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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서구사회의 참선 포교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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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2 년 5 월 [통권 제109호]  /     /  작성일22-05-04 09:28  /   조회3,84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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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의 불교학자들 16 | 샤쿠 소우엔釋宗演 

 

“산문을 들어서니 좌우에 있는 커다란 삼나무가 하늘을 높게 가려서 길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 음침한 분위기를 접했을 때 소스케는 세상과 절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 고즈넉한 경내 입구에 선 그는 처음으로 감기와 비슷한 일종의 오한을 느꼈다. (생략) 노스님은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 본래의 면목이 무엇인지 그것을 생각해보면 좋겠다.”라는 화두를 던졌다. 소스케는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이라는 의미를 잘 몰랐지만, 어쨌든 자신이 무엇인지, 그 본체를 살펴보라는 의미로 판단했다.” - 나쓰메 소세키의 『문』 중에서 

 

출가와 학문적 기반 

 

일본이 자랑하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소설 『문』의 일부분이다. 나 쓰메는 정양을 위해 방문한 엔가쿠지円覺寺에서 샤쿠 소우엔과 조우했다. 그는 샤쿠 소우엔에게 배운 참선 경험을 소설 『문』에서 녹여냈고, 특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스님은 샤쿠 소우엔을 모티브로 했다.

 

샤쿠 소우엔釋宗演(1860〜1919, 이하 소우엔)은 메이지와 다이쇼大正 시기에 활약한 임제종 승려이다. 후쿠이현 다카하마쵸福井県 高浜町 출신으로 서구에서 일본 선禪의 붐을 일으킨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의 스승이기도 하다. 흔히 스즈키 다이세츠가 서구에 선禪을 ‘젠Zen’이란 용어로 소개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샤쿠 소우엔이 시카고에서 개최된 제1회 만국종교회의(1893)에서 처음 ‘젠’을 세계에 선보였다.  

 

사진 1. 샤쿠 소우엔. 사진 도케이지東慶寺 제공. 

 

소우엔은 10살(1870)이 되던 해, 교토 묘심지妙心寺의 엣케이 슈켄越渓守謙을 스승으로 삼아 출가했다. 묘심지 내에 설립된 ‘반야림’이란 학림에서 한서와 선종을 배웠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 다른 선승들처럼 여러 사찰을 돌며 수행생활을 지속했다. 대표적으로 13세(1873)에 켄닌지建仁寺의 치바 준가이千葉俊崖 밑에서, 16세에 다이호지大法寺의 니시야마 카산西山禾山, 미이데라三井寺의 나카가와 다이호中川大宝, 17세에 소겐지曹源寺의 기잔 젠라이儀山善來 등 당대의 선승들에게 선을 배웠다. 가마쿠라 엔가쿠지円覚寺의 이마키타 코센今北洪川 아래에서도 5년간 수학한 후,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젊은 소우엔 선사, 오랫동안 애써 참선하고 도를 배워 이미 나의 실내공안을 타파하는 큰일을 마쳤다. 곧 게송을 지어 오랜 시간 정말 참을 수 없는 정을 나타낸다. 노승, 축하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운을 써서 인가증명의 뜻을 나타낸다.”

 

소우엔 만 23세(1883) 때의 일로, 그는 동년배보다 일찍 깨달음에 이르렀다. 소우엔의 수행을 겸한 학업은 시마지 모쿠라이島地黙雷와의 친분으로 이어지고, 엔가쿠지 주지 및 임제종대학 2대 학장(현 하나조노 대학花園大学)으로 취임하는 기반이 되었다.

 

게이오의숙 입학과 스리랑카 유학

 

향후 소우엔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마 스리랑카(당시 실론섬) 유학일 것이다. 스리랑카 유학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우선,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스승인 코센이 서간을 보내 “양학은 쓸만한 교의가 전혀 없다”고 맹렬히 반대했지만, 소우엔은 “말로는 다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라는 글을 남기고 엔가쿠지를 나와 게이오의숙 입학을 강행했다. 게이오의숙 입학을 결심한 데에는 인도와 서구유람을 마치고 돌아온 시마지 모쿠라이와의 인연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이오의숙 별과別科에 입학한 후,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로부터 양학과 영어를 배웠다.

 

사진 2. 소우엔이 공부했던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다만, 그의 게이오의숙 시기는 메이지 정부의 종교 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쇠퇴일로를 걷던 시기였다. 폐불훼석과 종파분립, 종교관리직 설치, 사찰 소유의 토지가 몰수되는 등 불교는 대대적인 개혁을 강요받았다. 게이오의숙 입학 당시 보증인이었던 도리오 고야타鳥尾小弥太와 야마오카 텟슈山岡鉄舟 등이 유불신儒佛神의 융합을 주장하면서 소우엔도 불교, 특히 임제선에 머물던 시야를 확장시켰다. 이러한 시야의 확장은 임제선의 틀을 뛰어넘어 일본종교의 근대화와 기독교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29세(1887)에 감행한 스리랑카 유학은 어쩌면 그의 시야 확장의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학을 결정한 계기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고, 당시 그의 주변인들은 그의 유학을 반대했다. 15년 전(1872) 시마지 모쿠라이의 인도 체험 이래, 기타하타케 도류北畠道龍 등이 석가모니 유적 참배라는 목적으로 도항해 인도 체험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열기가 사그라지는 시점이었다. 

