 가져온 차를 심고 주석하면서 절 이름이 쌍계사雙溪寺로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벽암각성碧巖覺性(1575-1660) 화상이 1632년(인조 10)에 중건하였고, 근래에 와서 여러 당우들이 첨가되어 대가람으로 되었다. 벽암화상은 부휴선수浮休善修(1543-1615) 대사의 제자로 백곡처능白谷處能(1619-1680) 대사의 은사가 된다. 사명四溟(1544-1610) 대사를 이어 팔방도총섭국일도대선사八方都摠攝國一都大禪師에 오른 인물로 선교양종에 통달하고 제자백가에도 두루 밝았다. 초서와 예서에도 능하였는데, 참선 수행에도 깊어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쌍계사를 중수한 것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에 부휴대사와 함께 승군의 지휘 역할을 다하고 난이 끝나면서 지리산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오늘날에는 원래의 옥천사 사역寺域과 진감선사비가 서 있는 대웅전 앞쪽으로의 사역이 합쳐져 지금의 대가람인 쌍계사를 이루고 있다.

 

 

사진 2. 금강문.

 

 

쌍계사의 사역으로 들어가는 소나무 숲은 일품이다. 겨울철에 사위가 고요하고 눈이 쌓이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드물어 적막한 가운데 바람 소리만 들린다. 봄에는 따뜻한 남국의 햇살을 느끼며 송림 숲속 길을 걷는 맛이 제일이다. 최치원崔致遠(857-?) 선생은 쌍계사의 풍광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기묘한 절경을 두루 둘러보고 나서 남쪽 고개의 한 기슭을 좋아 택하니, 앞이 확 트여 시원하기가 최고였다. 절집을 지음에 있어, 뒤쪽으로는 저녁노을에 잠긴 산봉우리에 의지하였고, 앞으로는 구름이 비치는 개울물이 내려다보였다. 눈앞에 펼쳐지는 시야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보이는 먼 산이요, 귀를 시원하게 해주는 것은 돌에 부딪치며 솟구쳐 흐르는 계곡 물소리였다. 

 

더욱이 봄에는 시냇가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였고, 여름이면 길가에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웠으며, 가을에는 산 사이의 우묵한 산골짜기에서 밝은 달이 떠올랐고, 겨울이 오면 흰 눈이 산마루에 가득 덮였다. 사시사철의 모습은 수도 없이 변하였고, 온갖 사물들은 서로 빛을 발하며 반짝거리고는 했다. 여러 소리들은 서로 어울려 읊조리곤 했으며, 수많은 바위들은 서로 자기가 제일 빼어나다고 다투었다. 그래서 일찍이 중국에 유학했던 사람이 찾아와 여기에 머물게 되면 모두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혜원慧遠(335-416) 선사가 머물던 동림사東林寺를 바다 건너 여기에 옮겨 왔도다.”라고 탄성했거늘 이는 실로 믿을 만하다."

 

 

사진 3. 천왕문.

 

 

 

지금도 하동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가는 쌍계사 가는 길은 이런 풍광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천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어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되, 인간만 잠시 왔다가 갔을 뿐이다. 

 

쌍계사 일주문一柱門에 이른다. 이제부터 사역으로 들어간다. 여기서부터 일주문-금강문-천왕문-9층 석탑-팔영루-진감선사 탑비-대웅전-금강계단까지 당우들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부처가 있는 공간으로까지 계단을 밟아 오르게 된다. 이 일직선상으로 이루어진 대웅전 영역은 원래의 옥천사 영역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벽암화상에 의하여 조선시대에 와서 조성된 것이다. 작은 개울에 놓인 외청교外淸橋의 석교를 건너서면 이제 속세와 인연을 끊고 피안의 세계로 들어간다. 

 

 

사진 4. 팔영루.

