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쓴 선문정로]
절대 무심이 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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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2 년 3 월 [통권 제107호] / / 작성일22-03-04 11:21 / 조회5,098회 / 댓글0건본문
풀어쓴 『선문정로』 2
선문의 궁극적 목적이 견성에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본성이라고 불리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어서 어느 순간 그것을 보게 되는가? 참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에 성철스님은 보다 확실한 기준을 제시한다. 구경무심이라야 견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견성은 무심의 실천과 성취로 일어나는 최후의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선문정로』의 ‘견성즉불’ 설법은 견성이 무심의 완전성 여부에 달려 있음을 역설한다.
절대무심이 견성
왜 절대 무심이라야 견성인가? 다 이유가 있다. 삶은 덧없는 무상이자 한결같은 불만족 그 자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를 기웃거리고 불교를 만나게 된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갈망의 가속페달을 밟아온 우리를 향해 일단 멈춤의 신호를 보낸다.
신호에 멈출 줄 안다면 그는 좋은 운전자다. 그렇게 멈춰보면 스쳐 지나가던 것들이 바로 보이기 시작하고, 지금 서 있는 이 지점이 곧 도착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가 곧 축제의 현장이라서 보이는 것마다 소반 가득 진수성찬이고, 들리는 것마다 공기를 출렁이게 하는 음악 소리다. 여기에서 인연의 리듬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는 데 유감이 없다면 축제로서의 그의 삶은 완성된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정말 이렇게만 된다면 종교도 필요 없고 불교도 필요 없겠지만 욕망의 집요한 관성이 우리를 재촉한다. 나만이 최고로 인정받는 자아의 왕국을 향해 거듭 나아가도록 갈망의 순환 열차를 추동한다. 그리하여 고통의 쳇바퀴 속 질주가 멈추지 않는다. 이 갈망의 순환 열차를 움직이는 에너지원이 바로 나를 세우고 대상을 나누는 분별심이다.
분별심은 그 자체가 어린 왕자의 바오밥나무와 같아서 본래 완전한 이 삶의 행성을 조각낸다. 수행자들은 이것을 치우기 위해 혹은 잎을 따내고, 혹은 가지를 치고, 혹은 줄기를 자르는 방식으로 수행을 하고 그만큼의 효과를 거두어 자유를 구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분별심의 바오밥나무는 다시 무성하게 자라나 부처의 행성을 뒤덮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성철선은 분별과 집착을 뿌리째 뽑아내는 무심의 완전한 성취에 전체를 건다. 그것은 수행의 의지와 지향을 갖는 일 자체까지 문제 삼을 정도로 철저하다. 수행의 의지와 지향이라는 바로 그것이 일종의 세련된 유심에 속하기 때문이다. 원래 불교에서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선행을 닦거나,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친다. 또 생멸의 원리를 관찰하거나, 자아를 내려놓거나, 바름을 닦도록 가르친다. 그 각각은 고통의 바다를 벗어나도록 이끄는 훌륭한 길 안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닦는 주체가 있고,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다. 수행의 주체와 지향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유심의 틀 속에서 일어나는 유심의 뒤범벅이다. 수행의 성취 자체가 더 높은 차원으로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보살의 공부가 완성된 10지보살이나 공부의 틀을 넘어선 등각보살까지도 버려야 할 유심의 범주에 포함한다. 수행이 깊어져 고도의 성취를 이룬 차원일수록 그 장애성이 모호해진다. 심지어 안목이 준비되지 않은 수행자는 그것을 높은 깨달음의 성취로 찬양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의미 부여가 일어나는 순간 수행은 그 자리에서 멈추게 된다, 수행자는 스스로 도달한 경계에 도취하여 깨달음을 선언하고 새로운 자아왕국을 건설한다.
