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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조선불교학인연맹의 기관지, 『회광回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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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  2022 년 2 월 [통권 제106호]  /     /  작성일22-02-04 09:42  /   조회4,38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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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잡지 산책 14 | 『회광回光』 (통권 2호, 1929.3-1932.3) 

 

1881년에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유길준 등이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된 이후 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났다.

 

일본 유학의 열풍 속에서

 

불교유학생의 경우 최초의 유학생은 1910년 말 유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현사 출신 김법룡과 김승법이다. 이후 1913년에 12명, 1914년에 14명이 입학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 일본 유학이 자유화된 이후 불교유학생도 급증하여 1921년에 동경과 경도의 중학과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의 수는 50여 명에 이른다. 일제 치하 일본 유학생의 총수는 약 360명인데 1920년대 전반에는 62명 이상, 후반에는 64명 이상, 30년대 전반에는 32명 이상, 30년대 후반에는 117명이 유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경순, 「일제시대 불교 유학생의 동향-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승가교육』 2집, 1998) 

 

사진 1. 청담스님(이순호) 

 

당시 불교유학생들은 대부분 조선의 본산급 사찰에서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보낸 촉망받는 젊은 인재들이 었다. 이들의 전공은 불교학에 국한하지 않았고 문학, 의학, 체육학, 농학, 법학, 사회학, 경제학 등 다양하였다. 이들이 귀국하여 실무에 종사한다 해도 불교와 친연성이 멀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불교 인재의 다양한 사회 진출이라는 긍정적인 인식도 있었지만, 대부분 사중의 여론은 그리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불교학(불학)을 전공하는 유학생들은 대학의 권위 있는 교수로부터 수업을 받거나 단행본, 잡지 등을 통해 서구의 불교학적 지식을 흡수하였다. 불교잡지 『불교』와 『금강저』 등을 통해 당시 일본의 불교 연구의 성과를 직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학문적 역량은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 정리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금강저』에 수록된 졸업논문과 리포트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수준이나마 선정한 주제와 연구 방법은 근대 학문의 기초를 다지는 과정이어서 기존 조선의 강원에서 접하지 못한 대상과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사진1-1. 운허스님(이용하). 

 

불교학을 수학한 유학생 중 일부는 귀국하여 불교 관련 기관의 포교사, 학교의 교직원으로 종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각 사찰 운영의 실무에 종사하여 학술적으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과연 지난 10여 년 동안 근대교육을 받은 신진 학자, 예비학자들의 학술적 성과가 무엇이었는가. 유학을 통해, 근대교육을 통해 경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심화되었는가 하는 반성적 분위기가 불교계 전반에 퍼져 갔다. 전통 사찰의 강원 교육이 다시 활성화되는 시점과 맞물려 전통 강원 교육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흥의 목소리가 학인들의 목소리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불교계의 움직임 속에서 1927년 10월 29일 ‘사계의 유지자들 다수’가 개운사에 모여 ‘현하 조선불교 사정을 토의한 결과’ 조선불교학인대회의 발기를 결의하고 1928년 개최를 위한 발기인 모집 위원을 선정하고 취지서를 작성하였다. 발기인 모집 위원으로는 박용하(이용하, 운허), 이순호(청담)(사진 1), 정찬종, 김형기, 박홍권, 배성원, 김태완, 정화진이다.( 「조선불교학인대회 발기 취지서」, 『불교』 42호(1927.12).

 

 

사진 2. 『회광』 표지. 

 

1928년 3월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평의원회가 열리는 기간을 이용하여 14일부터 17일까지 조선불교학인대회를 각황사에서 개최하였고, 강령, 교리연구, 교육제도, 교육기관 배치, 교과서, 학인 의제衣制, 예식, 학인 품행, 교화, 상설기관, 기관지 발행, 회록 출판, 대회비용 및 기타사항을 의결하였다. 그 결과 교리 연구는 선교후선先敎後禪으로 하고, 교육제도는 초등과 3년 중등과 3년 고등과 4년으로 구성하며, 교육기관의 배치에 관해서는 고등 강원 1개소를 경성에, 중등 강원 6개소 이상을 지방에, 초등 강원은 중등 강원과 그 외의 사찰에 두기로 하였다. 아울러 상설기관인 연맹의 규약을 정하고 기관지로 『회광』을 연 2회 발행하기로 하였다. 『회광』은 조선불교학인연맹의 기관지로, 1, 2호의 발행인은 이순호(청담)이며, 발행소는 개운사 강원 내에 두었다. 주된 주제는 전통 강원 교육을 받는 학인들의 교육 현실개혁 담론이다(사진 2, 사진 3). 