 

 

여러 개의 공포를 높이 올려놓아 다포계 건축물의 화려함을 잔뜩 뽐내고 있으면서도 드나드는 통로는 작지도 크지도 않아 전체 가람에 잘 어울린다. 일주문에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1868-1933) 선생이 전서의 획으로 예서풍으로 쓴 ‘삼신산 쌍계사三神山雙磎寺’라는 겸손한 현판이 걸려 있다. 작고 크고 작고 크고를 리듬 있게 반복하면서 글자의 크기를 바꾸어가며 썼다. 선생이 큰 붓으로 힘차게 쓰지 않은 것은 아마도 금당에 걸려 있는 추사선생이 쓴 현판을 의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사선생의 글씨가 걸려 있는 곳에서 기분을 낼 수는 없지 않았을까. 더구나 추사의 금석학 연구의 맥을 이어오는 위창葦昌 오세창吳世昌(1864-1953) 선생이 그 시절 해강선생의 글씨를 주시하고 있던 형편이었기에 이 절에 현판을 쓰면서 이러저러한 상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일주문 뒤쪽에도 해강선생이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이라고 쓴 현액이 걸려 있다(사진 1).

 


사진 5.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 

 

해강선생은 일찍이 중국에서 서화를 익히고 일본에서 사진까지 배워 그림, 글씨, 사진 등에서 기예를 드날렸는데, 현판 가운데 최고의 뛰어난 작품으로는 단연 ‘상왕산 개심사象王山開心寺’의 장대한 현판 글씨를 꼽고 싶다.

 

일주문을 지나 돌로 포장된 길을 지나면 여러 돌계단이 위로 난 축대 위에 금강문金剛門이 서 있다. 금강문은 일주문 다음에 통과하는 문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속세의 진애를 떨어버리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불법을 수호하고 악을 벌하는 천신인 금강역사金剛力士를 안치하고 있는데, 왼쪽에는 붓다를 늘 모시는 ‘밀적금강密迹金剛’이 있고, 오른쪽에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있다. 이 금강문은 신라시대 진감국사가 지었고, 인조 19년 즉 1641년에 벽암선사가 다시 짓고 현판의 글씨를 직접 썼다. 출입하는 통로문은 홍살문으로 되어 있다(사진 2).

 

 

 

사진 6. 청학루.

 

 

 

사진 7. 팔상전. 

 

금강문을 지나면 또 돌계단으로 쌓은 높은 곳에 천왕문天王門이 서 있는데, 문 앞에는 양 옆으로 석등이 있다. 천왕문은 숙종肅宗 30년(1704년)에 박봉화상이 건립하여 그 후 수리하면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사천왕은 불법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승려와 착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4명의 수호신을 말한다. 자력종교이지만 불교에도 이런 존재를 설정한다. 방편적인 방법이란다. 사천왕은 동주를 다스리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주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주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주를 다스리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말한다(사진 3). 

 


사진 8. 육조정상탑으로 가는 계단. 

 

 

천왕문을 지나면 바로 돌계단이 또 앞을 막아서는데, 이 계단을 올라가면 9층 석탑이 서 있는 팔영루八詠樓(사진 4)의 앞마당에 들어선다. 여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범종루梵鍾樓를 옆으로 지나 옥천교玉泉橋를 지나면 지금부터 까마득히 위로 펼쳐진 돌계단을 밟아 그 옛날 삼법화상이 창건했다는 옥천사의 사역으로 올라가게 된다. 금당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여름 더운 날에는 이 계단을 오르는 일도 힘들다(사진 5). 이곳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공간이라서 평소에는 들어가기 힘들고 안거安居가 해제된 기간 동안에만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사진 9. 금당과 동서방장실. 

 

금당 구역에 들어서면 청학루靑鶴樓(사진 6)가 서 있는데, 높이 걸려 있는 현판의 글씨는 경제인이면서 독립운동을 한 회산晦山 박기돈朴基敦(1873-1947) 선생의 글씨다. 이 청학루 안에는 침명한성枕溟罕性 화상이 1857년에 쓴 ‘쌍계사 사적기’를 새긴 서판이 걸려 있다. 이에 의하면, 쌍계사의 옛 구역은 금당, 팔상전, 영주각, 방장실, 봉래전, 청학루가 있으며, 금당이 처음에는 육조 영당이었고 팔상전이 옛 대웅전이었음을 밝혀 놓고, 새 구역에는 벽암화상이 새로 조성한 대웅전, 응진당, 명왕전, 화엄각, 관음전, 팔영루 및 몇몇 당우 들이 있다고 서술 하여 놓고 있다. 이로써 오늘날의 쌍계사 구역이 구 영역과 신 영역으로 조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청학루를 돌아서면 석가모니의 생애를 그린 팔상도를 모신 팔상전八相殿(사진 7)이 있다. 팔상전은 고려 충렬왕忠烈王(1274-1308) 16년인 1290년에 진정眞靜(?-?) 국사가 처음 지었고, 조선시대 이래 근래까지 여러 차례 수리를 하면서 전해오고 있다. 내부에는 팔상도와 보물로 지정된 영산회상도가 모셔져 있다. 팔상전 옆으로는 영모당永慕堂이 있고, 봉래당蓬萊堂은 팔상전과 청학루와 함께 가운데를 ㄷ자로 하여 처마가 이어져 마당을 형성하고 있다.