이처럼 수행의 차원이 높을수록 그것이 갖는 흡인력이 강력하고 그 결과 또한 가공할 만하므로 성철스님은 이로 인한 장애를 제8마계라고 불렀다. 높은 경계일수록 장애성이 노출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더 큰 장애가 된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도가 한 길 높아지면 마장도 한 길 높아진다’는 말이 가리키는 바가 이것이다. 그래서 성철선은 100리 여정에 90리를 지났다 해도 신발끈을 다시 매고 새롭게 출발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그것은 부처님의 모범을 따르는 일이기도 하다.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은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다가 인정한 선정의 성취를 내려놓고 까마득히 모르는 자리로 새롭게 나아갔다. 그리하여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사라진 진정한 무심의 자리에 나아가 진여와 하나로 만난다. ‘각종의 유심有心이 다 없어져 탈 수레도 탈 사람도 없고 무심이란 명칭까지도 붙을 자리가 없는 그런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니까 성철스님에게 무심과 견성은 동의어다. 오직 무심이라야 견성한다. 이에 비해 어떤 기특한 견해, 어떤 기이한 체험이라 해도 유심의 차원이다. 그것에 도취되어 머무는 일이 없어야 하는 이유이다. 성철스님은 말한다.
“혹 참선을 하다 나름대로 기특한 견해가 생기고 기이한 체험을 하더라도 그걸 견성으로 여겨 자기와 남을 속이는 오류를 범하지 말고 한 올의 터럭, 한 방울의 물이라 여겨 아낌없이 버리기를 간곡히 당부한다.”
군말이 길었다. 『선문정로』의 첫 설법주제인 견성즉불의 주제로 돌아가보자. 성철스님은 선문의 대종사답게 견성즉불, 즉 ‘견성하면 곧 부처’라는 주제로 『선문정로』의 설법을 시작한다. 그런데 스님은 본성(性)을 보는(見) 일을 말하는 대신 전체 설법을 무심의 완전성에 대한 강조에 집중한다. 그래서 구경무심론은 『선문정로』에 제시된 성철선의 가장 두드러진 종지의 하나가 된다. 그것은 성철스님이 실천한 간화선이 무심의 길을 걸어 구경무심에 이르는, 그야말로 방법과 목적에 있어서 무심으로 관통하는 수행법이었다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 송이 꽃으로 우주를 들다
다시 생각해 보자. 선종의 종지는 마음을 바로 가리켜 보이고(直指人心), 본성을 보아 부처가 되는(見性成佛) 일에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마음을 바로 가리켜 보이는 일인가?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 가섭에게 보여주고 가섭이 미소 지었다. 직지인심의 꽃에 견성성불의 미소가 도장 찍듯 만난 것이다. 선종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개벽적 사건이다.
문제는 스승과 제자의 쿵짝이 이처럼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데 있다. 왜 그런가? 꽃을 들어 올리는 일은 누구나 지어 보일 수 있는 하나의 구체적 행위이다. 그것은 움직이고, 멈추고, 앉고, 눕는 일상의 행위와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런데 가섭은 여기에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가섭의 눈에는 부처님의 모든 행위가 다 마음을 바로 가리켜 보이는 일이었다는 말이 성립한다. 왜 아니겠는가?
부처님은 꽃을 들어 올리는 하나의 행위로 부처님의 마음, 우주법계 전체를 들어 보여주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도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은 식사하고, 그릇 씻고, 꽃 피고, 잎 지는 일을 통해 직지인심의 꽃을 들어 올리고 있다. 오직 이에 미소로 답해야 할 중생들만이 멀뚱멀뚱 눈을 껌벅이며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이다.
명백하게 들어 올려진 부처의 꽃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눈에 백태나 티끌과 같은 무엇이 끼었기 때문이다. 부처의 꽃을 바로 보려면 바른 눈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불교의 모든 수행은 오로지 눈에 낀 이 백태와 티끌을 씻어내는 일에 집중된다. 이를 위해 탐욕(貪), 분노(瞋), 오만(慢), 어리석음(痴), 바르지 못한 견해(惡見)의 덩어리 티끌과 여기에서 비롯되는 허다한 조각 티끌을 분류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다양한 방법과 단계가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직지인심을 종지로 하는 선종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성철선에서는 번뇌의 타파를 극히 단순화한다. 번뇌의 본진인 마지막 뿌리를 잘라내는 일에 모든 일을 걸라는 것이다. 그러면 저절로 8만4천의 번뇌가 함께 소멸하게 된다는 논리이며 실제로 효과가 증명된 지름길 처방이기도 하다.
