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관음사 선원 향곡스님 문하에서 참선을 시작하다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묘관음사 선원 향곡스님 문하에서 참선을 시작하다


페이지 정보

박희승  /  2022 년 2 월 [통권 제106호]  /     /  작성일22-02-04 11:11  /   조회5,475회  /   댓글0건

본문

은암당 고우스님의 수행 이야기④ 

 

1965년, 고우스님은 향곡스님이 주석한 묘관음사로 가서 참선을 시작한다. 혼해스님께 『금강경』 공부를 하며 참선에 발심한 스님은 당대의 선지식 향곡스님이 계시는 기장 묘관음사 길상선원으로 갔다. 고우스님은 강원에서 선禪에 대한 기본 공부를 했기 때문에 참선할 때 선지식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지식으로 모신 향곡스님 

 

당시에는 각 산중에 선지식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망월사 춘성스님, 통도사 극락암 경봉스님, 기장 묘관음사 향곡스님이 3대 선지식으로 일컬어지며 참선 수행자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때 성철스님은 파계사 성전암에서 철조망을 치고 10년 동안 동구불출하다가 문경 김용사로 갈 때였다. 고우스님은 전법 인가 받은 도인인 향곡스님을 찾아 기장 묘관음사로 갔다. 

 

사진 1. 기장 묘관음사 대웅전과 선방 전경.

 

향곡香谷(1912~1978) 스님은 1912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나 16세에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하였다. 이후 23세에 범어사 원효암에서 당대의 대선지식 운봉雲峰(1889~1947)선사를 만나 10년 동안 시봉하였는데, 선사는 근세 한국불교의 중흥조라 불리는 경허스님의 전법 제자 혜월慧月(1862~1937)스님에게 전법 인가 받은 선지식이었다.

 

향곡스님은 양산 내원사에서 운봉스님을 모시고 치열하게 참선하던 어느 가을날, 산골짜기 돌풍이 절 문짝을 때리는 찰나에 가슴에 걸려 있던 화두 공안이 사라지고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는 체험을 하고는 조실채로 운봉선사를 찾아갔다. 선사는 옆에 있던 목침을 앞에 내놓으며 “목침을 목침이라 하지 말고 일러라.” 하자 향곡스님은 목침을 발로 차 버렸다. 선사가 다시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만두고, 다시 일러라.” 이에 향곡스님이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다 꿈속에서 꿈을 설함입니다. 모든 불조佛祖가 나를 속인 것입니다.” 하니, 운봉선사가 크게 기뻐하며 향곡香谷이라는 법호와 전법게를 지어 주셨다. 이때가 1941년 8월이었다. 이리하여 향곡스님은 29세에 운봉선사로부터 전법 인가를 받았는데, 그 법맥은 고려시대에 임제종 석옥청공선사의 법맥을 이어 온 태고보우국사에서 근세 경허 - 혜월 선사의 임제 정맥을 이은 것이다.

 

1947년 봉암사 결사와 향곡스님의 확철대오

 

향곡스님의 스승 운봉선사는 1943년에 당시 부산 동래의 윤금륜월 보살이 시주한 기장 해변 임야 3만평에 선원을 세우니, 이것이 묘관음사다. 창건주 윤금륜월 보살은 독실한 불자로 운봉스님의 법문을 듣고 참선 수행을 했는데, 향곡스님과 성철스님, 그리고 진제스님도 시봉한 대공덕주였다. 향곡스님은 조실로 계시던 운봉선사가 입적하시자 묘관음사에 주석하게 되었다. 

 

사진 2. 묘관음사 조실 향곡스님.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묘관음사의 길상선원.

 

1947년 가을에 성철스님으로부터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며 봉암사 결사에 동참하라는 연락이 왔다. 향곡스님과 성철스님은 임자(1912)생 동갑으로 1939년 팔공산 운부암 선원에서 처음 만나 함께 정진한 이래 1978년에 향곡스님이 먼저 입적할 때까지 평생 각별하게 지낸 도반이다. 향곡스님이 봉암사에 가니 성철, 청담, 자운, 월산, 보문스님 같은 당대의 기라성 같은 수좌들이 함께 공주규약을 정해서 참다운 정진을 하고 있었다. 

 

광복 직후인 1947년 봉암사 결사는 비록 소수의 선승들이 시작했지만, 그 영향력은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룰 만큼 큰 것이 었다. 당시에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유산으로 처자식을 거느린 결혼한 승려인 대처승들이 교단과 사찰 운영을 주도하며 참선 수행과 전법보다는 가족 부양과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하여 참선하는 선승들은 뒷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런 시대에 성철, 청담, 자운, 보문스님 같은 분들이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로 참선 수행으로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고자 봉암사에서 결사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향곡스님은 이미 스승으로부터 인가까지 받았지만, 봉암사에서 도반들이 좋은 뜻으로 함께 모여 정진하자는 부름을 받자 함께 동참한 것이다. 봉암사에서 치열하게 정진하던 어느 날 성철스님이 향곡스님에게 물었다.