 

 

사진 10. 김정희가 쓴 세계일화조종육엽 현액.

팔상전에서 옆으로 난 높은 계단길을 올라가면 드디어 금당에 이른다(사진 8). 금당이라면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곳인데, 여기에는 붓다의 상이 없고 바로 그 육조정상을 모시고 있다는 7층석탑이 들어 있다. 아무리 선종에서 조사를 높이 받들고 또 남종선의 시조가 되는 혜능대 사라고 하더라도 그 두골을 봉안한 공간을 금당이라고 한 것은 맞지 않은 것 같다. 금당의 건물은 육조정상탑을 세운 다음에 후대 사람들이 이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것 같다. 

 

정말 혜능대사의 두골을 봉안하고 탑을 세운 것이라면 또 어느 누구가 이를 훔쳐 갈지도 모르고,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인간들이 탑을 무너뜨리고 사리를 없애 버릴 수도 있었 으니 집을 지어 보호하고 밤에는 문을 닫아 놓을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광신적인 이상한 인간들은 있기 마련이고, 또 조선 시대에는 유자儒者들이 절을 빼앗는 방법으로 주로 한 짓이 사람을 시켜 절에 불을 질러 태워 버리는 것이었으니 탑을 아예 무너뜨려 없애 버릴 위험성은 언제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전각을 금당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금당 좌우로는 동방장東方丈과 서방장西方丈이라는 현판이 걸린 작은 당우가 있다. 방장실을 동서로 나누어 각각 세웠다. 다른 절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지금의 팔상전이 옥천사의 대웅전이었기 때문에 이곳에는 석가모니불이 주불로 모셔져 있다(사진 9). 

 

 


사진 10-1. 김정희가 쓴 육조정상탑 현판.

이런 것보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진짜 그 유명한 육조대사의 두골이 여기에 봉안되어 있을까 하는 점이다. 고려시대 각훈覺訓(?-1230경) 화상이 쓴 것으로 전하는 「육조혜능대사정상동래연기六祖惠慧大師頂相東來緣起」에 의하면, 그 얘기는 이렇게 되어 있다.

 

신라 성덕왕 때 오늘날 전남 영암靈巖 지역인 낭주군朗州郡에 있는 운암사雲巖寺 승려인 삼법화상이 육조대사가 입적한 이후 그 사실을 전해 듣고 평생 소원인 육조대사의 친견을 이루지 못했다고 통탄을 했다. 그런데 당시 오늘날 익산益山인 금마국金馬國 미륵사彌勒寺의 승려인 규정圭晶이 도당 유학 후 가져온 『법보단경法寶壇經』의 초본을 한 권 얻어 읽다가 육조대사가 자신이 죽은 후 5,6년이 지나면 누가 와서 내 머리를 가지고 갈 것이라고 했다는 예언적인 구절을 읽고, ‘드디어 내가 이를 가져와 공덕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영묘사靈妙寺에서 비구니 스님으로 수도하고 있는 김유신金庾信(595-673) 장군의 부인 법정法淨(?-?) 스님에게 말하니, 법정스님이 쾌히 동의하고 집안 재산을 털어 2만금을 주었다. 그래서 삼법화상은 성 덕왕聖德王(702-737) 20년(당 현종 10년) 5월에 장삿배를 타고 당나라로 들어가 육조대사가 주석한 소주韶州 보림사寶林寺에 도착하였다.

 

사진 11. 금당 안의 육조정상탑.