 

 사진 3. 샤쿠 소우엔이 수행했던 스리랑카 란웰레 사찰.

 

그의 송별회에 참석한 지인은 그의 도항에 대해 ‘갑작스러운’이란 표현을 썼다. 즉, 소우엔의 유학(혹은 체험)은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닌 급하게 결정된 사항이었다. “지금의 인도는 옛날의 인도가 아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쇠퇴했고 볼만한 것이 없다.”는 지인들의 물음에 소우엔은 합당한 답변을 내놔야 했다. 불교유적지 참배라는 적당한 이유는 통용되지 않았다. 그는 스승과 지인들에게 “전문적으로 범학梵學을 배우려고 한다.”는 그럴싸한 답변으로 모두를 설득시켰다. 목적지 역시 스리랑카가 아니어도 됐다. 포괄적인 인도 체험이었고, 스리랑카로 구체화된 것은 그의 후원자인 도리오 고야타의 편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컸다. 

 

 사진 4.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만국종교회의.

 

소우엔의 경우, 가벼운 체험으로 시작된 도항은 오히려 전문적인 유학으로 바뀌었다. 1887년 3월 31일 콜롬보에 도착한 후 스리랑카로 들어가 빨리어를 배우고 승원에서 수행했다. 다시 사미로 출가해 판냐케투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곳에서 상좌부 불교와 스리랑카의 불교 및 당시 영국령이었던 스리랑카의 식민지의 생활 등을 면밀하게 살폈다. 스리랑카 체제 중에 간행한 『서남西南의 불교』(1889)에서 북방불교와 남방불교라는 이분법을 동북불교와 서남불교로 구분하고,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용어를 바꾸었다. 그는 스리랑카, 타이, 버마, 캄보디아를 소승으로, 중국, 조선, 몽고, 만주, 티베트 등을 대승불교로 분류했다.

 

소우엔은 인도에서 쇠퇴한 불교가 스리랑카에 여전히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실제로는 스리랑카 불교가 18세기 타이와 버마로부터 고승들을 모셔와 재흥한 불교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 타이로 재유학을 시도했다. 하지만 타이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거주지를 얻지 못해 본인의 의도와 달리 3년여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스리랑카 유학은, 소우엔이 불교의 원류를 찾겠다는 의지의 반영이었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서남불교(남방불교)가 선정禪定이 결여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그는 임제선이라는 그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셈이다.

 

시카고 만국종교회의와 일본 선을 북미에 전파

 

귀국 이후의 활동은 일본 자국 내보다 서구로 무게 중심을 돌렸다. 임제종 대표로 참석한 시카고만국종교회(1893)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는 이 회의에서 ‘불교의 요지 및 인과법’을 주제로 두 차례 강연하고 앞에서 기술했듯이 일본 선(Zen)을 세계에 처음 소개했다. 

 

사진 5. 출판업자 폴 카루스Paul Carus. 

 

소우엔은 강연을 통해 알게 된 출판업자 폴 카루스Paul Carus가 “영어에 능통한 사람을 보내달라.”는 요청에 따라 스즈키 다이세츠를 보냈다. 폴 카루스는 스즈키 다이세츠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저서 『붓다의 복음』을 일본어로 번역해 출판했다. 이를 계기로 스즈키 다이세츠, 소케이안, 스즈키 순류鈴木俊降 등 소우엔의 제자들이 미국 사회에 선을 전파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했다. 

 

 사진 6.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소우엔은 만국종교회의를 통해 알게 된 미국인들이 일본을 방문했을때, 그들에게 참선을 체험하게 하는 등 서구에서 일본 선을 상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를 각인시킨 장본인이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켄쵸지파建長寺派의 책임자로 만주에서 종군포교를 담당하기도 했다.

 

사진 7. 시카고 만국종교회의에 참석한 일본인들. 오른쪽 2번 째 샤쿠 소우엔.
 

1905년, 소우엔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면서 미국인들에게 좌선을 지도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불교강연을 개최했다. 강연 내용은 『관장설교집管長說敎集』으로 출판되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캘리포니아주 의회가 일본인 이민금지를 결의하고, 한국-일본인 배척연맹을 결성(1905), 샌프란시스코 대지진(1906) 등으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된 상태였다. 이에 그는 워싱턴으로 가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회견하고, 스즈키 다이세츠의 통역을 통해 세계평화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고 전한다. 

 

사진 8. 소우엔의 미국 포교와 조력자들. 중앙이 샤쿠 소우엔.

 

미국 사회에 참선을 전파하고자 한 소우엔의 활동은 그의 제자인 샤쿠소카츠釋宗活, 사사키 시게츠佐々木指月 등이 이어받는다. 이들은 선원과 동점선굴東漸禪窟 건립, 군영학원과 동양사상연구회 설립 등을 통해 좌선 지도와 일본어, 동양문화를 백인들에게 가르쳤다.

 

 사진 9. 샤쿠 소우엔 묘소. 소우엔에 만년을 보낸 가마쿠라 도케이지 위치.

 

소우엔을 비롯한 임제선의 미국 포교는, 여타의 종파와 달리 철저히 백인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했다. 이를 통해 미국 내에서 임제선의 위치를 공고히 다지고, 백인들에게 일본이 아시아 문화의 정수, 혹은 다른 아시아국과 달리 모던하고 세련됐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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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현재 아시아 종교문화 교류에 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ikemire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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