“죽은 사람을 완전히 죽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죽은 사람을 완전히 살려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사진 3. 묘관음사 결재대중들. 향곡스님(첫줄 중앙), 혜암스님(첫줄 우측에서 2번째), 진제스님(첫줄 맨 좌측), 고우스님(셋째 줄 좌측에서 두 번째). 

 

향곡스님은 이 말에 꽉 막혀 삼칠일 동안 밥 먹고 잠자는 것도 잊고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한결같이 참구하던 중 문 앞을 지나다 당신의 양손을 보고는 홀연히 확철대오하고 오도송을 읊었다. 이로부터 천하 조사들의 말에 막힘이 없었고, 인연 따라 자유롭게 노닐게 되었다. 이에 당시 봉암사에서 함께 정진하던 도반 성철스님과 서로 공부를 탁마하며 향상일로로 가게 된다.

 

그런데, 1949년이 되자 백두대간의 중심에 있는 희양산 봉암사에도 빨치산이 자주 출몰하게 된다. 성철, 향곡스님은 전쟁의 불운한 기운을 느끼고 남쪽으로 피난처를 알아보고자 기장 묘관음사로 오게 된다. 묘관음사에서도 향곡, 성철스님은 치열한 정진과 탁마를 이어갔다. 묘관음사에는 지금도 선방 옆에 탁마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두 선지식은 법담을 나누다 바로 답하지 못하면 멱살을 움켜잡고는 우물에 집어넣거나 절 옆 임랑 해변으로 끌고 가서 바닷물에 밀어넣을 정도로 치열하게 탁마하였다. 묘관음사는 이렇듯 향곡스님이 주석하고 성철스님이 와서 정진하면서 도량에 정진의 기운이 활짝 열렸다. 이후 전쟁이 터지면서 남쪽으로 피난 온 선승들은 묘관음사에서 한 철씩 정진하여 현대 한국불교에 더 유명한 수행처가 되었다.   

 

향곡스님에게 화두를 받다

 

고우스님은 1965년에 묘관음사 길상선원으로 가서 조실 향곡스님께 인사를 드렸다. 

“강원 공부는 했느냐?”

“고봉, 관응, 혼해스님께 사교 『금강경』까지 보고 대교과 『화엄경』 공부를 못 하고 참선하고 싶어 선방에 왔습니다.”

“그래, 그러면 화두는 ‘마음도 아니고, 한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가?’ 이뭣고? 화두를 들거라. 그동안 강원에서 ‘일체유심조’라 하여 마음도 배웠고, 마음이 부처라 하여 부처도 배웠을 거고, 한 물건이라는 것도 배웠겠지만, 그거 다 아니다. 이걸 화두로 의심해서 참선 열심히 하거라.”

이렇게 하여 고우스님은 “마음도 아니고, 한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가?”하는 화두를 참구하기 시작한다. 성철스님도 1967년 해인총림 동안거에서 “백일법문”을 하시면서 대중들에게 이 화두를 준 것을 뒤에 알게 되었다. 향곡, 성철 두 선지식은 당시에 참선 수행자들에게 같은 화두를 준 모양이다.

 

묘관음사 길상선원의 첫 안거 정진 

 

고우스님은 묘관음사 길상선원의 향곡스님 밑에서 5년 동안 5철 안거 정진을 한다. 스님께서는 늘 당신이 엄하신 향곡스님의 묘관음사 선방에서 첫 안거 90일 동안 14시간씩 좌선을 하였는데, 첫 안거를 하루 14시간 가행정진으로 시작하니 그 뒤부터는 어느 선방에 가서 몇 시간을 앉아 있더라도 정진에는 자신감이 생겨서 두려운 마음이 없어졌다고 한다. 첫 안거에서 14시간이나 좌선하며 정진력을 키운 것이 평생 참선 공부에 큰 힘이 된 것이다.

 

 

사진 4. 기장 묘관음사 선방 길상선원 전경. 

 

또 당시에는 어느 선원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묘관음사도 선방이나 방사가 부족하여 조실스님이나 비구 수좌들과 재가 보살들이 한 선방에서 정진하였다. 비구니 수좌들은 선방에서 좀 떨어진 별채 토굴에서 따로 정진하였다. 어려운 수행 환경을 경험하고 수용하게 되니, 이후 더 어려운 곳에서 공부하더라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향곡스님은 공부에는 엄하셨다. 결제 중 초하루, 보름에는 법당에서 조실스님의 상당법문이 늘 있었고, 공양 때나 어디 출타하셨다 돌아오시면 한말씀하시는 소참 법문도 자주 하셨다. 그렇게 고우스님은 묘관음사에서 당대의 선지식 향곡스님 문하에서 첫 안거를 지내며 화두선의 정진력을 키워 갔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박희승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서 20여 년간 종무원 생활을 하다가 고우 스님을 만나 성철스님 『백일법문』을 통독하고 불교의 핵심인 중도에 눈을 뜬 뒤 화두를 체험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불교인재원에서 생활참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유튜브 생활참선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박희승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