 

 

 

그는 그곳에 머물며 온갖 방안을 궁리하던 중 인근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 보현원普賢院에 머물고 있는 신라 백률사栢栗寺의 승려 대비大悲 화상을 만나 이 문제를 상의하니, 그도 생각이 같다고 하며 개원사에 머물고 있는 당나라 여주 출신 장정만張淨滿이라는 사람이 담력이 있고 믿을 만하다고 하며, 이 사람을 통해 보림사의 육조탑에 봉안된 육조의 정상을 빼오게 하는 것에 의기투합이 되었다. 마침 장정만이 부모상을 당하자 이에 1만금을 보내 먼저 위로하고 상을 치르고 온 후 그에게 계획을 말하니, 고마운 은혜를 갚겠다며 기꺼이 8월 1일 밤중에 보림사로 들어가 육조대사의 정상을 가지고 나와 개원사로 돌아온 후 대비화상에게 전하였다. 이에 삼법화상과 대비화상은 이를 가지고 그곳을 빠져나와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드디어 11월에 항주杭州에 와서 신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서해를 건너 남양만 부근의 당포唐浦에 내려 운암사로 돌아온 두 화상은 비밀리에 법정스님에게 가서 알리니 모두 기뻐하며 영묘사에 마련한 단 위에 이를 봉안하고 경배하였다. 그때 삼법선사의 꿈에 어떤 노스님이 나타나 강주康州의 지리산智異山 아래 눈 속에 핀 칡꽃을 찬미하며 유택을 점지하는 계시가 있었다. 꿈을 깬 후 이를 대비화상과 법정스님에게 말하니 모두 기이하게 생각하여 강주 지리산으로 내려가 보았다. 12월인데 과연 지리산의 동굴 석문을 발견하고 이에 들어가니 물이 솟아나고 칡꽃이 피어 있었다. 

 

모두 환희에 차 장차 탑을 세우기로 하고 육조대사의 두골을 임시로 묻어놓았다. 그러자 그날 밤 꿈에 그 노스님이 또 나타나 “탑을 세워 드러내지 말고 비석을 세워 기록하지 말라. 명名도 없고 상相도 없음이 제일의第一義니라. 남들에게 말하지 말고,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삼법선사는 돌로 함을 만들어 두골을 안치하고 그 아래에 암자를 세웠다. 대비화상은 백률사로 돌아간 후에 입적하였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후 효성왕孝成王(737-742) 3년인 739년 7월 12일에 삼법선사는 내가 죽으면 운암사로 보내 장사지내라는 유언을 남기고 입적하니, 그 제자인 인혜仁慧, 의정義定 화상이 시신을 운암사로 옮겨 장사를 치르고 유물과 법기法器도 그곳에서 보관했다. 지리산의 암자는 그 후 초목이 우거져 쑥대밭으로 변하였다.

 

 



사진 12. 박기돈이 쓴 적묵당 현판(상). 사진 12-1. 박기돈이 쓴 설선당 현판(하). 

 

그 후 진감선사가 육조의 정상이 묻혀 있는 터에 가람을 창건하고 육조의 진영을 모시는 영당[六祖影堂]을 세웠다. 각훈선사는 이런 이야기를 삼법화상의 묵은 원고에 의거하여 쓴 것이라고 하고, 이로써 붓다의 머리뼈는 우리 오대산五臺山에 보관되고, 육조대사의 머리뼈는 지리산에 모셔지게 되었으니 우리나라야말로 불법본원佛法本元의 보배로운 땅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지금 쌍계사 육조정상탑에 혜능선사의 두골이 모셔져 있다는 이야기가 전승되어 왔고, 오늘날 화개동花開洞이나 화개花開장터라고 할 때 이 ‘화개花開’라는 말도 ‘칡꽃이 피었다’라는 이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진감선사가 육조영당을 세울 때 그 자리가 삼법화상 등이 혜능대사의 두골을 묻은 곳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리고 지금의 탑은 오래된 시기의 탑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이 탑을 세울 때 육조의 두골을 발견 하였으며, 과연 이 탑 속에 봉안하였을까? 궁금증이 발동하지만, 오늘날 쌍계사에는 그 사적事蹟을 알 만한 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다. 

 

이 금당에는 금당金堂이라는 현판을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추사 선생이 쓴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祖宗六葉’이라고 쓴 현액이 걸려 있다. 원본은 따로 보관하고 복각한 것이지만 추사 행서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글씨다(사진 10, 10-1). 그 까다로운 추사선생도 육조의 두골이 봉안된 탑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글자의 한 획도 고증하며 서법을 확립하여 간 추사선생은 과연 이곳에 육조의 두골이 봉안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런 현액의 글씨를 썼을까? 최완수 선생은 당시 추사선생이 만허晩虛 화상에게서 차를 얻고 그 보답으로 써 준 것이 아닐까 하고 추론 하였다. 

