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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근대적 시각에서 바라본 일본불교사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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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2 년 3 월 [통권 제107호]  /     /  작성일22-03-04 09:23  /   조회4,56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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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14 | 무라카미 센쇼村上專精 1851-1929 

 

무라카미 센쇼村上專精(1851〜1929, 이하 센쇼)는 정토진종 오타니파大谷派의 교가쿠지教覚寺에서 태어났다. 생가가 빈궁해 8살 때 다른 절에 맡겨진 이후 어려서부터 고학을 했다. 17세에 히메지姫路에 있는 유우키기도結城義導 학원에서 한서漢書를 배웠다.  

 

학문적 열의와 근대철학의 조우

 

이후 니가타新潟로 가서 타케다교츄武田行忠 아래에서 유식을 배웠고, 교토의 다카쿠라 대학高倉大学에 들어갔다. 25세에 아이치현愛知県 뉴가쿠지入覚寺의 양자가 되면서 성이 무라카미村上로 바뀌었다. 30대 초반에 교토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의 교사교교教師教校에서 수학하는 등, 30대 초반까지 학문적 성취를 위해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불교학에 대한 시야를 넓혔다. 졸업 후 도요카와 이나리豊川稻利에서 인명因明과 유식을 강의한 것이 인연이 되어 1887년, 도쿄의 조동종대학(현 코마자와대학)에 교사로 초빙되었다. 이후 학문적 성과가 컸던 철학관哲学館(현 동양대학)의 강사를 거쳐 도쿄 오타니교 교장(1890), 제국대 문과대학 강사, 정토종 본교 강사(1892)가 되었다. 특히 센쇼는 철학관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을 때, “이것으로 세계무대에 나간다는 생각에 잠겼다.”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그가 말한 새로운 세계무대는 당시 철학관에서 개설한 서양철학 강좌로, 센쇼는 이들 강좌를 청강하면서 서양의 근대학문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사진 1. 무라카미 센쇼村上專精. 사진 위키피디아.

  

“도쿄의 공기를 마시자마자 시세時勢라는 술에 취한 나는 이노우에井上 군이 철학관을 연다는 말을 들었다. 나 스스로가 강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보다는 내가 학생이 되어 철학이라고 하는 서양학문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철학관에서의 내 강의는 일주일에 2시간이었지만 다른 강의를 듣고 싶어서 매일 통학했다. 철학관의 수업들은 오후였기 때문에 오전에는 조동종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오후에는 철학관에 가서 철학사, 논리, 심리 등의 강의를 청강했다.”

무라카미 센쇼의 자서전 『61년』 중에서

 

센쇼는 칸트를 몰랐다는 동료를 설득해 키요자와 만시清沢満之로부터 특별 강의를 받을 만큼 서양철학에 대한 열의가 강했다. 이후 도쿄제국대학에서 인도철학을 강의한 것(1890)이 계기가 되어 도쿄제국대학 인도철학과 초대교수(1917), 오타니대학장(1926) 등을 역임하고, 동양여학교를 설립(1905)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잡지 『불교사림』 발간(1894~1899), 『대일본불교사』(1897), 『화한불교연계和漢仏教年契』(1898), 『불교통일론』 등을 간행해 일본불교사 연구의 기초를 닦았다.

 

불교통일론과 대승비불설

 

센쇼의 여러 저서 중 대표적 성과를 꼽으라면 아마 『불교통일론』(1901〜1905)일 것이다. 『불교통일론』은 불교를 통일적 시각에서 바라본 것으로 센쇼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서구의 비교연구나 철학처럼 불교 역시 종파를 초월한 불교 자체를 연구할 필요성을 역설한 저서이다. 실제 『불교통일론』 안에는 불교가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 것인가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는 당시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 불교연구 역시 새로운 시각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진 2. 동양여학교(설립당시). 東洋女子高等学校 제공. 

 

무라카미 센쇼는 『불교통일론』 제1편에서부터 제3편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사분오열된 원인과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사분오열의 원인은 근본 토대를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근본을 연구하면 동일 계열의 불교를 관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센쇼는 불교의 근본원리가 열반에 있으며, 근본원리와 최종 이상은 일치한다고 보았다. 근본원리 연구를 통해 불교 전체의 계통을 발견하면 불교를 통일시키는 방법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센쇼는 자신의 출신이 정토진종인 만큼 불교통일론에는 열반이 중심이 되어 불교 전체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센쇼만의 시점이 드러난다.

 

제4편 「교계론敎系論」에서는 무질서하게 보이는 불교의 계통을 바르게 정리하면 2,500여 년간의 불교 전체의 계통을 밝힐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제4편의 서술은 불교계 전체를 조직화하지는 못하고 『진종전사眞宗全史』로 충당하고 있다. 이러한 센쇼의 시각, 다시 말해 진종의 입장에서 본 교계론적 시각은 『일본불교사강日本佛敎史綱』(1898)을 비롯해 다이쇼기(1912〜1926)에 강의한 내용을 출판한 『선종사강禪宗史綱』(1946)에서도 연결된다. 제5편 「실천편」은 ‘신랑성인과 도겐선사聖人親鷺と禅師道元’라는 부제로 간행되었다. 서론에는 불교의 근본의미로서의 실천론을 개관한 이후, 신랑과 도겐을 비교론적 관점에서 서술했다. 