 

잡지의 지향과 편제

 

학인연맹의 강령과 그 규약의 요지는 기존 각 본산의 강원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다. 이는 장차 강원을 이수한 학인들의 장래를 보장하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1, 2호에 담겨 있는 많은 다짐과 전망의 글은 이를 다채롭게 풀어낸 것에 불과하다. 이를 종합하면 『회광』의 지향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사진 3. 개운사 강원(학인연맹 소재지). 

 

첫째, 강원 소속의 학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인식하는 공론화의 장이다. 

둘째, 근대의 변화된 상황에서 기존제도와 내용을 혁신하는 실천의 장이다.

셋째, 미래의 진로를 확고하게 마련하고자 공동의 과제를 논의하는 담론의 장이다.

이러한 지향을 실천하기 위해 잡지 자체를 어떻게 구성하였는지 확인할 차례다. 잡지의 목차를 아우르는 편제는 통일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았는데, 대체로 다음 순서에 따른다.

 

1호: 권두언-사설-명사들의 제언(기획)-학인논설-감상문과 시 

2호: 권두언-학술논설-명사들의 제언(기획)-연맹원의 절규(기획)-학인논설-문예란·회광시단

 

1호의 권두언에는 석옹 경운과 석전산인의 글이 수록되었고, 2호에는 한용운의 글이 수록되었다.

기획란에는 1, 2호 모두 명사들의 글을 다수 수록했다. 1호의 주제는 「조선불교학인에 대한 제사諸師의 기대」이다. 박한영, 송만암, 한용운, 이능화, 권상로, 최남선, 도진호, 백성욱, 이광수의 글을 수록하였다. 2호의 주제는 <제諸 명사名士의 조선불교와 학인에 대한 기대>이다. 박한영, 권상로, 노정일, 안재홍, 이광수, 유광렬, 차상찬, 박명환, 주요한, 이은상, 김일엽, 윤홍렬, 강헌의 글을 수록하였다. 당시 불교계나 국학계, 언론계에서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유명 인사들이 망라되었다. 

 

사진 4. 김태흡의 논설. 

 

학인들의 논설에는 학술적 내용보다 학인연맹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는 시론을 주로 담아내었다.

문예란에는 소설은 등장하지 않았고 짧은 감상문과 시 위주로 학인의 작품을 수록하였다. 

 

『회광』은 주로 여러 학인들의 주장을 표출하는 공적인 장으로 활용되었다. 불교와 국학계 인사들의 격려와 불교계의 발전을 위한 제언도 비중 있게 수록되었다. 다만 전국 각지에 흩어져 공부하는 강원 학인들의 잡지였기 때문에 편집 자체는 짜임새가 있지는 않고, 논설과 작품들은 산만하게 나열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 20세 초반인 학인들의 수준이 어떤 영역에서 일가를 이루기에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보니, 등장하는 논설의 내용과 논조가 반복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다. 

 

강원과 학인이 처한 현실을 외치다

 

2호에 첫 번째로 실린 김태흡(석대은)의 「불교전문강원의 전망」은 강원과 학인이 처한 실상과 발전 방안을 제시한 글로 잡지의 지향을 잘 구현한 논설이다(사진4). 학인연맹 위원들의 선배 세대이면서 일본 유학을 다녀온 포교사 김태흡의 강원교육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이 돋보인다.

 

그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교육기관의 설립에 대한 제언이다. 그는 ‘최근’ 10년 동안 강원이 학교로 전환함에 따라 순일한 교육내용이 일어日語나 산술 과목 등으로 복잡해진 것을 말하며,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불교에서 벗어나게 되는 현실을 문제로 제기하였다. 그는 재정 형편 때문에 모두 전문학교나 외국 유학을 보낼 수 없으니 불교 전문교육기관을 세우되 재단법인이나 사단법인으로 세워 백년대계의 불교전문고등강원을 확정적으로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학인연맹에서 조선불교선교양종종회에 건의하여 불교전문고등교육기관으로 불교연구원(개운사 대원암)을 설치한 사례를 소개하였는데, 재단의 꾸준한 지원에는 의문을 표하였다. 그리고 개별 사찰에서 강원을 운영하는 것보다 몇 개의 본산이 합동으로 완전한 재원을 마련한 후 ‘영구한 강원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사진 5. 박한영의 글. 