 


사진 13. 오제봉이 쓴 나한전 주련. 

 

추사선생이 만허화상에게 보내는 ‘희증만허戱贈晩虛’의 시에 보면, 당시 쌍계사 육조탑六祖塔 아래 주석하고 있는 만화화상은 차를 만드는 솜씨가 절묘하고 그 차를 가지고 와서 맛보이는데 용정龍井의 두강頭綱으로도 더 할 수 없고, 절집 곳간에 이러한 무상의 묘미를 가지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격찬을 하면서 찻종[茶鍾] 한 벌을 만허화상에게 주어 그것으로 육조탑 앞에 차를 공양하도록 했다고 부기하고 있다. 차와 시를 주고받으며 마음 깊이 간담이 상조했던 두 사람 간의 이런 사정으로 보건대, 차벽 [茶癖]이 심했던 추사선생이 만허화상이 만든 차맛에 완전히 빠진 것 같기도 하다. 만일 그렇다면 만허화상이 절집의 현판을 요청했을 때 ‘무상묘미無上妙味’의 그 차맛을 생각했다면 이를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허물없는 사이에 농담 같은 표현을 가미한 추사선생의 시는 이렇다.

 

열반이니 하며 귀신같은 말로 한 세월 다 보내나니      

스님에겐 눈을 뜨게 하는 참선만이 귀한 모양이구려.      

공부하는 일에 차 만드는 일 또 하나 간여하느니     

사람들에게 탑 둘레의 둥근 진리의 빛 마시게 하구려. 

涅槃魔說送驢年    只貴於師眼正禪

茶事更兼參學事    勸人人喫塔光圓

 

기독교에서도 성인이나 유명한 성직자의 유골을 숭배하는 풍조가 생겨나 카톨릭에서는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ient, 1545-1563)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배척하고 ‘성유물聖遺物 (Holy Relics)’을 모시고 숭배하는 것을 교리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의 성당 보물관에서 작은 유리관이나 상자에 뼛조각을 넣고 금장식으로 화려하게 만든 기물들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데, 바다의 이쪽이든 저쪽이든 사람들은 어떤 물건을 보아야 감동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이다. 차를 마실 것인지 두골 이야기를 계속해야 할 것인지 어느 것이 실속 있는 일일지 모르겠으나, 차를 얻어 마시고 현판 글씨를 써 올리는 일도 괜찮은 일이겠다 싶다. 붓다나 예수나 그만큼 진리의 말씀을 바로 보라고 했는데 인간들은 뼛조각을 보고 있으니 이 또한 난감한 일이기는 하다. 아무튼 육조정상탑의 이야기는 이렇다(사진 11). 

 

 

 

사진 14. 마애좌상

 

 

 

금당 구역에서 내려와 팔영루를 지나 대웅전大雄殿 앞마당에 들어선다. 붓다가 있는 공간이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大雄殿은 조선 후기에 지은 팔작지붕의 목조 단층건물이다. 기둥이 높아 건물이 크게 느껴진다. 건물의 천장은 우물 ‘정井’ 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장식하였고, 불단 위로는 지붕 모형의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였다.

 

대웅전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왼쪽으로는 적묵당寂默堂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설선당說禪堂이 있다. 양 당우의 현판도 모두 박기돈 선생이 썼다(사진 12, 12-1). 이 건물들은 스님들이 기거하고 공부하는 요사 채이다. 대웅전 옆에 있는 나한전羅漢殿의 주련은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峰(1908- 1991) 선생이 썼다(사진 13). 

 

대웅전의 동쪽에는 큰 바위를 움푹 들어가게 파낸 후 그 안에 강한 부조로 좌상을 새겨 놓은 마애좌상이 있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으로 머리를 묶었고, 옷은 두툼하며 옷 주름이 굵게 새겨져 있다. 두 손으로 무엇을 받들고 있는 모습인데, 그 모습이 순진하게 생긴 수행자를 닮아 보인다. 어쩌면 절이 어려웠을 시절, 누구도 오지 않는 황폐한 절에서 한 소식하고 떠나간 스님이 아닐까. 그 스님을 혼자 시봉하던 상좌스님이 돌에 스승의 모습을 새겨두고 눈물을 삼 키며 하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애좌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사진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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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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