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고성사에 초암을 짓고 혜장선사와 교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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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 2022 년 3 월 [통권 제107호] / / 작성일22-03-04 09:49 / 조회4,605회 / 댓글0건본문
근대불교사서史書 15 | 『대둔사지』의 찬술자와 정약용③
조선후기 불교계의 사지寺誌 찬술에서 정약용(1762~1836)의 존재는 빼놓을 수 없다. 그가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18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한 것은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의 사상과 역사, 그리고 문학 등을 통해 조선후기 불교계 지성知性들이 출현했으며, 불교계의 문예수준이 향상된 것이다. 이것은 조선의 불교가 동시대에 유행했던 문예사조와 만날 수 있었고, 그 의식수준이 향상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불교사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다산의 불교관련 시문과 불교관
정약용은 『만덕사지萬德寺志』 찬술에서 전체 내용을 감정鑑定한 것과는 달리 『대둔사지』에서는 권1의 단 한 곳에서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지 찬술의 과정에서 그의 영향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사지의 구성과 자료수집, 자료의 비판과 고증, 편찬자들의 찬술 태도와 불교사 인식 등은 이전의 사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다산이 18년 동안의 강진유배기에 스님들과 교유했고, 스님과 사찰을 소재로 한 시문은 그의 불교관과 함께 학문적 영향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실제로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는 시문과 기문記文 등 적지 않은 불교관계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다산의 시문집에는 유년 시절부터 유배 이후인 만년의 시기까지 총 8종 107건의 불교관계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사찰 주변의 자연경관을 예찬한 글이 대부분이고, 독서의 장소, 당시 불교계의 피폐상이나 폐단 등과 같은 불교계의 동향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그는 유배 이전 동림사東林寺에서 중형仲兄과 40여 일 동안 입사入仕를 위해 유교경전을 독서하는 득의得意의 일면을 보이기도 했다.
22세(1783, 정조7) 때는 봉은사에 머물면서 경의經義의 과문科文을 공부하기도 하였는데, 봉은사에 관한 4편의 시에는 그 때의 감흥뿐 아니라 당시 불교계에 대한 사정도 단편적이나마 보이고 있다. 그는 본분을 잃고 방황하는 스님들을 “서울에서 떠도는 천박한 무리”로 표현했는가 하면, “중들 대부분이 무식하여 세속의 영화에 빠져 세속을 초탈한 즐거움을 모른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다산시문집』에는 승사僧寺를 주제로 한 시가 적지 않게 보인다. 강진 만덕사(오늘날의 백련사)에서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이르기까지 약 28개 사찰에 대한 70여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유배 이전에는 다른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람과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독서의 장소로서 사찰을 이용한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개인적인 신앙심이나 교리연구의 자세는 파악하기 어렵다. 또한 대부분 불교계의 부정적인 측면이나 피폐상을 읊고 있어 유배 이전 그의 불교관은 당시 다른 유학자들의 그것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지 않다.
1783년 그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789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던 때까지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대체로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때문에 선진유학先秦儒學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다산의 경세관經世觀은 불교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다산과 불교의 인연
다산이 불교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 계기는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의 입국과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 간 이후부터다. 다산은 1801년 겨울 강진에 도착해서 동문 밖 주가酒家에 거처했고, 1805년 겨울에는 보은산방寶恩山房(高聲寺)으로 옮겼다.
1806년 가을에는 이학래李鶴來의 집으로 옮겼고, 1808년 봄에는 만덕산 기슭의 윤부尹博의 산정山亭인 ‘다산茶山’으로 옮겨 10여 년 동안을 살았다. 이 시기 동안 다산은 만덕사와 대둔사 스님들과 교류를 통하여 불교와의 깊은 관계를 갖는다. 18년의 유배기간 동안 그는 부분적이나마 개인의 불우한 환경을 불교에 의지하였으며, 불교경전을 섭렵하기도 하고, 스님들에게 시와 유학을 가르쳤다.
그의 이러한 스님들과의 교유는 『만덕사지』·『대둔사지』·『만일암지挽一菴志』 등 대둔사와 만덕사를 비롯한 사암寺庵의 역사를 편찬하는 작업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대둔사지』는 다산과 사제지간의 교연交緣을 맺은 만덕사와 대둔사의 스님이 중심이 되어 찬술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 스님 개인의 행적과 문집에서는 이들이 『대둔사지』 편찬의 과정에서 보여준 우리나라 고대사나 불교사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둔사지』는 그 내용이 당시 일반사서의 그것과 동일한 수준이었다. 대둔사와 관련 깊은 고대사와 불교사에 대한 정리는 대부분 아암과 색성·초의·자홍이 주도했다. 특히 대둔사의 연혁에 대한 이전 자료의 비판과 고증은 연대 오류나 그에 따른 삼국의 형세, 그리고 고대 대둔사의 창건과 중건에 대한 검토가 매우 치밀하게 진행된 것이다.
스님들의 이러한 자료수집과 이전 자료에 대한 비판과 고증은 스승 정약용이 영향을 준 결과라고 생각한다. 스님들은 시와 유교 경전 등의 수학과 함께 전란 이후 자기 인식이 강렬하게 부각되었던 조선의 역사에 대한 이해까지도 전수받은 것이다. 결국 정약용은 제자들에게 사지 편찬에 이용할 자료를 수집하게 하고, 그 비판과 고증을 실시케 하여 주註 또는 안설案說을 덧붙이게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둔사지』는 정약용에게서 학문적인 영향을 받은 완호와 아암을 필두로 하는 스님들 즉 다산학파茶山學派의 역사연구에 대한 결과물로 해석할 수 있다.
『대둔사지』의 찬자와 찬술 시기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서지학적 측면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대둔사지』는 우리나라 불교 사지의 정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조선후기 일반 역사서의 찬술과 동일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찬자와 시기 문제는 찬술의 과정에서 보이는 다산의 기여도와 편사編史정신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현재 『대둔사지』는 찬술자와 찬술시기가 확실치 않다. 특히 권4 『대동선교고』는 찬술자가 다산이라는 근거가 미약하여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 일찍이 최남선은 『대동선교고』 뿐만 아니라 『대둔사지』 전권全卷이 다산 1인의 저작이라고 밝힌 바 있다. 김영호와 허흥식 또한 윤동尹峒의 발문跋文과 찬술 방식을 기초로 다산의 저작임을 주장하고 있다.
『대동선교고』는 이외에 최익한崔益翰에 의해 『해동선교고海東禪敎攷』로 불리기도 하고, 『대일본속장경大日本續藏經』에서는 심지어 박영선朴永善이 편집한 『조선선교고朝鮮禪敎考』로 둔갑하기도 했다. 전용운 또한 초의를 비롯한 승려들이 편찬하고 다산이 필사했다고 한다.
한편 『대둔사지』의 찬술 시기는 1814년부터 다산이 강진을 떠난 1818년 이전으로 보는 설과 1823년(순조 23) 설이 대두되고 있다. 전자는 『대둔사지』 본문 가운데 연대를 알 수 있는 사실로 가장 늦은 시기인 1813년에 다산이 제題한 『연담시권蓮潭詩卷』과 역시 1813년에 지어진 『연담대사비명』을 기초로 한 것이다. 후자는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1823년 설을 주장하고 있다. 아무래도 1818년 이전에 찬술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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