성철선의 세 가지 관문
여기에서 지목되는 마지막 뿌리가 바로 무명이다. 그것이 모든 번뇌의 최초의 뿌리이자 12인연의 바퀴를 굴리는 출발점이므로 근본무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견성하려면 근본무명을 끊어내야 한다. 성철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선문은 견성見性이 근본이니, 견성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철견徹見함이다. 자성은 그것을 엄폐한 근본무명, 즉 제8아뢰야의 미세망념이 영절永絶하지 않으면 철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문정전禪門正傳의 견성은 아뢰야식의 미세가 멸진滅盡한 구경묘각究竟妙覺·원증불과圓證佛果이며, 무여열반無餘涅槃·대원경지大圓境智이다.”
견성을 가로막는 근본무명만 잘라내면 그것이 곧 견성이고 궁극의 묘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철선은 번뇌의 마지막 뿌리인 근본무명을 완전히 끊어내어 구경무심에 이르는 일을 실천의 몸통으로 삼는 것이다. 이 근본무명은 최후의 심층 무의식으로서 그 작용이 극히 미세하므로 극미세망념이라고도 부른다.
극히 미세하다는 것은 이것이 일어나는 것을 감지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눈 밝은 스승이 필요한 이유이다. 바른 스승을 만날 수 없다면 그것을 판정할 정확한 잣대라도 필요하다. 끊어내고자 하는 것이 아뢰야의 최심층 근본무명이므로 그것은 최소한 다음의 질문을 담은 잣대라야 한다. 첫째, 망념의 단절이 표층의식의 차원에서 충분히 완결되었는가? 중층의 잠재의식 차원에서는 어떤가? 나아가 심층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어떤가?
이것이 바로 성철선의 세 관문이다. 아무리 견해가 밝고 경계가 새롭다 해도 의식의 차원에서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진여와의 통일이 한결같은지(동정일여), 꿈의 차원에서 역시 그러한지(몽중일여), 꿈조차 없는 차원에서 또한 그러한지(숙면일여)를 자문해 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스스로 취해야 할 마음 자세가 분명해지리라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견해로 괜한 오기 부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 6추뿐 아니라 3세의 미세망상까지 완전히 떨치고 오매일여, 숙면일여의 경계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견성이다.”
그런데 좀 기가 질리지 않는가? 참선에 매진하여 삼매를 체험했다 해도 그게 아니다. 선사들의 수작이 무슨 일인지 알게 되고, 자신도 끼어들어 한마디 할 준비가 되었다 해도 그게 아니다. 일상생활의 현장은 물론 꿈에서까지 부처님 마음과 하나로 만나는 무심에 도달했다고 해도 그게 아니다. 심지어 꿈조차 없는 숙면의 상태에서 한결같다 해도 그것조차 통과해야 할 관문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성철선의 세 관문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물러서도록 만드는 철벽 방어의 관문이 될 수도 있다. “과연 우리에게도 그 몫이 있을까?” 낙망과 회의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진실한 공부는 절망과 희망, 비관과 낙관이 교차하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실로 이 공부는 절대적 낙관으로 시작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절망과 비관 없이 진정한 낙관이 있을 수 없다. 불성이라는 부처님의 전 재산을 물려받아 시작하는 공부라서 이미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만큼 공부가 깊고 철저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점을 고려하여 성철스님은 격려의 말을 잊지 않는다.
“견성하려면 10지와 등각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면 혹자는 ‘너무 높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물러서는 마음을 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하기만 하면 누구나 다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질린 기가 살아나지 않는다면 이 공부가 참고 견디는 괴로움의 연속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의 향연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듯하다. 누구라도 선문에 들어 화두를 바로 드는 사람이라면 바로 그 순간 전에 없던 고차원의 행복과 접속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문정로』는 완전한 눈을 갖추었으되 청맹과니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열린 맹인잔치로의 초대장이고, 세 개의 관문은 잃은 길을 찾아주는 신호등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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