 

사진 3. 신편 『불교통일론』(2011). 書肆心水 제공. 

 

하지만 센쇼는 『불교통일론』에서 종파적 견해를 넘어 전체 불교의 입장에서 ‘대승비불설’을 제기하면서 오타니파大谷派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실제로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승적 박탈에 준하는 의미로 오타니파에서 파문당했다. 센쇼가 대승비불설을 제기한 배경에는 에도시대에 불교에 비판적이었던 일본 내 사상가들의 영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메이지 이후 유럽의 근대적 연구방법론이 일본에 도입되면서 유럽의 시각이 근저가 된 것이다. 당시 센쇼와 동일한 입장을 취한 이들로는 아네사키 마사하루姉崎正治(『불교성전사론』, 1899)나 마에다 에운前田慧雲(『대승불교사론』, 1903) 등이 있었다. 

 

사진 4 『 불교통일론』 실천편. 일본국회도서관 제공. 

 

센쇼에 대한 대표적인 평가는 근대적 학문체계로부터 불교를 바라본 학자라는 점이다. 더해서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와는 시각이 대비되는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실제로 센쇼의 대승비불설과 비견해 엔료는 석가모니가 대승불교를 설파한 것은 아니지만 철학적으로 뛰어나다고 하여 대승불교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일본불교의 특징은 종교적 신앙의 발전

 

『불교통일론』 발간 이후 센쇼는 일본불교사에 대한 그간의 연구 성과들을 총망라한 일본불교의 특색을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물론 1890년에 발표한 『불교일관론佛敎一貫論』이나 『불교충효론佛敎忠孝論』(1893)에서도 일본불교의 특색에 대해 언급했지만 1900년 이후 보다 체계화되었다. 그는 일본불교의 특색을 기술하기에 앞서 인도와 중국불교의 특색을 언급한 이후 일본불교와의 상이점을 설정했다. 근세 이후 일본의 연구자들이 조선불교(한국불교)를 언급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은 센쇼 이전에도 존재했다. 한국불교가 전체 불교사 성립에서 사라지게 된 일명 조선불교 패스론에 대해서는 향후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하겠다. 

 

센쇼에 의한 불교의 발전은 크게 3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규율적 제도상의 발전, 둘째 철학적 교리상의 발전, 셋째 종교적 신앙상의 발전이 그것이다. 그는 이 3개의 발전을 공간적으로는 인도-중국-일본이라는 지리적 관계성으로 배대하고, 교의적 측면에서는 ‘계·정·혜’의 삼학에 비유했다. “계戒는 계율로 제도를 말한다. 혜慧는 지혜로서 철학을 의미한다. 정定은 선정이다. 자력교自力敎인 선정은 타력교他力敎의 신앙에 해당한다.”라고 설명했다.

 

인도불교는 규율적 제도와 철학적 교리상의 발전은 이루었으나 신앙의 발전은 의심스럽고, 중국불교는 규율적 제도와 종교적 신앙의 발전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았다. 중국에서 ‘염불’이라는 실천은 있었지만 일부 지역에 불과하고 일본의 염불처럼 하층민에게까지 전달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중국불교는 철학적 교리상의 발전만 존재했다고 정리했다.

 

반면 센쇼는 일본불교의 특색을 시기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제1기 나라시대는 중국불교를 배운 것에 불과하고, 제2기 헤이안시대는 사이쵸最澄의 천태종과 쿠카이空海의 진언종이 성립되어 일본의 밀교가 세계 제일이라고 자부했다. 일본의 밀교는 “철학적 이상 위에 종교적 면목을 나타냈다. 소극적 불교를 적극적으로 바꾸고, 이상적 불교를 신앙적으로 했다.”라고 언급했다. 즉, 센쇼는 일본불교의 특색을 ‘종교적 신앙상의 발전’으로 봤다. 나아가 일본불교가 가장 발전한 시기를 제3기 가마쿠라시대로 보고, 이 시기 불교의 특색을 제종교의 실천성으로 규정했다. 

 

사진 5. 도쿄 조시가야레이엔(雑司ヶ谷霊園) 공원묘지에 있는 무라카미 센쇼의 묘소 

 

센쇼의 일본불교 특색 역시 이노우에 엔료의 ‘지위상응설地位相應說’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엔료가 대승불교를 풍토와 기후 등의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서술했다면, 센쇼는 ‘대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인도·중국·일본불교의 문화적 배경의 개별성과 고유성에 착안했다. 주목할 점은 센쇼가 명시적으로는 3국의 관계에서 우위여부를 주장하지 않았지만 일본을 중심으로 한 시점에서 각 지역의 불교적 특색을 비교 기술했다.

 

센쇼 이전의 일본 불교사 서적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필자의 사견이 첨가되었지만 센쇼는 이를 철저히 배제했다. 그는 서양의 근대적 연구방법론에 입각해 종교로서의 통일성, 일본불교의 고유성과 특징을 학술적으로 접근하고자 한 연구자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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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현재 아시아 종교문화 교류에 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ikemire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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