 

둘째는 강원의 교재에 관한 제언이다. 종래의 교육과정인 사미과,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로는 만족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고 하며 ‘학인연맹에서 정한 것과 같이’ 내과와 외과를 겸행하되 특정한 교재보다는 초학자가 이해하기 쉬운 문장을 독본식으로 편집하여 활용할 것을 제언하였다. 그리고 사교, 대교 과목도 간략한 약해略解와 소주小註로 된 것을 선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기존의 내전 강의가 방대한 분량의 극히 일부를 교습함에 불과하며, 그 방식도 광소廣疏, 대소大疏, 대초大鈔를 훈고학적으로 읽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대안으로는 선교양종종무원의 교학부에서 교재선정위원회를 구성하여 교재를 새로 선택하고 편집할 것을 주장하였다. 

 

셋째는 학인의 졸업 후 진로에 대한 제언이다. 내전을 공부한 강사나 학인 출신들이 ‘일어 꽁댕이’나 알고 ‘부기簿記줄’이나 해석하는 자들에 비해 형편없는 급여를 받는다고 하면서, 강당의 학인은 자타가 ‘시대의 낙오자’로 아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학인 등용의 진로가 막힌 현실에서 해결 방안으로 세 가지의 진로를 제시하였다. 첫째는 불경 전문 강사의 길, 둘째는 홍법 전도하는 포교사의 길, 셋째는 가람 수호 주지의 길이다. 이를 위해 강사나 포교사에 대한 대우를 현실화하여 학인들의 의욕을 북돋워 줄 것을 주장하였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의미가 있는 김태흡의 논설 외에 박한영과 권상로도 강원과 학인의 발전에 대한 격려의 글을 발표하였다. 박한영(석전)은 그동안 유신이니 혁신이니 하면서 혼돈에 빠져버린 불교청년들에게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불교를 믿을 것을 당부하였다(<불佛을 신信할 것>(사진 5). 권상로는 해외 유학생, 외과 졸업생, 구직에 힘쓰는 사판승보다 구시대의 면목과 규구規矩를 간직하고 있는 강당의 학인에게 기대를 건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하였다(<시대를 역전하라>).

 

학술과 문예란의 전개

 

학술 논설로는 중앙불전 교장 김영수와 강사 김경주의 글이 주목된다. 대각교를 창시한 백용성의 법문도 교학적 논설에 포함시킬 수 있다. 김영수의 「조선불교와 화엄관」, 김경주의 「불교의 지나초전연대支那初傳年代와 42장경四十二章經 역작譯作에 대한 일 고찰」, 백용성의  「유심유물불이론」 등 이다. 수록된 학술적 글은 세 편에 지나지 않으나 조선불교의 강맥을 이어나갈 강원의 학인들에게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학술적 정보와 불교사적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사진 6. 「회광시단」 란. 

 

2호의 「문예란」에는 일기를 포함한 수필이 수록되었고, 「회광시단」 란에는 시, 시조, 동요가 수록되었다(사진 6). 투고자의 대부분은 당시 여러 사찰의 강원 소속으로 있는 학인들이다. 1호의 조종현(개운사)과 성원(개운사), 2호의 조탄향(개운사), 윤한성(해인사), 무근생(파계사), 신석정(개운사), 나방우(해인사), 김영환(개운사), 서성기(선암사), 류남수(해인사), 차성오(해인사) 등이다. 혜신, 만보산, 오상순, 방인, 적라학인은 소속 미상이다. 이중 조종현, 윤한성, 신석정, 나방우(나운향), 김영환, 오상순, 석범, 적라학인 등은 이미 등단했거나 『불교』지에 작품을 수록한 바 있는 시인들이다. 

 

『회광』에 실린 시와 시조는 상대적으로 신심에서 우러난 종교성이 농후한 작품이 비교적 다수를 차지한다. 기존의 유학생회나 전문학교 학우회의 잡지보다도 『회광』에 투고한 강원의 학인들은 상대적으로 불교 경전의 연찬에 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대부분의 생활이 강원의 생활이었기 때문에 신심에서 우러난 다짐의 시가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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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불교가사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불교문학의 다양한 양상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조선시대 불가 한문학의 번역과 연구, 근대불교잡지의 문화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불교시가의 동아시아적 맥락과 근대성』 등이, 번역서로 『정토보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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